자신을 남들보다 ‘빠르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고 믿었던 에릭 리델(Eric Liddell)은 많은 영국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924년 제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 종목인 100미터 경기 예선전이 주일로 확정되자 과감히 경기 불참을 선언합니다. 주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의 결정은 달리는 목적이 자신의 우승과 야망이 아닌,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에릭의 불참 소식이 영국 전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그를 두고,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조국의 명예를 버린 자’, ‘광신주의자’라며 일제히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세자까지 나서 리델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주님의 법 안에서, 주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갖은 비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리델은 기적적으로 400m 경기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됐고,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됩니다.
에릭은 '47초6'이라는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승전 테이프를 끊고 쓰러진 에릭의 손에는 한 쪽지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결승전에 출전할 때 담당 안마사가 쥐어준 것인데,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나도 존중하리라(삼상2:30)"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우승의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처음 200m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해 뛰었고, 나머지 200m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뛰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은퇴한 이후 24세의 나이로 중국 선교사로 떠났습니다.19년간 선교를 마치고 43세에 순교하였습니다. 리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실천함으로 자신의 인생을 멋지게 마무리 하였습니다.
오늘은 예람교회 창립 42주년을 맞이하는 감사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교육과 선교였습니다. 장년예배 출석보다 주일학교 예배 출석 인원이 훨씬 더 많은 교회가 되고 싶었습니다. 일원동으로 이전하기 전에 역삼동에서 목회할 때만 해도 주일학교 예배 출석율이 높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어떤 목회를 할까 기도하면 말씀을 읽는 중에 제 마음을 사로잡는 본문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3-47절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45절에 근거하여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를 제 평생 교회의 모토로 삼고자 했습니다. 선교에 열정을 주셔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동남 아시아에 교회를 세우고, 지역 선교 단체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해 왔습니다.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먼저 내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은혜를 계속해서 경험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25, 27, 28, 31, 38절). 꽤 오래전에 심방갔을 때 60대 중반의 한 집사님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제가 학개서 1장 6절의 말씀을 읽고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목사님 제가 지난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학개서 1장 6절을 펼쳐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경에 학개서가 있는 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성경을 펼쳐서 학개서가 있는 것 보았더니 정말 있더라구요.
1장 6절에는 이렇게 쓰이져 있었습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 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좋은 품종의 씨를 뿌렸는데 수확이 적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막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습니다. 옷을 입어도 따뜻하지 낳습니다. 열심히 돈을 버는 것 같은데 어디론가 다 새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성경을 읽는 순간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을 통해서 이 본문을 다시 읽는 순간 저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동안 제 삶의 우선순위가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개서 1장 9절을 통해서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말씀을 드렸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삶의 우선순위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내 집은 황폐하였지만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 순위는 "하나님" 먼저, 그리고" 다음에 "다른 사람", 그 다음에 '당신"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고 , 무엇을 더 가볍게 여깁니까? 마태복음 6장 24절입니다.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질문하십니다. 우리가 참으로 가치를 두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염려는 실천적 무신론이며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대신에 일용할 양식을 이하여 노예처럼 일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염려는 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 안에서도 행복하지도 않고 하나님 안에서도 행복핮비 않고 자신과 삶을 저주하여 밤낮으로 우울하게 슬픔중에 살아갑니다.
2.염려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염려는 현실의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 같지만 사실은 두 주인을 섬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염려란 마음이 나누어지고, 헷갈린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을 경히 여기고 어떤 것을 중히 여기느냐의 문제입니다. 본문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염려는 현실적인 필료를 채우기 위하여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현실적인 필요의 문제는 해결해 주시지 않으시고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염려는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음식도 있어야 하고 옷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음식을 먹어야 생명이 연장됙고, 옷이 있어야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 맞습니다.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하느냐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는 외면하시고 영적인 가치만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실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두 가지 예를 드십니다. 하나의 예가 공중의 새의 경우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살아가는 것 같다. 자기 능력껏 살아간다. 정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기르십니다. 공중에 날아가는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두지도 않습니다. 시편 104편 14절입니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아 나게 하셔서.”
새들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먹이를 위해 부지런히 수고함으로 염려를 대신합니다. 새들은 염려하지 않기 때문에 창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비밀 자금을 만듭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 가운데 상당한 부분은 필요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심, 즉 외식 때문에 염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들도 기르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께서 보실 때 너희는 공중의 새들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염려의 문제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누가 돈을 내는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사 약속이 잡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대뜸 이렇게 물어봅니다. 아빠 엄마 식사비는 누가 내는데? 그러나 부모는 식사비가 얼마드는가 하는 것 보다 그분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에 더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것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실제적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분문 27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줄 알면서도 자신을 염려에 내어맡깁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왜 우리는 염려하고 있는 것일까요? 걱정도 팔자라고 해서 그런걸까요? 이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염려할 줄 아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8-30절입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염려의 문제는 소유의 문제에서 관계의 문제로 풀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염려라는 감정의 문제에 대해서 들의 백홥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고 하셨습니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지만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염려라는 감정의 문제는 생각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더구나 이렇게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염려지수가 높으면 믿음이 작은 사람이고 염려지수가 낮은 사람은 믿음의 지수가 높은 사람입니다. 염려는 자녀가 하는 것일까요, 부모가 하는 것일까요?
자녀가 돈 걱정을 하고 생활의 염려를 하고 있다면 부모가 좋아하실까요? 부모가 화를 내시고 야단을 치십니다. 부모를 무시하고 믿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사업에 부도가 나서 제가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마련한 적이 없습니다. 제 딴에는 아버님의 칭찬을 받을 줄 알고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버님 이번 대학 등록금은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제가 이번 학기에 등록금을 알바로 마련했거든요. 저는 아버님이 기특하다고 칭친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근데 정 반대로 얼마나 꾸지람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이놈의 자식아 아빠가 있는데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했다.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그딴 걱정하라고 했냐?제딴엔 부모의 걱정으로 덜어드린다고 하면서 부모의 역할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뒤 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염려할 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 32절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현실에 대한 염려는 이방인들, 세상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살면서 이방인의 염려를 구하는 사람입니댜. 물론 신자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는 것은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필요한 것을 내가 채우는데 급급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3.염려가 찾아올 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을 때입니다 .
“본문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에 삶의 우선순위를 두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삶의 초점을 맞추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채워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이렇게 질문해 보셔야 합니니다. 과연 나는 요즈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있는가? 삶의 우선순위가 혹시 바뀌어져 있지 않은가 점검해야 합니다. 여기서 더하여 주신다는 것은 보너스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은품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생활의 필요를 해결하는 것은 메인이 아니고 서브이기 때문에 더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메인은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성공은 메인이 아니라 서브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메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고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했느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것을 얼마나 경험하며 살아왔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이 더하여 주시는 것을 별로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 하여 주신 것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신앙 생활을 할 때에 주의해야 모드가 있습니다. 말씀은 “그렇지만”이라고 말하면서 생활의 염려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말씀에 나와 있으면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고 순종해야 합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맞추면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3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과거에 염려를 오늘의 염려에 보태지 말라는 것입니다. 장래의 염려를 과거에 염려에다 현재의 염려까지 보태지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나누기를 잘 해야 합니다. 믿음은 곱하기를 잘 하는 것입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해야 하고 한날의 괴로움은 이월시키지 말고 그날에 끝내야 합니다. 새는 한날의 괴로움을 그 날로 끝냅니다. 미리 괴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새는 훌쩍 떠나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염려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염려를 이기는 사람입니다(맥스 루케이도). 염려가 몰려올 때 우줄해지지 말고 복잡해지지 말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말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염려의 감정이 몰려올 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생각으로 능히 이기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일을 지키는데 삶의 우선순위를 빼앗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채워 주셨다는 간증이 넘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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