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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by liefd 2024.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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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얻을 것인가, 영혼을 얻을 것인가?
세상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만큼 어떻게 사느냐에 큰 관심을 가지신다.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변화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배우고 또 배우는 것이다.

믿음과 삶은 병행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삼상 16:7).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직 마음만 중시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처럼(2:26) 겉으로는 불순종하면서 속으로만 신실한 믿음이 있다는 변명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적인 동시에 외적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지만, 그 후로도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고, 믿음의 진보를 추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모습인지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일까? 어떻게 해야 신앙과 삶이 병행하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건강한 신학으로 풀어내는 신앙과 삶의 조화

 

존경받는 신학자 R. C. 스프로울이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깊은 고민을 건강한 신학과 따뜻한 격려로 풀어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다룬 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통해 그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힘주시고 은혜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천국 소망을 이야기한다.

성경은 입으로만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마음으로는 멀리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2:14). 이러한 죄성과 연약함을 알기에 우리 스스로 좌절하고 실망하며 자책하지만, 성공과 실패가 병존하는 가운데 비록 더딜지라도 확실한 전진을 이루시는 성령님께서 오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본서를 통해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만나는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법을 매우 실제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성경이 제시하는 교훈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날마다 연습하라고 독려한다.

 

이 책은 무거운 학문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우리를 책망하거나 죄책감을 더해주는 책도 아니다. 오늘도 삶 속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우려는 작은 손길이며, 우리의 성장을 도우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만나고, 삶 속의 작은 결단과 변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는, 바로 당신을 위한 책이다!


저자소개, R. C. 스프로울(R. C. Sproul)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끄는 저명한 신학자로 심오한 진리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글과 강의로 유명하다. 또한 딱딱하게 들리는 성경 교리를 명쾌한 논리와 적절한 예화로 풀어, 성경 말씀이 일상의 삶과 떨어질 수 없게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어릴 때부터 ?’라는 질문으로 가득했던 그는 대학에서 친구에게 예수님을 전해 들었을 때에도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해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찾던 모든 문제의 확실한 답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그에게 마지막 한 가지 ?’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확실한 진리인 성경을 믿지 않는 걸까?’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의심하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그는 많은 철학자들의 책을 섭렵했지만 어느 것도 성경만큼 확실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번엔 그곳에서 갖가지 신학 이론과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회의에 부딪혔다.

 

그러나 스프로울은 오히려 그 회의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더욱 확신 있는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스프로울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해되지 않는 모순적인 대답을 갖고 편안하게 느끼는 안일함에 놀란다. 그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자세히 공부하지 않고 잘못된 추측 안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며 사는 무감각을 경계한다. 그의 글은 생각의 사각지대를 명확하게 끄집어낸다.

낙스 신학대학교 등 여러 주요 신학교에서 신학과 변증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세인트 앤드류 채플(St. Andrews Chapel)의 목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평신도 교육에 열정을 품고 7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리고니어 선교회를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알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1994크리스채너티투데이의 비평가들이 뽑은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 3위로 선정되었다.

 

1. 인자한 은혜

 

맹인이 두 단계에 걸쳐 병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8:22-25). 우리 주님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친히 그를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를 군중에게서 멀리 벗어나게 하신 후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하셨다.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침을 뱉으신 목적은 그를 모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 좀 보이냐고 물으셨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움직이는 형상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또 다시 그에게 손을 대셨다. 그러자 희미하던 물체들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시작-중생

 

우리 눈을 여사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보게 하시는 은혜는 중생 곧 영적 거듭남이다. 중생은 여러 단계에 걸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곧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만져주시는 순간, 단번에 성취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으로 즉시 거듭나고 흑암의 왕국에서 즉시 빛의 왕국으로 옮겨가지만, 성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거듭날 때 사람을 걷는 나무처럼 본다. 우리의 영적 시야가 뿌옇게 가려져 있다. 모든 게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거듭난 뒤에도 계속 죄를 지음으로써 시야가 여전이 가려져 있다.

 

신앙의 성장 과정은 칭의, 성화, 영화이다. 영화는 주님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진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할 때 외롭다 여김을 받는다. 이것이 칭의이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온전해지는 것을 영화라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주님의 만져주심이 필요하다. 비록 우리의 눈에 비늘이 벗겨졌지만 여전히 손을 잡고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중생은 여행의 시작과 같다. 성공과 실패가 병존하고 넘어지는 가운데 성장하는 여행이다.

 

삼손은 감옥에서 지렛대를 메고 원을 그리며 제분기의 바퀴를 돌렸다.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진보가 너무 더뎌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손으로 바퀴를 돌리고, 곱절의 노력을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지속-성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러한 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직선과 같다.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다. 영광이라는 최종 목표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말씀을 듣게 될 날을 향해 전진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위로부터의 부르심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진이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의 주인공 순례자는 하늘을 향해 전진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거듭난다는 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다는 뜻이다. 거듭남의 체험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거듭났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자기 기준으로 거듭남의 기준을 설정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시간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역사하신다. 정말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정말로 회심했는가?“이다. 우리가 만약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형제여 자매들이다(2:8-10).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실 때 우리의 정체성이나 개성을 멸하시지 않는다.

 

자동차 뒷 유리 스티커에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저를 참아주세요 하나님은 아직 저를 완성하지 않으셨거든요.’ 성화는 일종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즉각적인 성화의 과정, 은혜의 두 번째 사역, 두 번째 복을 약속하는 그릇된 교사를 멀리하라.

자기가 이미 영적인 완전함을 성취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 혹은 둘 다를 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이 복종할 수 있는 수준으로 대폭 낮추거나, 자신의 영적 행위에 대한 평가를 크게 부풀리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행위이며, 후자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자기기만의 수준으로 부풀리는 것은 극단적인 교만이다.

 

중생은 즉시 발생한다. 칭의도 즉시 발생한다. 그러나 성화는 죽을 때까지 이루어 가야할 전진이다. 허다한 장애물에 맞서 끈기 있게 싸워야 한다. 영혼의 깊은 밤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유혹의 광야를 지나야 하는 여행이다. 이 여행에는 한 가지 보증 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가시고 우리를 건너편에 데려다주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성장과 변화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에 관해 더욱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서 이루어가는 성장이 곧 성화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그리스도인이 성화,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배우는 데서 진보하려면 자기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주 잊는다.

광신자는 목표 지점을 잃어버린 채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갑절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6:33). 예수님은 그것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언가를 구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 집요하게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배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여기서 먼저란 우선권이란 의미가 강하다. 즉 너희는 먼저, 즉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구함

 

불신자는 결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다(3:11).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숨는 것이다. 예수님은 길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왜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을까? 그들은 행복, 마음의 평정,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 의미 있는 생활, 그리고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고 믿는 그 밖의 많은 것들을 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구하지는 않는다. 그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유익만을 구한다. 정작 하나님은 제외시켜 놓은 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유익만을 바라는 것이다.

 

회심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일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찾는 일은 평생 추구해야 하는 일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된 사업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주기도의 중요한 내용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마지막 계명을 이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집요하게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다(1:8).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땅에 임한다는 것은 왕의 자녀들이 지금 여기서 왕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섬김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시행될 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큰 인생 목표는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순종할 때 기뻐하신다.

 

 

의를 구함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예수님이 친히 나타내 보이신 의와 같은 종류의 의다. 예수님은 흠 없는 어린양이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히 그분을 삼켰다(2:17). 그분의 양식과 음료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4:34).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모방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올곧은 의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의는 모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매일의 경건과 신앙적 단어를 사용하는 이상이 것이 있다. 하나님은 매 믿음과 순종이 자라기를, 즉 젖을 먹는데서 고기를 먹는 데로 자라기를 바라셨다.

영성과 경건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더 높은 목표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면  그 자체가 무가치한 것들이다. 그 목표는 반드시 영성을 넘어 의에 이르러야 한다.

 

예수님의 영성은 궁극적으로 권위 있는 의로써 그 모습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영성은 단순히 표면적이지 않았다. 내면의 삶이 외면의 순종, 심지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순종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것, 하나님의 모든 뜻을 따르는 것이다.

 

 

미가의 요약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하나님은 우리가 정의와 인자와 같은 비중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갖기 바라신다. 그리고 겸손한 성도와 교제하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인자란 성실한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품으신 사랑, 곧 견고한 사랑이요, 인내하는 사랑, 항구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하는 모든 일을 인정하시지는 않지만 항상 그들 곁에 계신다. 우리 역시 아이들이 하는 일을 항상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준다.

 

성실, 인자와 같은 성품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이런 성품들은 성령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매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런 성실함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같은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약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6:31).

비판을 일삼는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기란 어렵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비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서 배울 수는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는 것은 인자, 곧 친절의 문제다. 그것은 사려 깊고 인정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공손하기만 해서는 실행할 수 없다. 그것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의롭다는 것은 올바로 산다는 뜻이고, 사람들을 올바로 대하며, 개인적으로 정직하게 산다는 뜻이다. 의로운 사람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정직은 일관성이 있다.

 

 

야고보의 요약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1:27).

참 신앙이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뜻이다. 야고보는 참 신앙을 사람 지향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온정이 없는 경건은 거짓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황금률에 순종할 때 기뻐하신다. 우리가 정의와 자비를 추구할 때,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할 때 기뻐하신다. 소외되고 짓밟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기뻐하신다. 성경이 우리에게 의로운 생활의 규율로 가르치는 것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고 욕설을 삼가는 영적 생활에 대한 관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만약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규율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의의 목표를 잃은 셈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규율은 하나님이 사람을 돌아보신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3.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위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12:1). 적은 누룩이 온 땅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5:6).

또한 그 경고는 다른 경고와 연결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위선과(외식)과 거짓 의를 말한다. 그렇지 않은데 의로운 척하는 누룩이다.

예수님은 우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는데 뭐 걱정할 것 있느냐고 넘어간다. 물론 걱정할 게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의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갖고 있다는 말 역시 우리가 정말 의를 추구할 때만 유효하다.

바리새인들은 표면적으로는 높은 외의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는 외적인 것, 겉모습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했다.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

 

구약 성경에는 바리새인이 나오지 않는다. 신구약 중간기에 등장했다. 바리새인이란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이교신앙이 유대민족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염려하여 당시의 사조에서 자신들을 구별했고 열정적으로 의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들의 운동은 곧 자기 의에 뿌리를 둔 외적 경건주의로 전략해 버렸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행을 의지하였고, 자기들에겐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를 영접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세기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바리새인의 전도생활 :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다니 그 열정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해 보라. 매우 수준 높은 선교단체나 보일 법한 열정이 아닌가?(23:15)

 

리새인들의 십일조생활 : 바리새인들이 심지어 박하와 회향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십일조를 면밀하게 드렸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리새인들의 기도생활 : 그들은 자신들의 경건을 대중 앞에 드러내기 좋아했다. 거룩한 자세를 취하고 웅변으로 기도했다. 그들은 기도의 골방이 없었다. 농부가 돼지에게 보인 관심은 바리새인들이 기도를 좋아한 정도와 같다. 우리의 위선적인 기도가 하나님을 노하시게 만들지만 아예 기도를 하지 않아서 노하시게 만들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의 성경읽기 : 바리새인들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5:39). 그들은 구약 성경의 장절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마음과 혼을 간과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데만 부지런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적인 동시에 외적이다. 진정한 의는 정신과 문자를 동시에 지킨다. 이런 종류의 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를 능가한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종이다.

 

4. 세상과의 전투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벌이는 삼중 전투에 관해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전선에서 세상, 육체, 마귀와 대치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움직이는 곳 어디서나 우리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 창조계 전체가 구속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약식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뱀이 득실거린다. 우리의 시조를 유혹한 뱀은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

 

 

세상의 유혹

 

세상은 유혹자다. 우리의 관심과 헌신을 이끌어내려 한다. 하늘을 향한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보이는 것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어내려 한다. 세상이 우리를 기쁘게 하기에 슬프게도 우리는 세상을 기쁘게 하기위해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12:2). 세상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순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형식, 또는 구조 편에 서는 것을 뜻한다. 인기 있는 것을 행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좋아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매일 벌여야 하는 투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세속주의다. 강조점이 이 세상과 이 시대에 있다. 순간과 현재의 낙을 위해 사는 것이 이 세상의 정신이다.

 

예수님은 거듭해서 제자들에게 현재 너머를 보라고 말씀하셨다. 영원을 향해 눈을 들게 만드셨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말씀하셨다. 영혼이라는 저울에 달아 사리를 판단하라고 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16:26).

 

이 세상에 순응하려면 영혼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세상의 정신은 오늘 놀고 내일 값을 치르라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유혹을 거절하려면 시대의 물결을 거스를 각오를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순응은 단순한 불순응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이다(5:11-12). 이유 없이 따로 노는 것은 좋은 행동이 아니다. 우리의 불순응은 선별적이어야 하고, 명분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불순응은 변화에 근거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12:2). 우리는 세상에 굴복해서도 안되고 도피해서도 안된다. 새롭고 다른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 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주의적 도피

 

모든 교사와 모든 교과과정에는 관점이 실려 있다. 가치체계도 담겨 있다. 그 관점은 하나님을 중심에 놓든 그렇지 않든 둘 중 하나다.

점점 더 많은 그리스도인의 부모들이 하나님에 관한 일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게 신성한 의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학교를 뚜렷하게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단지 성경과목을 개설하고 학과시간에 가도한다고 해서 학교가 기독교화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교과 과정의 관점이다. 하나님은 모든 학문에서 인정받으셔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능력 있는 증인이 되기 위하여 세상을 연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세속문화에 정통했다. 그는 아테네의 군신의 언덕에서 이교철학자들과 변론할 때 이교시인의 글을 인용했다(17:28).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세속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도 신플라톤 철학에 학문 배경에 힘입어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중세의 대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대의 세속 철학자들과 논쟁했다. 존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만큼 키케로를 자주 인용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펜을 들어 유럽의 무신론자들을 비판했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 세속철학을 정확히 이해했고, 기독교 진리로 그것을 비판했다. 기독교적 견지를 분명하게 유지하면서도 대로는 불신자들의 말을 타당하게 여겨 인용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주의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2:8) 그러나 무엇을 주의하려면 그것을 알아야 한다. 낮은 지적 수준으로는 기독교교육을 만족스럽게 시행할 수 없다.

하나님은 변화된 정신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정신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교훈을 평가할 수 있는 모눈종이다. 또한 변화하라는 말씀은 정신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정신은 하나님의 관점을 깊이 공부하는데서 생겨난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다. 하나님의 게시는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문화에도 자신을 계시하신다. 즉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세상은 우리가 성화하는 데 장애물이다. 그러나 바른 관점으로 대한다면 동맹자가 될 수 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의 것이다. 아버지는 세상을 구속할 만큼 크게 사랑하셔서 세상에 찾아오신다. 세상을 버리시지도 않고 포기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과 똑같은 자세로 세상을 대해야 한다. 목표는 변화에 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회심하면 우선 세상을 등지고 포기하는 시간을 지나게 된다고 했다. 그렇게 물러서는 기간이 있다고 했다. 마치 바울이 아라비아 3년 기간의 시간을 가졌듯이, 모세가 40년 동안 혼자 광야에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루터는 세상에 다시 들어가 그것을 끌어안기 전에는 영적인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지난날처럼 세속적인 태도가 아니라 세상을 구속의 무대로 여기며 끌어 앉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상에 순응하거나 세상 유혹에 굴복함으로써가 아니라 세상에 증거하고 세상을 변화시킴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의 성화를 바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별처럼 밝게 빛나기 바라신다. 그 일은 세상과 그 가치관을 올바로 이해할 때 가장 잘 할 수 있다.

 

 

5. 육신과의 전투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26:41).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겪는 깊은 갈등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은 육체와 영혼 간의 전쟁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육체란 무엇인가?

 

 

육신-몸인가, 타락인가?

 

육신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대개 사람의 육체적 본성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한편으로 육체는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실체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에는육체로 번역되는 두 개의 헬라어가 있다 .소마사륵스. ‘소마라는 단어는 단순히 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단어다. ‘사륵스는 단순히 몸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의 의미는 말씀이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이 성육신하셨다는 뜻이다. 바울은 동족에 관해 표현할 때 골육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동족 유대인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구체적으로 타락한 본성, "사륵스"를 사용한 경우가 있다. "사륵스"는 우리 몸에 한정하지 않는다. 죄는 우리의 존재 모든 면을 감염시킨다. 즉 전인이 타락한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2:18). 정신이나 육체 가릴 것 없이 타락했다.

 

 

육신의 생각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사고방식을 지닌 정신이다. 그것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원치 않는 타락한 인간의 정신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의 정신이다.

 

바울은 육체(사륵스)와 성령(프뉴마) 사이에 계속되는 전쟁에 관해 설명한다. 사람과 영혼과 육체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과 육체를 섬기는 삶과의 대조이다(5:16-21). 이것은 몸과 정신의 갈등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옛사람과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새사람간의 갈등이다.

 

본성이 타락한 육체는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을 거부한다. 육체의 일에 관한 목록을 살펴보면 음행과 술 취함은 육체적인 욕구와 신체적 기능을 가지고 저지르는 죄다. 투기와 시기는 우리의 몸과 관련해서 짓는 죄이지만 정신적 태도와 관련이 있다. 우상숭배도 우리의 몸을 사용할 수 있지만 우상숭배의 본질은 물질보다는 마음의 내면적 태도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성령과 육체간의 대조는 단순한 몸이 아니라 전인을 포함하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 즉 두 가지 생활방식 간의 갈등이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한 욕구의 지배를 받는 육체적인 삶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즉 의로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갈등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만약 우리가 외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의를 외적이고 만질 수 있는 행동으로 측정한 바리새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반면에 의를 내면적 태도로 생각하는 우리를 범할 수 있다. 정신만 옳다면 겉으로 어떻게 행동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으로 온갖 죄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외면이든 내면이든 우리의 삶 전체를 깨끗하게 하기 원하신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절제를 가르쳐 주기를 원하신다. 식욕 자체는 죄가 아니다. 우리 몸의 정상적인 기능이다. 그러나 식욕을 자제하지 못하면 폭식을 하게 된다.

성 충동도 그것 자체로는 악하지 않은 자연스런 욕구다. 우리는 배우자에 대한 성적권리 뿐 아니라 의무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결혼 밖에서는 성행위를 삼가야 한다.

 

루터는 정욕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말한 적이 있다. 정욕은 어떤 여성이 성적매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게 아니다. 정욕은 단순한 의식을 상상으로 몰입할 때 생긴다. 루터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새가 우리 머리에 둥지를 틀도록 놔두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

 

절제는 성행위의 규율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5:3).

하나님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의 성행위를 허용치 않으신다.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혼외정사를 금하듯이,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똑같이 정절을 요구하신다.

 

육체는 세상과 동지다. 세상은 사탄과 동지다. 원수는 우리를 성령에게서 끌어내 육체에 굴복시킴으로써 우리를 파멸시키려 한다.

반면 성령은 신자의 동지다. 육체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듯 보이는 이 세상에서 성령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6. 마귀

 

 

세상, 육체, 마귀, 이 세 원수 중에서 가장 가공할만한 원수는 마귀다.

마귀는 어둠의 주관자, 거짓의 아비, 형제들의 참소자, 간교한 뱀이라 불린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의 소소한 정욕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가공할 세력들과 맞서 싸우고 있다(6:13)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마귀와 맞서 싸우는 가운데 반드시 이해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실제로 마귀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가진 영적 존재라고 인정하면서도 마귀가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교만하고 강한 사탄

 

붉은 옷을 입고 쇠고랑을 친 마귀의 이미지는 중세 시대에 그 뿌리를 둔다. 중세교회는 사탄의 실재를 믿었다. 사탄이 지나친 교만으로 고통을 겪는 타락한 천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갈래 난 모자를 쓴 어릿광대로 묘사하여 사탄의 교만을 풍자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후세대들은 그 풍자를 마치 실물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성경에 나오는 사탄의 이미지는 광명의 천사로 표현하고 있다(고후 11:14). 광명의 천사는 사탄의 탁월한 능력을 가리킨다. 그는 간교한 존재이며 사람들을 속인다(3:1).

 

사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두 번째 이미지는 울부짖으며 삼킬 자를 찾는 사자다(벧전 5:8).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데 쓰이는 사자가 적그리스도의 원형인 사탄에게도 사용된다는 점을 눈여겨보라. 그 적인 사자는 게걸스러운 반면 유다의 사자는 구속하신다. 두 사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힘의 상징을 발견한다. 사탄의 힘은 그리스도의 힘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보다 뛰어난 것임은 틀림없다.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데 주로 사용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힘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힘을 과대평가하게 만든다.

 

일례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고, 사탄을 과소평가했다(22:33). 바로 직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의 임박한 배반을 경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손을 내저으면서 부인했다(22:33). 예수님은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고 말씀하셨다(22:31). 베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그는 사탄의 손아귀에 든 찰흙과 같이 되었다.

 

그럴지라도 사탄이 우리에게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4:7).

 

사탄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했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예수님은 경고와 함께 위로도 주셨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2).

사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장소 이상을 동시에 차지할 수 없다. 선하든 악하든 모든 천사가 시공의 제약을 받는 것처럼 그도 동일한 제약을 받는다.

 

 

 

귀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

 

할리우드는 밀교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엑소시스트오멘과 같은 유의 영화를 많이 내놓았다. 기독교 내에서도 귀신 추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대두되었다. 즉 특정 귀신이 특정 죄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들은 술 귀신, 우울증 귀신, 담배귀신 따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숨은 담배 귀신이 떠났음을 가리키고, 담배 귀신은 숨을 들이쉴 때 들어오므로 숨을 크게 내쉴 때 나간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구토는 술 귀신이 떠났다는 상징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파악 가능한 모든 것에 귀신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귀신 하나하나를 다 내좇아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일상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절차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자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 사탄과 귀신에 대하여 지나치게 큰 관심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초점을 덜 맞추고 있음을 뜻한다.

 

성경은 사탄이 우리를 억압하고 공격하고 유혹하고 비방하고 고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은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없다. 주의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

사탄과 귀신들을 이토록 지나치게 강조하는 추세는 또 하나의 중대한 위협인, 바로 우리 죄로부터 눈길을 돌리게 한다. “마귀가 내가 이 일을 하도록 만들었어요라고 말할 수 없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다거나 충동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사탄의 지배를 받았거나 협박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죄가 귀신들의 지배에 위한 결과라고 보는 견해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유혹에 굴복해도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귀신 추방 사역에 힘입지 않고는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겐 실제로 죄책이 없고, 귀신을 강력하게 추방하는 사역에 힘입지 않으면 절망상태에 놓인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성화의 개념을 부정한다.

 

 

유혹자와 아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유혹과 고소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악의 없게 들리는 질문으로 하와에게 접근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 여기서 뱀의 간계를 볼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에 한 가지 제약을 두셨다면 그것은 모든 지유를 앗아간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곧 하나님의 공평과 인자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아홉 가지는 허락하고 나머지 한 가지는 금지할 경우, 어린이들은 한결같이 부모님은 저에게 아무 일도 못하게 하세요!”라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사탄의 질문은 하나님의 정직을 간접적으로 공격하다가 이내 전면적으로 공격한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4-5).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너희는 죽지 않는다.

 

쟁점은 누구의 말이 사실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하셨다(8:44). 사탄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비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거짓말하신 이유까지도 하와에게 제시했다. 하나님의 금령은 불공정할 뿐 아니라 이기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다음 사탄은 하나님의 정직성을 총체적으로 공격한다. 하나님의 규율은 불공정한 것이라고,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하기를 바라시는 일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유혹자와 그리스도

 

아담이 받은 시험은 낙원 한 복판에서 이루어졌고, 곁에서 위로해 줄 사람이 있었고,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혼자였고, 주변 환경도 최악이었고, 전갈, 덤불이 많은 유대광야였다. 온정을 나눌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조금도 음식을 드시지 못한 채 시험을 받으셨다.

상황이 이렇게 판이한데도 아주 비슷한 점들이 있다. 우선 쟁점이 똑같았다. 바로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이다. 마귀가 예수님께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4:3). 강세는 만일이라는 단어에 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시기 직전에 예수님이 받으신 말씀이 무엇이었는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다(3:22).

사탄은 만일이란 단어를 교묘하게 사용하여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네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신하느냐?” “만일 네가 하나님께 그처럼 사랑받는 자라면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그토록 기뻐하시는 아들을 이렇게 대하신다는 말인가?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 몇 덩어리로 떡을 만드는 건 괜찮은 일 아닐까?

 

예수님은 곧 바로 대답하셨다. 물론 배고프셨지만 의에 대한 주림이 밥에 대한 주림보다 더 크셨다. 예수님의 음식과 음료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4:4). 예수님은 사탄의 간교한 말을 꿰뚫어보셨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만일이라는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 사셨다.

그러자 사탄은 전략을 바꾸었다. 이 세상의 모든 왕국을 다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내 것이 되리라.”(4:6-7).

 

권세와 영광은 매우 큰 유혹물이다. 사탄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가치를 갖고 있다는 공리로 무장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치는 발견할 수 없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3:7-9).

 

결국 예수님은 사탄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기록된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4:8). 이번에도 쟁점은 같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다. 예수님은 성경을 가지고 사탄을 물리치셨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탄이 성경을 인용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4:9-11).

 

사탄은 성경을 인용하였지만 사실은 죄를 정당화하기 근거로 자기의 주장을 관찰하기 위한 왜곡된 해석이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4:12). “굳이 성전 꼭대기서 뛰어내리지 않아도 나는 천사들이 보호해 준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나도 그 말씀을 확신한다.”

 

 

불신앙의 시험

 

아담과 예수님이 받은 두 시험에서의 쟁점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신뢰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 죄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제쳐둔 상태에서는 우리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을 장치가 없어진다. 우리 눈에 옳은 것에만 계속해서 초점을 두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을 할 수 없게 된다.

 

불신앙이 왜 죄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비방하는 죄다.

물론 맹목적인 신앙은 문제가 있다. 믿음과 맹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맹신은 미신과 비합리적인 편견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확하고 뚜렷한 증거와 함께 말씀하신 것을 우리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신다.

 

 

7. 참소자 사탄

 

사악한 고소자

 

사탄은 유혹뿐 아니라 고소하는 일에도 가공할 힘을 발휘한다. 사탄은 하나님 백성의 고소자로서 자신을 성령으로 가장하여 우리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때 평안을 느끼게 만들 수 있고, 평안해야 할 때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다. 스가랴 31-7절에서 사탄의 고소를 보여주는 사례를 기록한다.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사탄은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보고 고소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보다 우리 자신의 죄를 더욱 의식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의 고소를 책망하신다.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하나님은 사탄의 입을 막으신다. 사탄이 우리를 기소하면 그리스도께서 일어나 이의가 있습니다라고 단언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은 재판석에서 이의를 인정합니다.”라고 대답하신다.

 

주님의 천사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었다. 깨끗한 관을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받은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신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사탄에게 고소당하는 것과 성령께 죄에 대한 깨우침을 받는 것을 동시에 경험한다. 차이가 무엇일까? 사탄이 고소하는 목표는 우리를 해치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몰아내고 싶어한다. 반면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쳐주시는 목표는 우리를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깨달아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만들고 싶어 하신다.

 

유쾌한 깨달음

 

사탄의 고소는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가지만, 성령의 깨우치심에는 유쾌함이 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죄책을 깨우쳐 주실 때 사죄와 회복의 위로를 함께 주신다.

 

탕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성령께서 우리 죄를 깨우쳐 주실 때 우리를 회개와 회복으로 이끄신다. 처음 죄책에 눈을 뜰 때는 무척 고통스럽지만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흔쾌히 끌어안으시는 아버지께로 간다.

사탄의 태도는 맏이들의 태도에 반영되어 있다(15:25-28). 그는 아버지의 자비에 분노하고 질투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탄이 욥에 대한 태도가 이러했다. 용서하기보다 고소하는 게 사탄의 심성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간구하시는 자를 정죄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악한 짓이다고 역설했다(8:33-34). 사탄의 고소에 맞서 우리를 변호하는 게 복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흠 없는 삶을 보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유혹자 사탄의 소원과 달리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는 게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또한 죄를 범하더라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사탄은 신자에게 이렇게 많은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라고 속삭일 때 신자는 그럴지라도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기 원해라고 대답해야 한다.

 

 

8. 두려움과 죄책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을 때, “두려움 자체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발언으로 전 국민을 결집시켰습니다.

두려움은 여러 형태를 띤다. 신체적 손상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책임과 기대가 수반되는 성공에 대한 두려움이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다. ‘두려워서 몸이 얼어붙었다는 것은 마치 얼음이 강물의 정상적인 흐름을 가로막는 것을 가리킨다.

 

많은 운동선수들이 승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승리하면 새로운 신분으로 오르게 된다. 새로운 수준의 기대와 압박을 받게 된다. 또 실력으로 자기가 정말로 우승할 적격자가 아니었다는 생각에 이기고도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점에서 두려움과 죄책감은 암암리에 연결되어 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우리는 자신이 성취한 업적의 수준으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가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신념과 자신감을 잃게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수준 이상의 업적을 성취해도 마음이 불편하다. 새로운 책임 영역에 서게 된다.

우리는 변화에 대처할 수 있지만 너무 많은 변화에 대처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또 우리는 현상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도 모든 그리스도인은 변화를 요구받는다. 영적으로 전진하라고 명령받는다. 그러나 변화에는 두려움이 따라 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동하라고 말씀하셨다(12:1-4). 아브라함은 안락한 영역을 떠나야 했다. 고향, 민족, 가문을 떠나야 했다. 자신의 뿌리, 안전, 낯익은 땅을 떠나야 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큰 민족으로서의 거대한 부르심이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는 약속이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가 되었다. 하나님의 무르심에 순종하여 움직였다(11:8-13).

 

두려움과 죄책감의 연관성

 

두려움과 죄책감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두려움은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의 직접적인 산물인 경우가 많다. 궁극적인 두려움은 하나님의 손에 형별을 당하게 될 일을 생각할 때 생기는 두려움이다.

죄책감은 보편적이며, 그라스도인과 다른 종교 모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 짓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거나 느낀다.

 

신앙인이 아닌 어떤 정신과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나를 찾는 아주 많은 환자에게 의사가 아닌 목사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죄책감에 뿌리를 둔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진실한 인간은 자기 행동과 태도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죄책과 죄책감을 구분해야 한다. 죄책감은 주관적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생긴다. 때문에 실제로는 죄책이 없는데도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죄책은 객관적이다. 현상을 그대로 포함한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책이 일어난다.

 

웨스터민스터소요리 문답은 죄를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 부족하거나 또는 위반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작위의 죄와 부작위의 죄를 동시에 지적한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부작위의 죄다.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 작위의 죄다.

 

실제적인 죄책

 

작위든 부작위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길 때 죄책이 생긴다. 죄책은 실제적이고 객관적이다. 죄책감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 감정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자신을 변명한다. 합리화한다. 책임을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떠넘긴다.

 

사람은 살면서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법을 터득한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죄책감을 억누르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3:3).

 

상담자들이 사람들의 죄책감을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은 슬픈 일이다. 문제를 설명한다고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죄책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만 사라진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길 때에는 실제적인 죄책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현실적인 죄책감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책으로부터의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우리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다.

 

9. 참 용서

 

해결되지 않은 죄책이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 ‘천로역정의 주인공이 여행 내내 무겁게 짓눌렸던 끔찍한 짐을 기억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두려운 사망의 몸을 기억한다. ‘미션이란 영화에서 참회 중인 용병이 무거운 무기를 걸머지고 매우 고생스럽게 산을 오르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이러한 짐을 벗어버리면 홀가분한 것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된다.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말씀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6:7).

 

수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죄를 자백하고서 테 압솔보”, 내가 네 죄를 사하노라는 선언을 들으며 위로를 경험해 왔다.

 

 

고해와 프로테스탄티즘

 

종교개혁은 고해성사에 중심을 둔 부패 때문에 촉발되었다. 로마교회는 고해가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는 데 필요한 단계라고 본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영혼의 난파를 당한 사람들을 위한 제2의 칭의라고 부른다.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제1 칭의는 성세성사(세례)로 얻는다. 칭의의 은혜가 세례 인간의 영혼에 주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죄(죽을 죄)를 지은 사람은 제2의 칭의를 받아야 한다. 2의 칭의는 고해성사를 통해 온다. 고해성사는 자백, 통회, 사제의 선언, 보속 행위가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고해를 정서로 볼 뿐 아니라 행위로도 본다. 다시 말해 회개를 행동으로 본다.

 

중세에는 구제를 적법한 고해 방법으로 보았다. 진정한 회개정신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는 구제는 보속행위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16세기에 로마 교회가 성 베드로 성당 건설이라는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진실하고 경건한 동기로 그 사업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교황에게 면죄부를 내주는 행위를 합법화했다. 독일에서 로마교회의 파렴치한 대표 윌리엄 테젤이 농민을 상대로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다. 누구든지 돈만 내면 사죄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성직 남용에 대항하여 유명한 95개 조항을 걸었다. 면죄부 논쟁은 칭의 문제 전체에 대한 전면적인 논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보속행위에 초점을 맞춰 고해성사를 비판했다.

 

루터는 우리 죄에 대한 보속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남김없이 치르셨다고 주장했다. 그 누구도 그 보속에 다른 무엇을 보탤 수 없다고 했다. 칭의의 은혜는 진심으로 자기 죄를 자백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베풀어진다고 했다.

로마교회의 관점에서 사제는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20:23) 말씀하시면서 부여하신 권세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이 주일 아침 강단에서 죄 사함의 확신을 선언할 때 하는 행위와 그리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죄의 확신

 

슬프게도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죄 사함의 확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어떤 여성의 고백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나요? 하나님께 내 죄를 사해달라고 여러 번 기도를 드렸지만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아요.” ‘이번에는 하나님께 당신의 교만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게 좋겠군요.“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자백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이키면 우리 죄를 사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일 1:9).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사하신 자를 사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만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하시면 그 사람은 본인이 사죄를 느끼든 느끼지 않든 사함을 받은 것이다.

 

 

용서와 망각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때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 죄를 멀리 옮기신다고 말한다(103:10-12).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실 때 그것을 망각의 바다에 던져 넣으신다.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약속을 선언한다. ‘내가 그들이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31;34).

 

하나님이 우리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한 모든 지식을 버리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기록에서 지워버리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나를 대하실 때 마치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대하신다. 하나님은 내 죄를 더 이상 해가 되는 식으로 기억하지 않으신다. 내 죄를 용서하시는 순간부터 결코 내 죄를 가지고 나를 대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회복되었다(1:18).

 

 

다른 사람을 용서함

 

주기도에서 우리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요소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6:12)라는 구절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심각한 불행에 떨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열쇠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발견할 수 있다(17:3-5). 두 가지 쟁점을 밝힐 필요가 있다.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에 대해 오해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가 자기에게 죄를 짓든 무조건 일방적으로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어 누가 내 인격을 부당하게 모욕하면 그 굴욕을 참아내고 그 사람을 즉시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어디서 연유했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또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5:39).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누가 한쪽 얼굴을 때리면 다른 한쪽을 대주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마치 우리는 신체적으로 공격을 당하더라도 방어할 권리가 없다고 가르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누가 우리 딸을 납치할 경우 아들까지 납치해 가도록 내놓아야 한다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대인 관용어에서 오른편 뺨을 맞는 것은 오른쪽 손등으로 맞는 모욕을 가리킨다. 중세 때 그것은 결투 신청의 표시였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만약 누가 우리를 모욕할 때 똑같이 대응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된다. 언어폭력에 대해 평화스럽게 자제하고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셨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셨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셨다.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야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법은 부당하게 모욕당하는 상황에서 공의를 추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제시한다. 만약 누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용서할 수 있지만 상황 여하를 불문한 절대의무가 아니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용서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3). 여기서 죄를 짓는 사람은 형제다. 때문에 이 명령은 우리에게 죄를 짓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형제는 구체적으로 동료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따라서 동료 그리스도인이 우리에게 죄를 짓는 경우에 대해서는 먼저 형제에게 경고해야 한다. 즉 모든 죄에 침묵을 지키라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질책을 하거나 훈계를 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형제가 회개하지 않으면 일방적으로 용서할 의무가 없는 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전에 먼저 회개를 요구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은 요구를 할 수 있다.

 

물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지만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회개한다면 용서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형제가 회개하면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용서받아야 할 죄다. 형제가 우리에게 회개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때 더 이상 우리 죄를 가지고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상할 책임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만약 고용주에게서 돈을 훔쳤다가 도둑질한 것을 회개한다면 죄를 자백하고 사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돈을 돌려주고 고용주가 요구하는 벌금을 지불해야 한다. 삭개오는 이와 같은 배상의 원칙을 잘 알고 있었다(19:8).

우리는 세상의 죄책과 천상의 죄책을 구분해야 한다. 만일 지상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현세의 죄책에 대한 벌은 받아야 한다.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의 뉘우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만, 사회는 공의를 엄격히 집행하도록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

 

 

반복되는 죄

 

결혼서약을 파기한 것에 대해서는 용서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어떤 사람이 간음을 범한 뒤 그 죄가 드러났다고 가정해보자. 남편이 자기 죄를 자백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며 아내에게 용서해 달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의 도덕적 의무는 무엇일까?

 

간단한 대답은 예수님은 죄를 짓고 나서 찾아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해 주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아내는 참회하는 남편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복잡한 대답은 어떤 방법으로 용서해야 하는가?

 

아내는 남편을 용서한 뒤 이혼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푸는 데 기본적으로 세 가지 해결책이 있다.

 

해결책 1 : 남편이 회개하지 않더라도 이혼할 수 없다.

 

해결책 2 : 남편이 회개하지 않으면 아내는 정당하게 이혼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이 회개하면 아내는 그를 용서하고 계속 같이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

 

해결책 3 : 남편이 회개하면 아내는 남편을 용서하고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계속 부부로 남아야 할 의무는 없다. 결혼권 포기를 남편의 범죄에 대한 사회적 형벌의 일환으로 본다.

 

이런 쟁점들을 해결하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용서한다고 해서 반드시 형벌도 배상도 가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개인관계를 경색시키지 않은 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더불어 개인관계에 죄가 다

시 끼어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만일 형제가 하루에 일곱 번 죄를 범하고 일곱 번 회개할 경우 용서하라고 하셨다. 만일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고 회개하여 용서했는데 그 다음에도 같은 죄를 범한다면 이번이 두 번째요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예전에 지은 죄에 대해 형제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죄 때문에 형제를 적대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복해서 죄는 짓는 경우에 자비를 베풀기가 대단히 힘들다. ‘한번 속으면 상대가 밉고, 두 번 속으면 나 자신이 믿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같은 죄를 두 번 용서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일곱 번 용서하려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야 한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17:5)라고 말한 것이다.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

 

그리스도인은 회심하기 전에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물론 용서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회심하기 전에 지은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가? 결혼과 이혼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아내와 이혼했다고 가정하자. 5년 뒤 그 사람이 회심한다. 그리고 어느 그리스도인 여성을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한다. 이런 경우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혼한 아내와 화해하라고 요구해야 할까? 아니면 자유롭게 새로 결혼하도록 허락해야 할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배상해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책임을 지고 지난 날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죄를 바로 잡을 때 기뻐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책임질 줄 알고 용서를 베푸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10. 육체와 성령 사이의 싸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고 탄식하고 있다(7:14-19).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절규하고 있다(7:24). 여기서 사망의 몸이란 시체에 사슬로 묶여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옛 본성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비참한 옛 본성에 끌려 다닌다.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다. 우리의 옛 본성은 모가지가 잘린 닭과 같다. 한 마디로 옛사람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자극한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매일 새롭고 생명력 넘치는 사죄를 체험하길 바라며,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까지는 삶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성령으로 거듭났을 때 옛사람과 새 사람간의 치열한 투쟁이 시작된다. 옛 생활은 일관되게 불순종하던 삶이었다(2:1-3). 그러나 새 생활은 사탄에게만 조종되던 과거처럼 일관되게 진행되지 않는다. 육체와 성령 사이의 싸움이 계속된다.

 

 

반율법주의적 견해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바로 육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이다. 육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의 보좌에 모시지 않고 항상 불순종하며 사는 신자다. 반면 삶의 특징이 순종과 영적 헌신으로 요약되는 성령 충만한그리스도인이 있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삶의 보좌에 앉아 디스리신다.

 

이러한 구분은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반율법주의와 완전주의의 오류의 위험이 있다. 반율법주의란 율법을 반대하는 주의다.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상태인가. 원하는 죄를 다 지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용서받는다.” 이러한 견해는 은혜와 사죄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근거한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되 주로는 영접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 안에 담겨있다. 순종 없는 믿음과 선행없는 믿음으로 흐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의 죽은 믿음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항상 육욕의 지배를 받는 생활을 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부를 수 없다. 육적인 비그리스도인라고 해야 옳다. 그는 자기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갖고 있지 않다. 성령으로 거듭나고도 삶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믿음은 신자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되며 그 변화는 순종하는 삶으로 입증될 것이다.

구원을 얻으려면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지만 단순히 믿음을 고백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고백하는 바를 소유해야 한다. 우리를 의롭다고 하는 것은 단지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다.

 

 

완전주의적 견해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하는 두 번째 오류는 완전주의다. 완전주의는 이생에서 도덕적 완성을 성취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완전주의에는 일종의 엘리트주의가 있다. 완전을 성취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보다 위대하다는 생각이다.

 

자기가 무죄를 성취했다고 확신하게 되면 자신의 도덕행위를 터무니없이 과대평가하거나 하나님의 율법을 심하게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율법과 자신의 순종에 대해 스스로 속이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들이다.

 

성화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참된 표식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완전에 도달하기에 얼마나 부족한가를 갈수록 절감하는 것이다. 완전주의자들은 자신이 완전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기만한다. 자신들은 두 번째 복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고의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든 죄에는 의지가 발휘된다. 실로 의지의 부패한 경향이 죄의 본질이다.

 

웨슬리언 교파에는 다른 부류의 수정된 완전주의가 있다. 그들은 완전한 성취를 완전한 사랑으로 제한한다. 사람은 도덕적인 연약성 때문에 계속해서 투쟁할 수 있으나 적어도 완전한 사랑의 복은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절대적으로 완전한 사랑의 복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성경적 견해

 

로마서 714절에서 바울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고 탄식한다. 바울이 자신이 육신에 속했다고 말할 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벌어지는 옛사람과 새사람간의 지속적인 투쟁, 즉 육체와 성령 사이에 진행되는 싸움을 말하고 있다(7;22-25).

 

대학생 선교회가 발행한 유명한 성령 소책자에서는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을 구분한다. 이 책에서 빌브라이트 박사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을 엄격히 구분하기보다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직면하는 육체와 성령 간의 투쟁을 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옛사람 간의 악한 성향들을 제재하기 위해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살게 하려는 것이다.

 

체의 옛 본성과 싸우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육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육체의 삶을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없다. 만일 육적인 면이 철저히 지배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성령 충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세력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한 상태에서 즐거워할 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사망의 몸을 혐오할 때 기뻐하신다.

 

11. 교만

 

칼 바르트는 타락한 사람이 다른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세 가지 기본적인 죄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 세 가지 죄는 바로 교만, 낙태, 부정직이다.

 

교만에 대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은 잠언 1618-19절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거나 아름다워 보이기 바라는 것은 악하지 않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인간의 존엄에 관한 관심사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싶어하거나 뛰어나려고 노력하려는 것은 덕이지 악이 아니다. 자기가 해놓은 일을 보고 마음이 뿌듯한 것은 일이 잘된 것에 대해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만은 건방진 태도를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죄는 교만이었다. 뱀의 유혹은 하나님처럼 될 걸라는 말과 함께 왔다(3:5). 뛰어난다는 것과 하나님과 동등해진다는 것은 전혀 별개다. 우리는 모든 사람 위에 올라서려는 유혹에 매우 취약하다. 우리 의견을 말할 때도 변호할 필요 없이 주장하고 싶어 한다. 하나님 같이 되려는 유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 우리는 법에 예속되는 것을 싫어한다.

 

자율추구

 

자유는 실로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에는 제약이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규제를 받으며 책임을 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책임을 진다.

우리가 법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권세들에게 복종한다는 표시이다. 뮬론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권력에 불복종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려면 정당하고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동등해지려고 하는 것은 곧 법위에 올라서려고 하는 것이며 자율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자율이란 자기 법이란 뜻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성경에는 책임 한계가 규정되어 있는 권위체계가 있다. 자녀는 부모에게, 피고용인은 고용인에게, 양은 목자에게, 학생은 스승에게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일정한 형태의 인간관계에 던져져 있으며, 그 안에서 자율권을 행사하거나 복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어떤 귄위 밑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그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게 중요하다.

 

지위추구

 

자신의 지위 이하의 대접을 받을 때처럼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도 없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일정 수준의 존경을 얻기 위해 일한다. 지위를 추구하는 것은 삶의 중요한 부분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적인 현상이다. 좋은 시계나 명품을 사고 싶어 하는 것도 지위의 문제이다.

 

빌립보서 2장은 케노시스’(자기를 비움)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아무 일에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2:3-4).

성경은 우리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평소 우리는 남이 나를 자기보다 낫게 여겨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하나님처럼 되라는 최초의 유혹의 일부였다.

 

 

참된 겸손

 

빌립보서 25-9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심으로써 자기를 비우셨다. 신성을 비우시거나 신적속성 가운데 어느 하나를 비우신 것이 아닌, 자신의 지위를 버리셨다. 자기 지위 이하에 해당하는 대접을 받기로 작정하셨다.

 

사울 왕의 출발은 매우 훌륭했으나 곧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득의양양해졌다. 스스로 제사장의 권한을 취하여 사무엘의 역할을 대신했고(삼상 13:9), 갈수록 이기적이고 교만해졌다. 그러다가 백성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는 노래를 듣는 순간 그의 질투는 극에 달했다. 이후 사울의 비극적인 치욕의 역사가 뒤따른다.

 

반면 다윗은 그런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고 노래를 지어 유다 어린이들이 배우게 했다(삼하 1:19-20). 지위의 매력은 대단히 크다. 특히 장성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 두려운 장애로 나타난다. 우리 모두가 그것에 취약하다. 모두가 사람들의 존경을 갈망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님을 본받으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겸손을 드높인다. 순종, 겸손, 자존심과 교만을 끊임없이 거둬들이는 것, 이것은 지위와 명성을 가치 있게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인다.

 

 

12. 겸손

 

 

타락한 인간에게 내린 저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노동 자체가 저주의 일부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부터 인간은 창조주로부터 할 일을 부여받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21:5).

 

타락 이전에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일하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모든 게 변했다. 동산을 관리하는 것이 매우 힘든 노동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 받은 저주다(3:17-19).

가시, 엉겅퀴, , 죽음 등은 저주의 요소들이다. 이것이 피와 땀과 눈물이라는 인간 고통의 3대 요소의 기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자체가 저주는 아니다.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에도 노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일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호모 파베르

 

흔히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 생각하는 인간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칼 마르크스는 인간을 호모 파베르’, 노동하는 인간으로 정의한다. 즉 마르크스는 노동은 저주가 아니다. 노동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만족과 보람을 주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처음 만날 때 대략 세 가지 질문을 한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어디 사십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즉 이름, 주소, 직업 이 세 가지가 우리 문화에서 사람을 정의하는 요인들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또 그 일을 어떻게 하는가도 중요하다. 우리는 작업 수행 능력에 따라 평가를 받는다. 살려면 일해야 하고, 단순히 일하는 것을 넘어 일을 합리적으로 잘 해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에는 생계유지 이상의 높은 목적이 있어야 한다. 생산적이고 열매 맺는 사람이 되려면 헌신하는 자세로 일해야 한다.

 

직업(vocation)이란 단어는 부르다라는 뜻의 라틴어, 보카레(vocare)에서 유래했다. 즉 우리의 직업은 부르심이고, 하나님께서 내리신 소명이다. 따라서 일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 중 하나를 거부하는 것이다.

 

게으름과 가난

 

게으른 사람은 자기만 해칠 뿐 아니라 사회에 짐이 된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교회의 책임에 대해 가르친다.

성경은 가난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재난 때문에 당하는 가난, 압제 때문에 당하는 가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가난, 게으름 때문에 당하는 가난.

 

앞의 세 부류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드는 사람들은 네 번째 부류다(6:6-11).

 

지혜문학에는 게으름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온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18:9).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19:24). 게으른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잡아 새느니라(10:18).

신약성경에도 게으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이 나온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이익을 남기지 않은 종에게 모질게 말한다(26:26).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 말라고 혹독한 책망을 한다(살후 3:10-11).

 

 

일 중독자

 

일중독자란 바쁜 일정 때문에 쉬지도 않고 여가와 문화 활동에 조금도 시간을 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정신과 의사들이 사용하는 전문 용어로서 일중독자는 현실적인 일을 하지 않고 뒷공론만 일삼는 비생산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신경성 일중독자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좋아한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종종 불화를 일으킨다. 동료의 실수를 비판하기 좋아한다. 책임을 남에게 떠넘긴다. 자신의 잘못을 효과적으로 가린다. 언제나 바빠 보이지만 별로 이루어내는 일은 없다. 하나님은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것을 은폐하는 비생산적인 노동자들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신다.

 

 

노동자의 단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일을 해야 하되 게을러서는 안된다는 것은 윤리 문제이다. 어디서 일해야 하는가는 지혜의 문제이다.

설령 직업이 자기와 잘 맞지 않는다고 느끼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 일을 잘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능력과 필요에 잘 맞는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성경은 노동자가 달게 잠을 잔다고 말한다(5:12). 생산적인 일은 힘도 들지만 상당한 보람도 준다. 반면 일을 다하지 못한 채 미루어두는 만큼 근심도 크다.

일은 우리의 의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이다. 누구나 해야 할 일을 갖고 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예수님께 받게 되기를 소원한다. 그렇게 하려면 지금 부지런해야 하고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충성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13. 부정직

 

시편 11611절은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렇게 단언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3:4).

 

부정직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다. 우리는 말과 행동과 관계에 있어서 진실하지 못하다. 서로에게, 하나님께, 그리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최초로 기록된 거짓말은 뱀이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한 말이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고 거짓말을 했다. 거짓말은 사탄의 본성이다(8:44).

하나님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신 반면 사탄은 거짓의 아비다.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간의 전쟁은 진리와 거짓 간의 전쟁이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6:16-17).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12:22).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19:22).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21:8).

 

타인에게 하는 거짓말

 

거짓말은 주로 다른 사람에게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진실이 우리의 체면을 손상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형벌이 두려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죄책을 덮기 위해서도 거짓말을 한다. 게으름을 은폐하기 위해서도 거짓말을 한다.

대개 거짓말은 속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은 준비가 부족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속인다. 그것은 우리의 부정직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것이므로 도둑질과 다름이 없다. 속임수는 진리를 훼손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세일즈맨들은 사업상 거래에서 구매자에게 진실을 말해주어야 한다. 구매자 위험부담이라는 정책 뒤에 숨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내 차에 보이지 않는 기계적 결함이 있다면 그 차를 팔기 전에 살 사람에게 자세히 알려주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최근에야 비로소 임대 및 광고에 진실을 밝힐 것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마련되었다. 임대인들은 처벌규정 때문에 더 이상 은닉 비용을 감출 수 없다. 광고주들은 이제 상품을 과대광고하면 처벌을 받게 된다. 임대나 광고나 판매에서 하는 거짓말은 엄연히 도적질이다.

 

 

타인에 관한 거짓말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 관해 거짓말하는 것은 별개다. 다른 사람에 관해 거짓말하는 것은 명예훼손이다.

마귀는 중상모략의 대가다. 자기 제자들을 부추겨 뒷공론, 험담, 비방을 하게 한다. 남의 명에를 훼손하는 것은 그의 재산을 훔치는 것보다 더 해로울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 대한 비방과 거짓말을 매우 중대한 문제로 보시고 십계명에 그것에 대한 금령을 포함시켰다. “네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20:16).

이스라엘에서는 법정에서 사실을 말하되 모든 사실을 빠짐없이 말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책임으로 여겼다. 즉 법정에서 위증을 할 경우 사형으로 다스렸다.

 

남을 중상한다는 것은 그에 관해 거짓말을, 그를 해롭게 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중상에는 부당한 고소도 포함된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중상의 희생자셨다. 심지어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비방을 당하셨다.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 함께 처형을 당하던 두 강도 사이에서도 변론거리가 되었다(23:39).

십자가-모든 구속의 구심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의 중대한 시점이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이 세상에서 행해진 가장 사악한 불의였다.

 

남을 중상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는 명예, 즉 선한 평판이 중요하다.

 

 

선의의 거짓말

 

야곱은 탈취자였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도둑질하여 명예를 잃었다. 그는 속임수로 도둑질했다.

리브가는 거짓말의 어미였다(27:8-10). 리브가는 단지 하나님의 뜻을 이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도록 정해주셨고, 야곱의 약속의 자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데 인간의 죄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요셉 형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들은 악한 의도로 그, 일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선하게 사용하셨다. 따라서 리브가는 자기 죄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다.

반면 기생 라합의 거짓말은 어떠했는가? 라합은 그 거짓말 때문에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신앙의 용사 목록에 들었다(11:31).

 

과연 라합은 거짓말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거짓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복을 받았을까?

라합이 거짓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복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 항상 나쁘다는 주장을 취한다.

다른 한편으로 진실을 말할 때에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즉 모든 사람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중한 물건을 감춰놓은 곳을 강도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군인은 적군에게 사로잡혀도 아군의 위치를 말할 필요가 없다. 진실은 그것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진실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

 

우리가 지닌 가장 어려운 과제는 자기 자신에 관한 진실을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죄를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개입되어야 자신의 실재를 파악하게 된다.

 

욥과 하박국도 하나님이 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춰내실 때 거의 혼절했다.

우리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자신의 행위를 최대한 미화한다. 남을 쉽게 비판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변명한다.

나단이 죄를 은폐하고 있던 다윗 앞에 거울을 갖다 대자 비로소 그 죄를 볼 수 있었다. 그 죄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전달될 때는 뚜렷이 그것을 알아봤다. 그러나 나단이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기 전까지는 그 죄가 자기 죄인지를 알지 못했다(삼하 12:5-7).

 

 

하나님께 하는 거짓말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범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이다(5:1-4).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소유를 다 팔아 내놓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죄는 거짓말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거짓말하는 타락한 성향을 벗어버려야 한다. 거짓말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 성실하게 살고, 정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행하고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14. 교리와 삶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삶이다. 이것이 기독교에 자주 표출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잘못된 딜레마다. 바른 사고와 바른 삶은 병행한다.

 

 

지도자들의 반란

 

성경적 가독교에 반기를 든 많은 회의주의가 교회 안에서 나왔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언한 자들도 신학자들이었다. 성경의 신빙성을 공격하는 것 역시 신학교이다.

이런 유의 회의주의에 고통과 충격을 받은 다음 취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행동은 신앙의 비이성적 도피처로 물러가는 것이다.

 

 

교리의 필요성

 

교회는 어느 시대나 건실한 신학자들의 사역에서 큰 유익을 얻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력, 토마스 아퀴나스의 설득력, 칼빈의 명철함, 루터의 열정 등은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

여전히 일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신학에 대한 우려가 팽배하게 깔려 있다는 딜레마를 해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실한 교리가 필요하다. 성결의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도 하다. 진리와 의는 함께 간다. 바른 삶은 바른 사고에서 나온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변화된 정신이 변화된 삶을 내놓는다. 하나님이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하나님에 대한 반응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준다. 회개도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생긴 마음의 변화다.

 

그러므로 교리와 삶을 구분하는 그릇된 이분법을 배척해야 한다.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고는 견실한 교리를 지닐 수 없다. 견실한 교리 없이 거룩한 생활을 해나가는 것도 극히 어렵다.

 

의식, 신념, 양심

 

왜 견실한 교리가 성화에 필요할까? 그리스도인의 삶에 진정한 성화가 발생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절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바로 의식의 변화와 신념의 변화, 그리고 양심의 변화다.

 

의식은 지식을 포함한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계획적으로 행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율법에서 죄에 대한 지식과 의에 대한 지식이 나온다.

 

뜻을 정하고 행동하지 않았는데도 우연히 율법에 순종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런 행동에는 도덕적 가치가 없다.

만약 그가 운전자로서 도덕성을 가지고 항상 제한 속도 내에서 운전을 하고 싶다면 정신을 차리고 법규를 의식해야 한다.

의식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제한 속도를 잘 알면서도 어기는 사람이 많다. 우리 행동이 변화되려면 의식하는 단계를 넘어 신념을 가져야 한다.

 

신념은 깊이와 강도의 문제다. 어떤 행동이 옳다고 의식하는 것과 그것을 확신하는 것은 별개다. 확신은 정착된 지식이다. 때문에 우리를 그것을 단단히 붙든다. 두뇌를 넘어 양심가지 파고든다.

 

양심은 행위에 대해 감독관 역할을 한다. 내면의 음성이 우리를 고소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한다. 문제는 양심이 언제나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을 승인하는 쪽으로 양심을 길들이는데 능숙하다.

 

죄의식에 사로잡히면 행동을 바꾸거나 의식을 바꿀 수 있다.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들 수 있다.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다보면 양심의 소리를 죽일 수 있다. 자기도 계속해서 죄를 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함께 타락을 권하기도 한다(1:32).

양심이 경건하게 작용하려면 경건한 신념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경건한 양심을 가지려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의식이 예리해져야 한다. 이것은 정신이 포함되는 일이다. 또한 교리의 문제다.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며, 말씀은 우리의 의식에 도달한다. 우리의 이해를 위한 것이다.

말씀은 성령의 책이다. 성령께서 성경을 영감하신다. 성령은 진리의 계시자다(고전 2:10-11).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서치라이트를 비추사,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다. 성령님은 깨달으려고 하는 우리를 지원해 주신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교훈하고 확신케 하시려고 보내심을 받았다(16:7-8)..

 

변화된 의식에서 변화된 신념으로, 그리고 변화된 양심으로 전진하는 일을 성령께서 인도해 주신다. 성령은 말씀으로 일하신다. 말씀과 성령은 동행한다. 교리와 삶도 동행한다. 의지와 정신도 동행한다.

 

 

15. 포기하지 말라

 

처칠이 연단에 오르자 학생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처칠은 연단 끝을 붙잡고 불도그처럼 사나운 얼굴을 쭉 내밀고 결코, 결코, 결코....포기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뒤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 한 마디가 온 청중을 전율시켰다. 그 젊은이들이 위기순간을 맞이할 때, 싸울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두려운 생각에 그 말이 얼마나 떠올렸을까 생각된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이것은 성경이 거듭거듭 외치는 메시지다. 예수님은 시작하신 일을 끝내신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

”(9:62)고 하셨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앞을 바라보셨고, 마침내 세상의 구속을 성취하셨다.

바울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아직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수동적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성화 교리에 대해서 큰 오해가 있다. 경건주의의 유명한 구호는 손을 놓고 하나님이 하시도록!”이다. 우리의 영적 진보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킬 의도라면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인내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자.”라고 해야 한다.

 

성화에는 행위가 필요하다. 성화는 협력적이다. 즉 두 동반자가 이루어가는 일이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다(2:12-13).

하나님은 우리에게 뒷짐 지고 앉아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다 맡기라고 하시지 않는다. 어떤 일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룬다는 것은 경건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며, 마지막 결과에 갚은 관심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산다면 우리 노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구원은 거듭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령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고유한 일을 하실 때 나는 잠잠히 수동적인 자세로 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일이 시작된다. 내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고, 표적을 향해 좇아야 한다. 성령이 항상 우리를 도우시지만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는 사람들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구절을 새신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추구할 때 나타내는 열정을 가리킨 말씀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성령께 일깨움을 받은 사람들이 천국을 향해 가는 열정을 묘사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쟁, 심지어 죽을 수 있는 전쟁으로 묘사한다(2:1-4).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죄들을 이겨내려 할 때 우리는 쉽게 좌절하고 쉽게 패배한다. 피 흘리기까지 싸우기 전에 쉽게 굴복한다.

우리는 과거의 실패를 잊어야 한다. 패배감에 사로잡히면 안된다. 푯대를 향하여 좇아야 한다. 절대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우리의 푯대는 하찮은 게 아니다. 쟁취할 만한 가치가 있다. 두려워하고 떨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부르심이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사생아가 아님을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아들이다. 우리 아버지께서 징계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의 손은 우리를 쉽게 엄몰한다. 그 연단은 가혹해 보인다. 우리는 손을 떨구고 무릎이 약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멸하시려 게 아니라 고치시려는데 목적이 있다.

 

징계는 한동안 고통스럽다. 그러나 아버지가 징계하시는 목적은 연단이다. 연단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열매, 즉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의 산은 시내 산이 아니라 영원한 시온 산이다. 우리는 하늘에 들어간다. 허다한 천사들과 합류한다. 모든 성도와 사귐을 갖는다. 과거에 드려졌던 어떤 제물의 피보다 더 중요한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위에 뿌려졌다.

 

우리가 인내하는 것은 이 영원한 본향에 가기 위해서다. 그런 목적지를 두고 누가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겠는가?

우리가 사는 것은 이 소멸하는 불을 위해서다 우리가 기쁘시게 하려는 분이 바로 그분이다. 우리가 거듭 실패한 뒤에도 다시 일어서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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