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가 긴박하게 돌어감에 따라 세계의 예언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계 22:20). ”지금은 마지막 때 바로 그때“라는 “기사가 많이 올라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사람은 반드시 한번은 죽게 되어 있고, 그 후에는 진짜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 최후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이 이외로 적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역사의 시작이 있었던 것처럼 역사의 종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해 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했을 때 땅이 저주를 받고 인간은 고생하면서 살다가 죽음으로 끝나야 했습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고 육체가 되었을 때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성적으로 문란하여 죄악이 심각하다는 것을 아시고 유황과 불을 쏟아부어 멸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떨까요?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너무 악하지 않은가요?
하나님께서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개인이나 국가를 계속해서 심판해 오셨습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폼페이는 지금의 이탈리아에 있던 도시로, 로마 시대(1세기경)에 번영을 누렸던 곳입니다. 당시 그 도시의 인구는 상당한 수준인 3만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도시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도시 전체가 모두 화산재로 덮여 버리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폼페이에 살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몰려온 화산재에 파묻히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폼페이는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1,0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그 존재가 다시 드러났습니다. 1738년 4월의 어느 날, 한 농부가 베수비오 산에서 밭을 갈다가 꽤 긴 쇠붙이를 발견했다. 이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먼 옛날에 쓰인 수도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폴리의 국왕은 이 소식을 듣고 곧 발굴을 지시했고, 그 땅 밑에서는 놀라운 도시가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은 그 지하 도시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이 도시가 고대의 폼페이란 사실은 1755년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이 밝혀냈습니다.
어떤 시인의 말과 같이 “세상의 역사는 세상의 심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말 계신다면 이 세상에 불의한 자를 왜 그냥 그대로 두시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몰라서 능력이 없으셔서 그대로 두시는 게 아닙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입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게서는 인간의 죄악을 보시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후에 마지막 심판이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마지막 D-Day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일까요?
베드로후서 3장 10절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주의 날은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바로 그날입니다. 이때에 남자나 여자, 나이드신 분이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심지어 귀신들과 사탄까지도 심판을 받아 불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미 거기에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들어가 있습니다(계 20:10).
최후의 심판은 언제 시작될까요? 예수께서 언젠가 다시 오실 때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시대에 다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말세의 징조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가득차고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때 바로 그날입니다. 육체의 본능대로 행하고 성적으로 타락할 때입니다. 세상의 죄악이 관영할 때입니다. 부분적인 타락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타락할 때입니다. 문제가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확산될 때입니다. 글로벌 시대에 글로벌 죄악이 확산될 때가 최후의 심판의 전조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최후의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이전의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들에게 양심의 법을 주셨기 때문에 누구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롬 1:19, 20).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 아슬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 제가 다시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오늘 본문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두 가지 책입니다. 하나는 생명책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 첫 번째 준비는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은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입니다. 고등학교 시험 합격자 발표때 의 충격을 지금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빠져 있을 때 그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의 이름이 빠져있는 것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경험이 한번 쯤은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원을 좌우하는 생명책에 이름이 반드시 등재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성도들과 우리와 관계된 분들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절대로 소홀히 하거나 연기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이름이 생명책의 명부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 지옥에 던져져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한 시간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느냐 믿지 않았느냐의 차이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였느냐 거절했느냐입니다. 신자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요 축복의 날이요 위로의 날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는 그 날이 심판의 날이고, 저주의 날이요 고통의 날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집행하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십니다(11절).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시고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신자들이나 불신자들이나 예수님 다시 오실 때 부활하게 됩니다. 부활 후에 심판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심판하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입니다.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최후의 심판을 집행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찬송가 168장 후렴 가사에 있 것처럼 살아서 사랑, 죽어서 구원, 묻혀서 내 죄를 담당하사 부활로 우리를 구하신 예수, 다시 오시리 영광의 그날.
최후의 심판을 위해 두 번째 준비해야 할 것은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때 또 하나의 책이 펼쳐 있는데 각 사람의 행위가 기록된 책들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아 영원한 사망, 불못에 던져집니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각 사람이 행한 것에 따라서 정죄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세상에서 잘못한 것에 대한 정죄의 심판을 당하면서 평생 살아갑니다. 만약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 물질, 건강, 재능,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서 심판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베드로후서 4장 8절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것의 핵심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사랑했느냐가 관건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이렇게 설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지 우리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과 죄를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을 뜨거워지면 다른 은헤에 영향을 미칩니다. 사랑은 신앙의 열정을 붇돋워줍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마치 바퀴에 친 기름과 같습니다.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길 수 있게 해줍니다.”
예수님을 믿고 작은 사랑을 실천했는가 여하에 따라서 최후의 심판 때에 양과 염소로 나누어집니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보면 예수님 다시 오셔서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십니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사람이 주릴 때에 목마를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헐벗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 잘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시면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최후의 심판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특징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에 힘쓰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9-10절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따라서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고전 15:58). 성도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지만 그들의 행위에 상응하여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신자들에게 공포나 위협의 때가 아니라 위로와 감사의 때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위해 세 번째 준비해야 할 것은 회개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3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사데 교회뿐만 아니라 말세를 맞이하는 교회에 주신 공통적인 책망의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서 회개해야 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지 못하면 한 주일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토마스 보스턴은 그의 저서,⟪회개⟫에서 ”인간이 당하는 모든 재앙은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멸당한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회개란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 잠시 하는 경험이 아닙니다. 항상 회개하려고 애써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회개를 미루는 사람은 영혼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무엇을 위해 회개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회개하라고 하면 이미 회개했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죄는 새로운 회개를 요구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고 하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를 지으면 지체하지 말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회개할 때 우리의 죄가 삭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장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한 순간의 지체가 영원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죄악을 쌓아가지 말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나는 지금 바빠서 할 일이 많다고 더 이상 회개를 미루고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로마서 2장 5절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 저지른 죄의 내용과 방식까지 낱낱이 기록할 것입니다. 언제까지 죄책감과 불안에 사로잡혀 아슬슬하게 살아갈 생각이십니까? 지금 철저하게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갑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삽니다. 애국가에 있는 가사처럼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이 나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가는 영혼을 위한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민족이 가장 어려울 때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최후의 심판을 위하여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며 우리에게 맡겨진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신앙의 본질에 충실하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눅 13:1-9), 김덕선 목사 (1) | 2024.09.12 |
---|---|
겨자씨와 누룩 비유(누가복음 13장 18-21절), 김덕선 목사 (0) | 2024.09.12 |
공정한 사회로 가고 있는가?(이사야 32:7), 김덕선 목사 (0) | 2024.09.11 |
두 증인(계 11:3-14), 김덕선 목사 (0) | 2024.09.10 |
치유의 사건(누가복음 4:31-44), 김덕선 목사 (1) | 2024.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