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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싫어하는 마음에서 아끼는 마음으로(요나 4:1-11),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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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갔으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때때로 싫어하는 마음에 사로잡혀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마음만 점점 더해갈 때가 있습니다. 과연 믿음의 사람들은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면 안되는 것일까요?

 

1. 싫어해야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적입니다. 사랑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싫어하게 되는 것은 (마귀)적입니다. 싫어해야 하는 사람을 아끼는 마음으로 바꾸는 사람은 ()적입니다.

 

요나는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인 것 같아서 위로와 힘이 됩니다. 요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나를 싫어하는 마음에서 아끼는 마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가 살던 시대적인 배경은 열왕기하 142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을 가장 부강하게 만든 왕은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주전793-753).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근동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점점 더 교만하게 되고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그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호세아와 아모스와 요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회개를 기대하겼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우셔서 요나를 부르셨습니다. 저 이방 나라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이 왜 니느웨로 보내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요나는 몇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혀 왔던 앗수르 나라 그 자체를 몹시 싫어했습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왜 나를 저 원수의 나라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요나만 니느웨 백성들을 싫어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2. 하나님께서도 니느웨 백성들의 악독으로 인해 그들을 싫어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의 죄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10:12-13), (잔인)(3:1), 극도의 (이기주의)(2:15)가 팽배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회개의 기회를 주실 만큼 그들을 아끼셨습니다.

 

요나는 처음에는 니느웨 백성들이 싫어서 다시스로 도망울 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정도로 그러한 사명을 맡겨주신 하나님 자신도 싫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낯을 피할 정도로 지나친 미움에 사로잡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방향은 동쪽방향인데 완전히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을 쳤던 이유는 앗수르 민족이 싫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그것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길이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후 왕 때에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3. 우리는 자신의 싫은 감정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낯을 구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방향)으로 가면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싫어한다고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 한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바로 잡아서 다시 니느웨로 보내기 위하여 드라마틱한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요나가 탄 배가 거의 깨어지기 일보직전으로 몰고 가셨습니다. 배에 탄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물건들을 바다 위에 던지면서 사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선장은 요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야단을 치면서 당신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해 보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기대를 합니다. 요나보다 선장이 훨씬 더 믿음이 좋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도가 되질 않습니다. 선장이 아무래도 이상했던지 이 재앙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제비를 뽑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때 요나는 자신 때문에 이러한 재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제비가 뽑힐 때까지 가만히 있습니다. 결국 요나가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제서야 요나는 자신은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큰 재앙이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생긴 것이라고 실토하게 됩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왜 그렇게 했느냐고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바다는 점점 더 흉융하게 되고 이렇게 하다가는 다 죽게 된다는 것을 알고 배에 탄 사람들이 요나에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요나가 나를 바다 위에 던지면 바다가 잔잔하여 질 것입니다. 당신들이 이 폭풍을 만난 것이 바로 나 때문이요!

 

배에 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육지로 배를 돌리려고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직도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사람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거두지 마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마침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했던 요나는 계속해서 낮은데로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나서 117절에 보면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사흘 밤과 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나를 아끼셨기 때문에 바로 그 시점에 전무후무한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드디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치는 자신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니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육지 방향으로 토해 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토해내는 사건을 통하여 요나를 얼마나 아끼고 계신지를 보여줍니다.

 

4. 하나님께서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쳤을 때 너무 실망스럽고 (못마땅)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얼마나 (아끼셨는)지를 실제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아껴주시는 것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3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셨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이제 요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갑니다.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큰 성읍이었습니다. 니느웨 성의 둘레가 96킬로였고,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아이들이 12만 명이면 전체 인구는 약 60만 명 가량이 살고 있는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쳤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는 큰 픙랑 가운데 배에서 내던져지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고 나오는 기적을 체험했지만 니느웨 사람들을 싫어하는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 성이 무너진다고 선포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던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5-6절에 보면 니느웨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이 서식을 니느웨 왕이 듣고 자신도 굵은 베를 입고 대신들에게 조소를 내려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자고 하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심지어 짐승들조차도 금식하는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실 줄 누가 알겠느냐고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악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요나는 이것 때문에 시험들어서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못마땅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요나서 4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을 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자신이 예언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너무 싫엇던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하나님의 스타일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나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조목조목 따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럴 줄 알았습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스로 도망하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지극히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차고 넘치며, 벌을 내려고 했다가도 툭하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내가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주님의 뜻대로 되기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입장과 체면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양보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 늘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이 뜻과 주장을 관찰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은 주님도 끝까지 싫어해야 한다는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3절에 요나는 니느웨 성이 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가 낫겠다고 불평합니다. 자신이 싫어하는 민족은 반드시 망해야 한다는 생각이 요나에게 너무 강했습니다. 요나는 자기 민족만이 구원받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은 구원받을만한 자격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민족들만 아껴주시고 다른 민족들은 벌하셔야 한다는 오해를 하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아껴주시는 것은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을 아껴주시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껴주시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아껴주신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은 망해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하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4절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나에게 책망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십니다. “요나가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들을 용서하신 것 때문에 요나가 분노를 터트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일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요나가 성읍에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늘에 앉았습니다.

 

요나는 그래도 그렇지 니느웨 성이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설마라는 단어의 원조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보다 나를 더 아끼시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께서 나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을실꺼야!하는 기대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는 팔레스타인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박넝쿨을 요나를 위하여 예바히셔서 그늘을 지게 하셔서 괴로움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그 박넝쿨로 말미암아 시원한 그늘을 만끽하며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요나를 생활의 사소한 부분까지 간섭하셔서 요나를 지극히 아껴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벌레를 에비하사 다음날 새벽에 박낭쿨을 갂아 먹세 하심으로 시들게 하십니다.

 

게다가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요나를 위하여 에비하셨습니다. 뜨거운 태양이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요나는 작은 것에도 죽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실 사명을 잃은 신자는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9절에 하나님께서 다시 요나에게 나타나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떻게 옳으냐고 반문하십니다.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내가 옳습니다. 요나는 아직도 자신이 입장에서 볼 때는 옳은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신 원래 목적은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가 심판당하지 않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는 데 하루 밤에 낫다가 말라버린 이 박넝쿨을 네가 아끼지 않았던가?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를 분명치 못하는 사람이 십 이만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아끼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싫어하는 마음에서 아끼는 마음으로 바꾸어지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뿐 만 아니라 모든 열방을 품고 아끼십니다.

 

5. 우리는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머무르지 말고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끼시는 만큼 다른 사람도 그만큼 아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대상)을 우리도 계속해서 아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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