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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야 신드롬(왕상 19:9-10),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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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과 100만 마리의 불가사리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아침 사나운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해변으로 아침 산책을 나갔습니다. 수만 마리의 불가사리가 바람과 파도에 쏠려 나와 해변에 널려있는 광경을 보고 기겁을 했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물에서 떨어져 나온 그 불가사리들이 해변에서 꼼짝 못하고 죽을거라 생각하니 슬퍼졌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일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 나는 모래 위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습니다.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렸습니다. 멀리서 한 사람이 몸을 굽혔다 펴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에 한 마리씩 불가시리를 집어 들고는 바다에 던져 넣고 있었습니다. 뭐하시는 겁니까? 내가 불가사리를 구해 주고 있지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보세요. 여기 불가사리는 수만 마리가 넘는다구요. 뭘 하셔도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그는 내 말에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허리를 굽히더니 불가사리를 또 한 마리 집어 들어서 물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불가사리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지요!

 

분명한 것은 내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까지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이 필요하고 우리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로 인해 두려워하고, 거부감을 느끼고 수치심에 사로잡힙니다.

 

엘리야는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상황이 최악에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사역을 해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앞으로 36개월 동인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가축과 사람들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바알을 계속 섬길 것인지 아니면 버릴 것인지 이제는 결정하라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엘리야는 이런 상황 속에서 갈멜산의 영적인 승리를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세벨이 내일 이맘때에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고 두려움과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열왕기상 133-4절에 보면 엘리야는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렀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통치권 영역 밖으로 나갔습니다. 브엘세바는 남 유다 왕국의 최남단인 브엘세바까지 도망쳐 버렸습니다.

 

엘리야는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엘리야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자체가 그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3절 하반절에 보면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한 순간에 현상금 붙은 사나이로 도망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인해 로뎀 나무 아래에서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4절 하반절에 보면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우리는 사역의 현장이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자신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을 느낄 때 쉽게 무너집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두려워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변화되지 않는 현실적 상황으로 인해 지쳤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깊은 고독감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그동안 어렵고 힘든 위기를 잘 극복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면 되는데 하나님께 나아갈 힘조차 없었습니다. 현실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목회 현장도 이러한 엘리야 신드롬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동안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인내하며 잘 버텨왔는데 그 어떤 사람의 오해와 조롱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위협 앞에서 그만 쉽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성도들이 내뱉은 한 두 마디의 부정적인 말로 인해 쉽게 좌절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계획했던 일에 조금만 차질이 생겨도 당황하며 포기하려고 합니다. 목회자에게도 갈멜산의 승리를 수포로 만드는 이세벨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포기하게 만들고 기도를 막는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엘리야는 사환을 거기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하룻길 더 걸어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약 136킬로미터의 길을 걸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분란과 시비가 그치지 않는 목회의 현장 속에서 우리 또한 기막힌 탄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목회의 현장에서 여러 번 꺾이고 나서 회복이 안될 만큼 탈진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는 갈멜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저녁이 되면 브엘세바 사막의 내리막길로 치닫을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갈멜산의 대결이 갖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엘리야가 기대하는 성공적인 목적 달성에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로부터 참된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자세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낙심과 침체에 빠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로 마음을 향하여 자기의 마음을 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심과 충성을 다했던 목회자들도 생각지 않을 일로 인해 꺾일 때 용기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낙심하여 지치고 포기할 때에도 찾아오셔서 만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낙심하여 지치고 포기할 때에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어루만져주십니다. 그리고 일어나 먹으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습니다. 웬지 몸이 가라않고 계속해서 잠이 몰려옵니다. 영적인 회복은 시간이 때때로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고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셨다면 그는 틀림없이 광야에서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또 다시 오셔서 어루만지셨고, 또 다시 먹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만져주심 때문에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에게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넘어져도 일어나는 오뚝이 근성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영적인 삶은 물론 육체적인 삶에 있어서도 회복이 필요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엘리야는 실패하였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엘리야가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장 괴로울 때 내게 가장 필요한 도움을 주십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일을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그에 대한 사역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엘리야는 다시 육체적으로 회복하고 사십 주 사십야를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당도합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서 호렙산까지의 거리를 약 302킬로미터입니다. 그러면 보통 7, 8일이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데 왜 40일간 걸렸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몸을 추스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호렙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호렙산 굴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엘리야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려고 하시지만 우리는 계속 문제에 사로잡혀서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또 다른 사명을 맡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자신의 동굴 속에서 좀처럼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토로합니다. 내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 열심히 유별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내 생명까지도 찾아 빼앗으려고 합니다. 엘리야는 호렙 산에 도착했지만 캄캄한 굴속에 자신을 밀어넣었습니다.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상황에 붙잡혀 있습니다. 다 이해하지만 생각만 하면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이 올라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굴에서 나가서 여호와의 산에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는 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어두운 굴에서 머무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실패와 좌절의 굴속에서 나와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있었지만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었지만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불 가운데 세미한 소리가 들립니다.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아직도 굴 어귀에 서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모든 능력 즉 큰 폭풍과 지진이 불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계속 굴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또 다시 안타까워하십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내가 하나님께 열심히 유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고 합니다. 엘리야는 영적인 실패와 거부당하는 아픔과 수치심에 계속 붙잡혀 있습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심적 상태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지 놀랍습니다.

 

아마 그만큼 이러한 상실감으로 계속 힘들고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기연민과 원망의 자세로 대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인자하게 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두움의 굴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목회의 현장에서 열심을 다했지만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제도 실패했던 것처럼 오늘도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모든 수고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푸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십니다. 더 이상 일꾼이 없고 성도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진행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다시 한 번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때 엘리야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19절에 보면 엘리야가 거기서 떠납니다. 마침내 호렙 산의 굴 속을 벗어나 다시 한 번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처음보다 중요한 세 가지 사명을 맡기십니다. 첫째는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사엘은 이스라엘을 징벌하는 막대기로 쓰임받게 됩니다. 둘째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후는 아합 왕가를 진멸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17).

 

우리가 처한 사명이 어렵고 힘들어 낙심이 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사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 사명은 내가 이루는 것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루어가십니다. 좋은 것만 사명이 아니라 심판도 사명입니다. 잘되는 것만 사명이 아니라 고난도 사명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이 사명입니다.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굴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에게 무릎을 끓지 아니하고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가 칠천 명을 남겨주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비록 주위 상황을 살펴볼 때 나만 남은 것 같고, 나 자신도 더 이상 아무런 힘이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남겨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자기 시대에 열매를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실패는 아닙니다. 영적인 실패는 결코 마지막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은혜가 있습니다.

 

아직 좋은 것은 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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