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문제가 계속 터지고 너무 힘든 일이 겹쳐질 때 우리의 인생에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때에도 우리를 연단하기 위한 과정들이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외삼촌 라반의 딸 들 중에서 결혼을 하면 좋겠다는 부모님의 강력한 요구 때문입니다.
창세기 27장 46절에서 리브가는 이삭에게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과 결혼하면 내 삶에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고 호소합니다. 그러자 이삭은 야곱을 불러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보내게 됩니다. 창세기 28장 1-2절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이삭과 리브가가 야곱에게 믿음의 신부감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부탁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기 원하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 28장 3-4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나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러한 축복은 나중에 살펴 보겠지만 야곱이 돌베게 잠을 잘 때에 하나님께서 꿈에 그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창세기 28장 13-15절에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지키러 허락한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때가 언제인가 하면,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고 에서의 축복권을 빼앗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속였을 때입니다.
1. 도저히 함께 하시지 않을 것 같은 순간에도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든 집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야곱의 심정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무서움, 삼촌 라반의 집에서 자신을 받아줄까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온갖 생각이 그를 복잡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어머니 리브가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 뿐인데. 야곱이 이렇게 된 배경에는 부모의 편애가 낳은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너무 좋아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좋아했습니다. 부부가 어떤 자녀를 더 좋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편애로 인하여 대립관계를 만들어 가지는 마십시오. 각자에게 주신 성품과 은사를 인정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했을 때 이삭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결혼한 지 20년간 아이가 생기지 않았는데 이삭이 60세에 리브라가 임신했습니다. 리브가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리브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큰 자(에서)가 작은 자(야곱)을 섬기게 된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사실을 리브가가 이삭에게 알리지 않았을까요? 반드시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장자 에서를 더 사랑하고 더 축복하고 싶어했습니다. 반면에 리브가는 야곱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부부 사이에 영적인 코드가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삭이 장자 에서에게 마음껏 축복하고 싶어했을 때 리브가와 함께 의견을 나누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리브가는 이삭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부부가 영적인 코드가 맞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자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야곱이 이삭을 속여서 마음껏 축복을 받은 후에 에서가 들어와서 축복해 달라고 했을 때 이삭은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이삭은 심히 크게 떨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삭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더 축복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래도 장자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는데 결국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2000리 길, 직선거리 800킬로의 긴 여정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의 복을 기대하며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야곱의 심정은 착찹하기 이를데가 없었습니다. 반면 인간적으로는 에서가 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은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행길에 누가 동행하였을까요? 야곱 홀로 쫓기는 신세로 여정을 떠나야 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에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힘든 도보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해가 지면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서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졌습니다. 그곳은 벧엘이라는 곳입니다. 브엘세바에서 약 85킬로 떨어진 거리입니다. 아마 야곱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삼일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입던 옷을 이불 삼고,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자게 됩니다. 야곱은 노숙자의 원조, 돌베개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사닥다리가 땅 위에 있는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인생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인생의 꼭대기는 어디에 닿아 있습니다.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성공입니까? 사다리는 어디에 어떻게 걸쳐 있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그대로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큰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더 이상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을 것 것처험 생각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에서의 축복을 가로챘고 보복당할까 두려워 도망치는 신세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하여 자신에게 실망하고, 출구를 찾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우리가 실패한 순간에도 하나님은 믿음의 꿈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이루어 가십니다. 야곱이 잠에서 깨어난 후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16절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2.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문에 이렇게 놀라운 복을 주신 것은 그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의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야곱처럼 그렇게 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야곱이 이로 인해 험악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도, 다름어지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과 같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만들어 가십니다.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누가 나와 함께 하는가 그것이 당신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장소에 따라서 시간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가에 차이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불안해서 다신론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적을 붙이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 하반절입니다. “내게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예수님은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방식은 임마누엘의 방식으로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야곱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말씀에서 떠나는 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잊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이외에 다른 것에 마음이 빼앗겨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교만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야곱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나타냅니다. 17절입니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은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하였습니다.
20-23절에서 야곱은 하나님께 이렇게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셔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의 서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축복을 기대하기 보다는 그저 자신의 안위를 지켜 주시면 좋겠다는 서원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제가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고백합니다. 당시에 야곱이 처한 상황이 절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축복을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어내려고 잔꾀를 부렸습니다.
야곱이 나중에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바로 왕 앞에서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토로합니다. 누구의 탓일까요? 야곱 자신의 잘못 형성된 성품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다가 안되면 그제서야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인간의 인격형성이 잘못되면 자신도 고생이고 주위 사람도 고생입니다. 약속의 축복을 받았더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다리는 괴정이 필요합니다. 기다리는 과정을 통해서 신앙의 올바른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야곱에게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가운데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보호하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겠다. 다시 돌아오게 될 때까지 네게 허락한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머뭇거리고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실천에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불안한 순간에, 가장 외로운 순간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과연 계신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시간과 장소와 상황을 초월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공급하심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리는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조급해 하지 않습니다. 약속하신 그분이 주님의 때에 이루어가실 것을 믿기 때문에 기다리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형동의 길이 열리게 되고 자신의 방법으로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험악한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삶의 매순간 마다 하나님께서 과연 여기 계신다는 것을 체험하는 간증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왕을 원하는가?(요 12:15), 김덕선 목사 (0) | 2024.10.15 |
---|---|
지금 벧엘로 올라가자(창 35:1), 김덕선 목사 (1) | 2024.10.15 |
사랑은 신앙의 최고봉(갈 2:20), 김덕선 목사 (3) | 2024.10.15 |
당신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라(느 4:9), 김덕선 목사 (4) | 2024.10.15 |
어린 양의 혼인 잔치(계 19:1-10), 김덕선 목사 (1) | 2024.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