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목적은 사랑이다(딤전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해지고 있는 설교나 혹은 세미나는 과연 무슨 목적이 있을까요? 지식을 얻기 위해서일까요? 진리를 위해서? 혹은 실천적 신앙을 위해서? 아니면 예배를 위해서 인가요? 아니면 앞선 말한 전부를 위해서 입니까? 디모데전서 1장 5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르침과 설교는 다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율법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신약성경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따라서 본문은 우리가 가르치고 전하는 목적이 그와 같은 목표에 이르러야 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3가지 목표를 보게 됩니다. 1) 사랑, 2) 선한 양심, 3)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의 구조를 살펴보면 의심의 여지없이 한가지 목표만 나타납니다. 즉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는 온유한 사랑입니다. 이 구절을 달리 표현한다면 "경계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으로부터 나는 사랑, 선한 양심으로부터 나는 사랑,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는 사랑입니다". NIV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이렇듯 계명을 주신 최종 목표는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는 사랑입니다." 새번역 KJV 성경은 "계명을 주신 목적은 순수한 마음에서 나는, 선한 양심에서 나는,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인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때에 디모데에게 쓴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석방된 후에 계속해서 선교여행을 다녔는데, 에베소 교회를 목양하도록 디모데를 남겨두었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그 당시에 확고히 서있는 교회였습니다(사도행전 18:9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이때가 디모데전서를 기록하기 10년 전 상황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질서와 교회의 기능에 관한 문제가 일어났으며, 사도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에베소에서 일어난 일을 바로 잡도록 하였고, 따라서 서신을 통해 디모데를 교훈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를 격려하고 그 책임의 막중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이 서신을 기록하였으며, 아마도 마게도냐에서 이 서신을 기록한 듯이 보입니다. 바울은 다시 에베소로 돌아오려는 뜻이 있었습니다(딤전 3:14, 4:13). 따라서 그 동안 디모데는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아야 했는데,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조직에 대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곧 장로들과 집사들(3장), 교회 안에서 남자와 여자의 역할(2장), 교회가 과부를 돕는 문제(5장), 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태도(6장), 그리고 그밖에 교회 질서에 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외에 디모데전서에서는 전반적으로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왜곡된 가르침에 관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진리에서 떠나간 거짓 선생들이 에베소 지역에 만연해 있었으며, 따라서 디모데에게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바른 교훈이 필요했습니다(딤전 1:3,19,20, 4:1, 6:3,20,21). 아마도 이러한 거짓 교사들이 에베소 교회의 조직과 기능을 붕괴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디모데에게 그의 가르침의 초점과 궁극적인 목표를 계속해서 사랑에 둘 것을 권고받은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의 책임은 에베소 교회에서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딤전 1:7) 가르침의 초점을 잃지 말 것과 궁극적인 가르침의 목적이 사랑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교훈하는데 있었습니다.
이 구절의 가장 중요한 강조점은 진리보다는 사랑에 있는데, 이것은 거짓된 가르침을 다루고 있는 본문에서 진리보다는 오히려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놀랍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도외시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그들의 거짓이 없는 믿음의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가르치고 전파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진리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단적인 말과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이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기록하도록 하신 의도입니다. "교훈의 목적은 사랑이 따르는 진리이거늘"이나, 혹은 다른 표현으로 쓸 수도 있었지만, 성령님께서는 그렇게 기록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종종 훌륭한 크리스찬 지도자들은 진리에 집착하게 되는데, 정통적인 신앙이 그들의 가르치고 전파하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됩니다. 따라서 자기 아래서 배우는 학생들이나 회중들이 자신을 통해 배운 바에 따라 살고 있는지, 아닌지가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는 세부사항에만 관심을 쏟는 듯이 보입니다. 따라서 믿음에 따라 사는 삶보다는 신학이론의 전수가 더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성경본문에 의하면 이러한 훌륭한 크리스찬 지도자도 목표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우리 믿음에 있어서 사소한 것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지 않으며, 바른 교리가 훌륭한 가르침과 전파의 최종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정통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목표라는 뜻이 아니라, 단지 정통적인 것만으로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치고 전파하는 최종적인 결과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뜻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으로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 대해 인자하고 배려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 이러한 목표에 이르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4장 15절과 16절은 진리와 사랑 사이의 합당한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돠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만일 우리가 이 성경을 기록하였다면 16절을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러나 그것은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 구절을 기록하도록 하신 의도가 아닙니다. 진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양육하는데 필수적인 것이지만, 몸의 정상적인 성장은 반드시 사랑 안에서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동정심과 함께 거짓을 용납지 않는 마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참된 목표는 우리의 이해나 신앙, 혹은 진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제한되고 불균형적인 영적인 성장은 바른 교훈이 목표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라, 바른 교훈 자체가 목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을 믿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만, 만일 정상적인 믿음이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한 역동적인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가르침은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정통적인 교리를 추구하면 역동적인 사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정통적이지 못하거나 바르지 못한 가르침은 단지 변론(딤전 1:4)이나 헛된 말(딤전 1:6)을 낼뿐이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바른 교훈은 사랑을 산출하게 됩니다. 바로 이 점이 디모데전서 6:3-5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른 말(딤전 6:3)이란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온전케 하는 바른 교리를 의미합니다. 바른 말은 경건한 삶을 산출합니다. 바른 말은 경건한 신앙을 형성하게 하고, 그 결과로 경건한 삶을 살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건한 삶을 살게 될 때, 비로소 사랑의 목표를 이루는 것입니다. 바르지 못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데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해치게 되며, 그 결과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하게 되고 변론을 내게"(딤전 1:4-5 참조) 됩니다. 만일 이러한 슬픈 일들이 여러분의 교회나 혹은 교제 그룹, 아니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바른 교훈의 목표에 이르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살던 시대에 이러한 목표를 보지 못한 많은 교사들이 성경 외의 이야기들(신화와 족보, 딤 1:4 참조)을 강조하고,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거나 사소한 것들을 과장하여 주장함으로써, 변론과 언쟁을 내었습니다(딤전 6:4 참조). 오늘날 우리도 동일한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외경과 같은 "성경 외의 자료"나 유사-기독교 문헌(혹은 고대 유대교 문헌), 혹은 기독교 베스트 셀러 등을 가르치거나 전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바른 교훈의 목표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다른 행성에도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는가?"와 같은 주제로 세미나를 열거나 "예수님이 목공소에 일하실 때 과연 불량품을 만드실 수 있었을까?"와 같은 설교를 하는 것은 회중들을 계속해서 잠들게 할 것이며, 청결한 마음에서 나는 사랑, 선한 양심에서 나는 사랑,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록 음악을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그리스도 재림의 날짜"와 같은 설교나 강의는 많은 청중들을 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성경에서 말하는 목표에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에 실제적인 적용이 없는 정통 교리 핸드북은 인기는 있지만 결코 성경의 목표에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류의 가르침이나 설교는 단지 변론(딤전 1:4)만 내기 쉽고, 헛된 말에 빠지거나(딤전 1:6),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을 내게 됩니다(딤전 6:4).
바른 교훈과 가르침의 목표는 청결한 마음에서 나는 사랑, 선한 양심에서 나는 사랑,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입니다. 청결한 마음에서 나는 사랑은 감추어진 깨끗지 못한 동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랑입니다. 청결한 마음에서 나는 사랑은 "이 일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혹은 "어떻게 이 책임을 벗을 수 있을까?"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청결한 마음에서 나는 사랑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끊임없이 높이는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선한 양심에서 나는 사랑은 선한 삶, 혹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 때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빌린 돈을 반드시 제때에 갚을 것이며, 세금을 떼어먹거나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의 도덕적인 표준을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적용하도록 권면하는 것은 책망과 바르게 함을 가져올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선한 양심에서 나는 사랑을 자라게 합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은 외식적인 가면을 쓰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교회를 그냥 다니는 것"이나, 입술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며, 어쩌다 한번 성경적인 삶을 따라 살고픈 욕구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란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전적으로 헌신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한 지속적인 사역의 결국은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인 것입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은 바른 교훈을 가르침을 받고,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은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다음을 잊지 마십시오. 성경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목표는 바른 교리를 소유하거나 생각이 건전한 정도가 아닙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목표는 청결한 마음에서 나는 사랑과 선한 양심에서 나는 사랑,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입니다. □
고통 중에도 희망이(애 3:22-23)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위의 성경 구절들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사랑 받는 성경 구절 중의 두 구절들입니다. 그 구절들은, 심지어 우리들이 그렇지 못할 때까지도, 여호와의 변함없으신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하여 감사하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한결같은 보호하심과 우리들의 필요를 매일 채워주시는 것 등을 경험하는 것처럼, 얼마나 자주 이 성경 구절들은 신실하게 우리들의 마음에 와 닿는지요. 심지어 무엇인가가 잘 되고 있지 않을 때일지라도,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서 회복된 후에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우리들은 화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실패와 실망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롬 8:28) 하시는지 뒤돌아보며 기억을 더듬을 수 있으며,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변함없으신 신실하심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슬픔이나 비극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즉 우리들이 실제로 상처와 고통을 느끼고 있을 때, 또는 우리들이 어떻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가를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때 우리 영혼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크신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우리들은 결코 진멸되지 않는다"라고 여전히 말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의 크신 성실하심"에 여전히 매일 아침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받거나, 어려운 싸움의 시간이 끝난 후, "여호와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라고 말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매일 아침의 긍휼 하심과 성실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서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희망이 신자들에게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약속이, 희망의 구절들(21절과 24절) 사이에 끼워져 있고, 슬픔과 비극의 내용에 둘러 쌓여져 있다는 것은, 고통 한가운데서도 희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희망의 구절들인 21절과 24절은 그저 일어나기를 바라는 그런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에게 복 주심을 약속하셨기에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시고 그것에 관해 무언가 손을 써 주시리라는 확고한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요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충실한 사랑에 대한 경험의 확신은 우리 인생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 뿐 아니라 고난과 슬픔의 아주 한가운데서도 깨달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서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정복당한 도시 예루살렘을 위한 애가 또는 장례식의 애도가입니다. 이 성경은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난 직후, 선지자 예레미야에 의하여 쓰여졌습니다. 그때에, 솔로몬 왕이 하나님을 위하여 지은 거대한 성전은 불타 땅에 쏟아졌으며, 유다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바벨론으로 포로로 사로잡혀갔습니다. 파괴 전후의 예루살렘의 상황은 끔찍했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일년이 넘도록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도시를 완벽하게 산산조각 내는 긴 포위 공격 동안, 질병은 만연했으며, 죽음이 도처에 있었습니다(왕하 25:1-10, 겔 5:12 참조). 포위 공격으로 인한 기근이 너무나 심하여 예루살렘 거민의 일부는, 심지어 자기 자식을 먹는 등의, 식인 행위를 하기도 했습니다(애 3:20, 4:10, 겔5:10).
침략 이후, 예레미야는 몇몇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바벨론 군대로부터 허락 받았습니다(렘 40:1-7). 그의 애가를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라며 시작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애가의 다섯 장을 이루는 암울한 다섯 개의 시를 만들어, 버림받은 도시에 대한 그의 애가를 계속합니다. 1장부터 4장까지의 시는 이합체 시(acrostics ; 각 줄에서 처음과 끝을 맞추면 어구가 되는 시)입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각각의 절이나 이 장들의 절들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다음 문자로 시작되는데, 알파벳순의 애가에서, 예레미야는 황폐해진 도시 예루살렘을 위해 울부짖으며 A에서 Z 까지를 이어갑니다.
우리가 예레미야 애가를 읽어 가면, 다소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고통의 여러 부분들이 언급되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래의 목록은 예루살렘이 사로잡혀가고 불탔을 때 생겼던 슬프고 애통한 일들의 단지 일부를 편집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마도 아래와 같은 고통스러운 일들 또는 비극적인 상처들 중 하나정도는 경험해 본적이 있을 것이며, 지금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버림받은 사람으로서 취급을 당하는 고통(4:15)
고아가 된 고통(5:3)
비천한 노동을 하도록 강요받은 고통(5:13)
물리적 고문을 당한 고통(5:12)
강간을 당한 고통(5:11)
남편이나 부인을 잃은 고통(1:1, 5:3)
존경받는 위치에서 떨어지는 고통(1:1, 1:9, 3:47, 4:3, 4:7-8, 5:8)
편안하게 해주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고통(1:2, 1:9, 1:16-17, 1:21).
친구가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는 고통(1:2, 1:17, 1:19).
심신이 휴식을 얻을 수 없는 고통 (1:3, 1:22, 2:18, 3:19, 5:5, 5:17).
즐겁게 모일 수 있는 시간이 끝나버린 고통 (1:4, 2:6, 5:14-15).
당신의 아이를 빼앗기는 것을 무기력하게 수수방관 할 수밖에 없는 고통(1:5)
물질적 재물을 잃어버리는 고통 (1:7, 4:1, 4:5, 5:2).
조소와 경멸의 대상이 되는 고통 (1:7-8, 2:15-16, 3:14).
기본적인 필요의 부족을 경험하는 고통(1:11, 1:19, 4:9, 5:4, 5:9-10)
당신이 하려는 일을 어느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는 고통(1:12).
당신의 아이가 무엇인가를 굉장히 갈망하는 것을 보는 고통 (1:16, 4:4)
엄청난 감정적 스트레스를 경험하는 고통 (1:20)
당신의 경쟁자가 만족한 표정으로 당신을 굽어보는 고통(1:21, 2:16-17, 3:46).
비극적인 손실로 인해 괴로워하는 고통 (2:10, 3:51).
당신의 아이의 죽음을 막을 수 없는 고통 (2:11-12, 2:19, 2:22).
당신 자신의 안녕을 위하여 당신의 아이를 희생시키는 고통(3:20, 4:10).
잘못된 가르침을 따른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을 때의 고통(2:14).
당신이 신성을 더럽히는 요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고통(1:10, 2:7).
하나님이 복을 당신에게서 옮기시는 것을 보는 고통 (2:9, 3:17-18, 5:20-22).
하나님의 징계아래에 있음을 깨닫는 고통 (1:13-15, 2:1-5, 2:21-22, 3:1-18, 3:43, 4:6, 4:11, 4:16, 5:7, 5:17).
이러한 고통의 모음을 읽고 난 후, 희망의 구절이 3장의 가운데에 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하심 아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그의 확신을 쓴 애가의 가운데 시입니다. 예레미야는 물론 유다의 소수의 사람들 (국가에서 잘못을 행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나라를 심판하신 그 죄에 개인적으로 유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국가의 죄를 고백함에 따라 유죄임을 알아차리게 되었으며,(램애 1:18, 1:20, 3:42 , 5:16.) 이들의 겸손한 자세는 죄악으로 찬 우리들의 국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우리가 따라할 수 있는 아주 성경적인 본보기입니다.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라고 말한 사람들은 유다의 반항적이고 우상 숭배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하나님께 신실하게 남아있던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비교적 작은 숫자의 사람들만이 남겨지리라고 선지자 에스겔은 극적으로 예언했었습니다(겔5:3, 5장 전체의 내용). 이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유다의 죄로 인해 겁에 질렸고 슬픔에 빠졌으며, 예루살렘의 파괴라는 에스겔의 예언에서 하나님의 "보호의 표시"를 받습니다(에스겔 9장 중 특별히 4절).
이 책을 통하여 신실한 사람들은 바벨론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훈련의 회초리였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음을 보게됩니다(애 1:5, 1:12-15, 2:17, 4:13, 5:7). 그들이 하나님 앞에 신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았습니다. 이 신실한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매일 아침 새로우며 그의 성실하심이 크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고통의 한가운데에서였습니다.
어떻게 그들은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의 증거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매일 아침 경험했던 새로운 인자하심은 과연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예레미야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로 선포하신 것에 신실하시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죄를 징계하실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셨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당신께서 유다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비록 그들이 싹 씻어 없어지고 진멸 됨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셨고 또한 이일에 공정하셨습니다.(렘 4:27, 5:10, 5:18)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에도 신실하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 나라가 바벨론에 사로 잡힌 지 70년 이후에 되돌아올 것이라는 사실 역시 선지자 예례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렘25:11, 29:10).
신실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매일 하루씩 그 예언의 성취에 가까워지고 있었으며, 사실 매일 태양이 뜨고 있다는 것조차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태양이 떠오르는 한, 나라가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렘 31:35-36). 이것은 그들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갖게 하는 이러한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인하여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힘을 주는 말입니까! 우리는 종종 우리의 죄와 실수로 인하여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반면에 다른 사람이 한 행동으로 인하여 고통받을 때도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부모님, 아이들, 상관, 부하직원, 선생님, 학생 등의 행위나 실수로 인하여 고통받기도 합니다. 가끔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이 "그저 일어나 버린 일"로 인하여 고통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든, 예레미야 애가 공부는 언급된 모든 고통이 하나님의 훈육의 재료중 일부임으로 사기를 북돋워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맥락에서 희망을 주셨다면, 무엇으로 인해 야기되었든지 간에 오늘 받는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주시리라 우리는 확신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라고 하는 약속을 받았으므로, 이러한 약속에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확실히 포함합니다. 우리는 또한 "모든 일은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모든 자의 뜻에 따라(엡 1:11)"라고 하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들의 삶을 둘러싼 협소한 일들보다 더 큰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들도 하나님의 통제의 손길에서 벗어나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허락하심 하에 존재하는 악한 일들조차도 하나님의 통제하시는 영역 밖에서는 일어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우연히는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모든 부분입니다(엡 1:11,12를 거듭 읽어보시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고통의 모든 원천 즉, 과거와 현재, 자연적 초자연적, 좋은 것 악한 것(롬8:38,39) 등을 아시고 통제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지 몇 가지 조각을 뽑아서 당신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비극에서부터 좋은 어떤 것을 만들지는 않으시며, 우리가 인식하거나 (아니면 이해하거나) 못하거나 항상 완벽한 통제를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 가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행동에 따라 온 우주의 모든 일들을 통제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조차도, 하나님의 우리에게 향하신 사랑과 신실하심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를 새로이 감상하게 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예레미야 애가 3:22,23 의 내용을 우리 실제 삶에 있어 직접적으로 응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진실 안에 살고 신실과 진리 안에서 자라간다면, 우리가 고통받는 매일의 시간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줄 수 있도록 주님이 허락하신 방법들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며, 우리는 우리에게 가족과 친구들, 또 우리가 종종 무심히 지나쳐 버리기 쉬운 축복인 대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안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작은 자비로우심(즉 낯선 사람에게 받은 예기치 않은 도움, 용기를 북돋워주는 글귀, 발치나 무릎에서 재롱을 떠는 충직한 애완 동물, 고통을 극복한 충직한 자서전 등)도 깨닫고 인식하게 됩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을 높이 인식하며 깊이 감상하게 됨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되며, "모든 것"은 진실로 모든 것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안락과 사기 충전을 위한 다양한 필요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들 - 과거와 현재, 자연적 초자연적, 좋은 것 악한 것(롬 8:38,39)-이 방식대로 채워지지 않는 모든 실망스럽고 상처받는 상황 속에 있을 때인 그러한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희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안녕에 관한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오늘도 영원히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더불어 지내는 영원한 미래에 관한 성경의 모든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함에 비하여 보면 순식간에 지나가는 순간일 뿐이며, 오늘의 고통은 곧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고통의 한가운데서도 희망은 확실히 존재합니다.
말씀의 단련, 데이빗 리드
원제; TESTED BY THE WORD
시편 105:16-21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끓으셨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며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를 자유케 하였도다. 저로 그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요셉의 이야기는 구약의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도전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요셉은 부정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몇 안 되는 성경의 인물중 한 사람입니다. 창세기 37장의 10대부터 창세기 50장의 100세의 죽을 때까지 요셉의 삶은 우리들에게 용기와 확신을 가져다 줍니다. 요셉의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연구해야 할 아주 좋은 화제일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훌륭한 모델입니다.
요셉의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요셉이 불평했다던가 그의 믿음이 조금 흔들렸다는 내용을 결코 읽지 못합니다. 비록 그가 형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여인을 강탈했다고 거짓 고발되고, 그의 주인에 의해 감옥에 던져지고, 그가 도와주었던 사람이 그를 잊어 버려도 그러했습니다. 우리와 다르게 어린 요셉은 완성된 하나님 말씀의 혜택과 성령의 내주 함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를 격려 해줄 요셉의 이야기도 없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가지겠습니까? 요셉의 일생은 젊은 자에게나 나이든 자에게 동일하게 가치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요셉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비밀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 없이 이해하고 받아드린 것에 있습니다. 요셉은 '우리의 실망이 하나님에게는 소망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마지막으로 그의 형들에게 나타났을 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동안 흉년이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들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5-8).
그의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요셉은 다시 그의 형들에게 자기 일생의 확신을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창 50:20)로 말했습니다. 요셉은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무서울 정도로 잘못된 모든 것 조차도 최종적인 선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 대해 악으로 행하실 분이 아니시라, 하나님은 결코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숱한 경험들을 겪고 나서 그분 섭리대로 이끌어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요셉은 우리가 가끔 믿는 것 보다 더 로마서 8:28절의 진리를 믿었습니다! 요셉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환경을 완전히 지배하신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진실로 그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아무런 불평 없이 우리에게 닥치는 대로 우리는 그것을 생활에 받아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우리의 믿음과 신뢰가 얼마나 견고하십니까! 요셉의 믿음과 견주어 볼 수 있을까요?
단련 과정
요셉의 생은 믿음의 시험이 무엇인가에 대한 아주 좋은 한 예입니다. 요셉의 생에 있어 불행한 경험들은 요셉에 대한 믿음의 하나의 시험(test)이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저지른 실패로부터 싹이 난 것을 거두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가 행한 죄악에 대한 훈련을 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요셉의 믿음이 시험받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5:19에서 요셉에 대해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하였습니다. '단련되다' 혹은 '입증되다' 로 번역된 동일한 히브리어가 시편 12:6, 시편 66:10에 사용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단련 과정이 은이나 금의 단련이나 검사 과정과 같습니다. 검사과정은 보석의 가치와 순수성을 정제하고 시험합니다(사사기 7:4 ).
요셉의 생에 있어 "단련과정"은 20년 넘게 일어났습니다. 요셉은 그가 단지 10대 때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는 장래에 대한 그의 꿈이 주께로부터 온 의사전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은 그가 그의 가족에게 꿈을 이야기한 이유일 것 입니다. 비록 그것이 그의 형들의 미움의 불에 기름을 더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더라도 그의 가족들에게 꿈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습니다. 어쨌든 여호와의 말씀이 장래에 희망은 조금 보이지 않고 비극적인 배신과 쓰라린 실망으로 가득 찬 2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요셉을 단련했습니다. 요셉은 시험을 통과했고 그 시험을 그의 믿음의 가치와 순수성을 "증명"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갔을 때 그의 실망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보디발의 가정 총무의 책임이 있을 때 약간의 '봄날'인 것같이 보였습니다만 거짓 고소와 투옥으로 그의 소망은 내던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셨던 꿈을 어떻게 이루어 가는 표를 수평선 넘어 근심스럽게 찾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셉은 그의 마음에 몇 가지의 시나리오를 구상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가 열심히 일한다면 하나님께서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준비하시고 그 당시 가장 큰 나라인 애굽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애굽에서 성공하면 고향에 방문하러 갈 것입니다. 그 곳에서 그의 깜짝 놀라며 존경하는 가족들은 그의 꿈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보다 중요하게 하나님께서 그 사실에 대해 입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지요. 또 믿음의 시험은 얼마나 놀라운가요! 우리는 시험을 통과 할 수 있을런지요?
또 다른 큰 믿음의 시험은 술잔 시중은 드는 자가 마지막으로 그를 기억하고 요셉이 바로 앞에 불려 나오기 전에 있었습니다(창 41:1-36). 우리가 요셉의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바로의 꿈을 해석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흥정을 했을까요? 우리를 믿도록 했을까요? 아니면 요셉이 했던 것처럼-자기 자신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모든 신뢰를 하나님께 돌리는-것을 우리가 했을까요? 우리 자신의 생명과 자유보다도 꿈의 의미와 생명유지에 더욱 관심을 가졌을 까요? 요셉은 그의 생명과 장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높은 점수로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우리의 '평균점수'는 얼마입니까?
주의 말씀이 요셉을 시험했던 것처럼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 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을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잠언 3:5-6의 그 분의 약속과 같이 우리의 결정들 중에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을 진실로 믿으십니까? 우리의 믿음이 이러한 영역에서 시험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대한 실망이 우리가 시험에 실패하고 있다는 표시가 아니고 의심과 불평이 바로 그 표시입니다!
완전한 과정
가끔 질문하기를 “하나님께서 전지(全知)하시다면 우리가 믿음을 가졌는지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크기를 아시는 데 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실까?”라고 합니다. 성경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야고보서 1:2-4에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자녀들이 이기는 자가 되어 그들의 믿음이 강하여지고 성숙하여져서 도전에 직면하여 굳건히 설 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과정 가운데 이것이 이루어집니다. 더하여 꼭 필요한 성품들 - 겸손, 복종과 비이기적인 태도를 개발하기 위하여 우리의 행로에 다양한 고통들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신”(히 5:8) 우리 주 예수님의 생에서 매우 분명하고 아름답게 그려진 종의 자세를 개발시키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17은 우리에게 시험과 시련의 또 다른 목적을 보여 줍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정제하고 순결하게 하며, 순결한 믿음은 우리 주님께 더 큰 존귀를 돌려드립니다. 이것을 앎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요셉처럼 살아가도록 동기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불평하거나 의심하는 것을 멈추게 합니다.
그림 감상
요셉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께서 주신 본일 뿐 아니라 우리가 인정해야 될 그리스도의 한 그림입니다. 요셉이란 인격과 삶은 구약성경의 한 폭의 그림이거나 혹은 실례이거나 장차 올 메시아의 인격과 삶입니다. 비록 신약성경은 한번도 명확하게 요셉이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에서 요셉과 그리스도의 대응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데반은 부당한 취급, 핍박과 믿음이 없는 형제들의 배반에 대해 말했습니다(참조 행 7:9-10과 51-53).
요셉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의 대응은 매우 많아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그림을 보고 평가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참조 마 3:17, 요 3:35과 요 5:20). 요셉처럼 그분은 형제들을 찾아 그들의 안부를 확인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요셉처럼) 주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미움을 받았고 거절당했습니다(참조 요 1:11-12과 요 15:24-25). 요셉의 형제들이 특히 그의 예언적인 꿈을 미워했듯이 유대인들의 관원들은 주님께서 메시아와 왕이라는 주장을 미워했습니다(눅 19:14). 그리고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죽이려고 음모를 했듯이 유대 백성들은 그들 자신들의 메시아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몄고 죽였습니다(참고 마 21:37-39, 마 26:3-4, 요 5:18). 더욱이 요셉이 고통을 받고 있을 동안 형들은 모여 앉아 무정하게 떡을 먹었던 것처럼 무자비한 바리새인들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유월절 절기를 위하여 모여 앉아 먹을 준비를 했습니다(요 18:28).
요셉의 도덕적 인격이 유혹과 거짓 고소로 시험을 받았듯이 그리스도의 도덕적 온전함이 그 분이 유혹을 받고 거짓 고소로 시험을 받았을 때 증명되었습니다(참조 마 4장, 눅 4장, 요 18:30, 눅 23:2-5, 막 14:56-59, 마 26:59-61). 덧붙여 구약성경의 예언에서 주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생을 시험하셨고 메시아로 그의 자격이 인정되었습니다. 요셉이 거짓 고소되었을 때 그 자신을 변호하지 않은 것처럼 주 예수님도 거짓 고발되고 재판을 받았어도(마 27:12-14, 마 26:62, 막 14:60-61, 막 15: 4-5)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사 53:7). 하나님께서 요셉을 변호하셨고 이집트를 총괄하는 자리로 올리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시고”(골 2:12)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거절하고 배반한 것을 회개하고 그를 우두머리와 구원자로 시인했듯이 다가올 날에 유대인들도 참된 메시아인 예수님을 거절한 죄를 회개할 것이며 그들의 주와 구세주로 그 분을 시인할 것입니다(스 12:10-14). 그리고 요셉이 회개하는 형들을 은혜롭게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했듯이 주 예수님도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 이스라엘에 대해 용서하시고 화해하실 것입니다(참조 겔 37:1 -14, 롬 11:15, 25-26). 요셉의 생과 그리스도와의 이 모든 대응들-더 많은 것들-은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부합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우연일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엠마오의 도상에서의 두 제자에게 성경을 말씀하실 때 요셉의 이야기도 포함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누가복음 24:27에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구약성경을 풀어 주실 때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눅 24:32).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시험받을 때, 주님은 요셉의 삶이 우리를 격려하게 하고 우리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성경의 명령과 약속들을 믿습니까? 우리는 요셉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받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우리의 믿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함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
명성을 구하지 말자, 데이빗 리드
원제: NO CLAIM TO FAME
고린도전서 4: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누가복음 12:48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많은 학생들에게 학교의 졸업시기에는 "승리의 환희" 이거나 "패배의 고통"입니다! 어떤 학생들에게는 학업우수상과 체육상, 좋은 직장과 장학금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에게는 실망스러운 학점과 상장은 없고, 희박한 취업 가능성과 장학금 불혜택만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 자신이 지금 한 부류이거나 또 다른 부류에 속합니다.
위의 성경구절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진열 가운데 어느 부분에 속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말해줄 무엇인가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성경구절은 지적으로 뛰어나고 그들의 모든 성취한 일들이 훌륭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겸손하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동일한 성경구절은 재능이 바닥이 났을 때 그들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희망은 줄 수 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그들 자신과 자신의 성취에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훈계로서 이 성경구절에 집중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하기 전에 전혀 재능이나 천부적 자질이 없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에게 어떻게 용기가 될 수 있는지 보도록 합시다.
고린도전서 4:7과 누가복음 12:48에 포함된 진리의 빛 가운데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어떤 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편안하고 마음이 안정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이가 단지 보통 I. Q를 가진 그의 아이에게 학교에서 모두 A학점을 기대하는 비합리적인 부모와 같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이해심이 많아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기를 아이에게 기대하는 이성적이고 이해심이 많은 부모님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재 상황을 만들어 주셨고 또한 우리에게 주권적으로 어떤 능력이나 재능을 주시거나 혹은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완전히 알고 계시고 우리를 비난하시거나 우리에게 맡기지 않은 과업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하나님은 그의 가족의 심판에 있어 항상 그가 "가지고 있는 것에 근거하시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고후 8:12).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대로 우리 받아들이고,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고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를 심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굉장한 용기가 부여될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그들 그리스도인에게 용기를 줄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재능을 발휘 못할 것 같기 때문에 그들은 가끔 실망합니다. 모임에서 물론 이런 용기부여는 게으름의 핑계나, 책임의 중지, 혹은 책임 기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발전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능력과 힘을 증진시키고 증가시킬 때 새로운 책임을 갖도록 하십니다(참조 눅 8:16-18, 딤전 4:14-15 딤후 1:6).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 안에는 '하찮은 자'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구성원은 그리스도의 몸의 적절한 기능을 위해 중요합니다(참조 고전 12:12-27).
빈약한 자아상은 갖고있는 그리스도인이 있는 반면, 다른 한 측면에는 부풀린 자아상을 갖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확실히 이런 그리스도인은 매우 능력있고 성공적입니다. 수상과 영예와 표창은 이 활동가에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타입의 사람은 그의 성취와 업적이 순전히 자기의 노력이었다고 더러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런 범주의 그리스도인은 그들 자신만큼 재능이 없거나 자질이 없는 사람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으며, 멸시합니다. 자, 이 동일한 성경은 이런 타입의 그리스도인에게 말해줄 매우 분명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믿는 자들에게 이러한 태도는 상당히 인정을 받습니다! 당신은 스포츠 경기를 할 때 함께 이야기하기 어려운 사람이거나 거북해 보이는 사람들을 비웃은 적이 있습니까?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라는 말씀은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분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미모를 가졌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운동 재능이 있습니까? 당신은 것을 받았습니다. 학습능력이 있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천부적인 은사를 가졌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설교할 능력이 있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교사의 영적 은사를 가졌습니까? 당신은 그것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것에 관해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은 단독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애써 노력하며 얻은 표창과 상장과 마찬가지로 좋은 점수와 좋은 직장조차도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재능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 성경의 가장 예민한 말씀은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입니다. 학생에게 총명이 주어졌을 때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요. "다른 사람과 구별시키시는 분"이므로 하나님 쉽게 누구에게나 좋은 두뇌를 주실 수가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자기의 기록과 승리 때문에 자기 중심적 생각을 지속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들의 힘, 균형과 기술 그리고 훈련능력 조차도 모든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운동능력을 주시기로 선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급하는 어떤 분야에서 더 많이 가진 그리스도인이 더 적게 가진 그리스도인을 경멸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많은 사람들을 상처받게 합니다. 개인간에 사소한 질투심과 나쁜 감정이 진전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모임에 주요한 분열과 나눔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분이 성공적인 것처럼 전개되기 시작하고 아직 이기적이지는 않으나 공공연히 그리스도인들이 추종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조종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교회들은 거리낌없이 말하는 이러한 타입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문제 때문에 주님의 일이 방해받고 축복이 감소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재능과 천부적인 지도자일지 모르나, 동시에 그들은 거만하고 이기주의자들입니다. 비록 그들이 항상 자신의 문제를 깨닫지 못할지라도... 하여튼 그들의 두드러진 능력이나 재능이 다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유명해진데 대해 정말로 주장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였고 게다가 그것은 고린도 교회의 당면 사항이었며, 고린도전서 4:7의 배경을 형성합니다(고린도전서 1-3을 읽어봅시다). 우리는 이 구절이 우리자신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리자신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비추어 봅시다.
누가복음 12:48은 고린도전서 4:7에 대한 성경적 결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더 많이 받은 자일수록, 주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이 쓰임 받도록 기대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두뇌를 허락받아 매일 밤늦게까지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은 주 앞에 자기의 재능을 지혜롭게 사용할 책임이 있으며, 불합리하게 많은 시간들을 비디오 게임방에서 소비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학생들에게 능력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진 여분의 시간을 캠퍼스에서 그리스도인의 지도자로써의 소양을 대비하는 데 쓰는 매우 좋은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서 주신 영적 선물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책임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영적 능력의 사용을 방치함으로서 그것은 우선 순위가 낮아져 우리의 대부분의 시간, 정력을 보다 많은 돈을 벌고 세상일에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주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영적 은사의 사용에 관해 주님께서 직접 계산하시게 될 것입니다. 멋진 외모와 운동의 재능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또한 그와 같은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책임이 있습니다. 전혀 자신의 만족이나 자기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화려한 외모나 운동가다운 능력을 갖춘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할 수 있는 기회들이 현저히 많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2:48절에서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한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한 책임있는 사용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잃거나 남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써야합니다. 우리가 받은 재능의 충실한 사용은 언젠가 주의 입술을 통한 칭찬으로 나타날 것입니다(고전 4:5; 마 25:14-30). 우리의 명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에 기준을 두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가 받은 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기준을 두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길을 기억함, 데이빗 리드
원제:Remembering All the Way
신명기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를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감사절은 기억의 때입니다. 감사절의 유래는 하나님의 보살핌과 먹을 양식을 주심을 기억하고 그 분께 감사하는 데 항상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1621년 매사츄세츠(Massachusetts)의 플리머스(Plymouth)에서 순례자들은 첫 번째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기억했고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새 집으로 인도한 메이플라워(Mayflower) 항해를 기억했습니다.
1620년 그들 모임의 절반의 생명을 앗아간 혹독한 겨울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1621년 따뜻한 봄과 풍성한 수확을 기억했습니다. 또한 인디언들에게서 얻은 평화도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좋은 일들과 함께 온갖 고난들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던 모든 일을 기억했습니다.
순례자들은 감사에 대한 영적 교훈을 따랐습니다. 그들 앞에 제시된 미래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감사로 모든 것들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영적인 감사의 교훈은 신명기 8장에 오래 전에 이스라엘에 주어진 대로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 동쪽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이라는 풀무(고난) 가운데서 한 민족으로 만들어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속박에서 풀어내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이끄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신앙과 반항으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연기되었습니다. 40년 긴 기간동안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명기 8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새 집의 문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요단강 건너기를 준비하는 모든 흥분 가운데 엄숙한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의 모든 말씀입니다. 그 선포는 모세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주님께로 직접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새 땅에 들어가서 그 복을 누릴 때(7-9절)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인도했던 모든 길에 항상 감사함으로 기억해야 했습니다(10-18절).
감사에 대한 영적 교훈은 오늘날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여전히 준수돼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인도했던 모든 길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 현재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일과 미래에 우리를 위해 그 분이 하실 장래를 기대할 뿐 아니라 과거에 우리와 함께 하셨던 그 분의 길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명기 8장과 그 나머지 성경의 암시하는 바는 우리가 항상 감사로서 기억하는 것입니다(참조 엡 5:20, 살전 5:18, 빌 4:6). 기억하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감사함 없이 기억하는 것이 옳은가요?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던 모든 길에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4절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 땅에서 종살이의 구속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기적적인 처음을 기억했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주권적인 중재가 없었다면 불운의 민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400년이나 넘는 속박에서의 탈출 - 모세의 하나님 뜻에 의한 지도력과 하나님께서 종이었던 백성의 두령들에게 내린 염병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것과 바로 군대의 침몰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처음 시작할 때의 주를 기억하고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어두움과 사망에서 빛과 생명으로 옮겼는지 잊지 말도록 합시다(벧전 1:9, 엡 2:1-5). 주께서 우리로 그리스도안의 구원을 받게 하시기 위해 이끌어 오신 얽히고 설킨 거미집 같은 환경과 경험(유쾌하지 않은 것들조차도)을 생각합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초로 삼으신 그리스도인 부모님과 주일 학교 교사들이나 그리스도인 친구들에 대해 감사할 것을 기억합시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첫 단계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들에 대해서 가장 최근에 특별히 감사한 적은 언제입니까? 현재의 문제나 장래의 계획에 대해만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시작의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축복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인은 다가올 모든 축복들에 대해 생각할 뿐 아니라(7-9절), 광야에서 지난 과거의 축복들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40년 동안 여호와께서는 초자연적으로 그의 민족에 대해 양식을 공급하셨습니다. 그분은 글자 그대로 하늘로부터 그들에게 떡을 보내 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의복과 신발을 40년 동안 닳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신명기 29:5). 기적에 대해 이야기 해 봅시다. 주께서 그의 민족을 낮추시고 시험하시기 위해 이 축복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래 부분에서 언급한 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축복이었습니다(이와 관련하여 느헤미야 9:20-21참조). 이스라엘은 이 모든 과거의 축복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지나간 모든 축복에 대해 주께 감사하기 위해 기억하십니까? 혹은 기억하기에 너무 바쁩니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우리는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축복하셨는지를 되돌아보고서 이 모든 축복에 대해 특별히 그 분께 감사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30초 짜리의 의례적인 "좋은 건강과 맑은 날씨에 대한 감사"와 같은 류의 기도는 아닙니다. 우리가 공공연히 성경을 사서 읽을 수 있는 나라에 산다는 축복에 대해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30억이나 더 되는 사람들보다 음식과 의복 그리고 휴식시간을 더 누리는 것에 대해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회상한다면 주님께 감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주님 앞에서 우리의 전반적인 생각과 생활양식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범죄와 부패로부터 그 분이 우리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주님께 감사한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에베소서 1:3-14절을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감사드려야할 얼마나 많은 영적인 축복들을 잊어버렸는지 깨달으십시오. 옛 찬송가에서처럼 "우리의 축복들을 세고,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면 주께서 행하신 것들에 대해 놀라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패배를 기억합시다. 이제 "패배(Beating)'라는 단어가 "B"자로 시작 될 뿐 만 아니라 훈련의 의미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선택되었습니다. 주님은 몽둥이나 매로 혹은 그와 같은 것으로 우리에게 그 분의 노를 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를 아들처럼 훈련하십니다(신명기8:5). 하늘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훈련시키십니다. 그리고 가끔 그런 훈련은 매 맞음을 통해서 가능합니다(히12:5-11 그리고 특히 6절 참조).
이스라엘은 확실히 광야에서 가벼운 꾸지람을 몇 번 이상 받았습니다. 5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주께서 광야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제공된 노정조차도 훈련의 형태였습니다. 광야에서 주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길은 그들을 낮추시며, 시험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고안된 것이었습니다(2절). 그 분은 그들을 굶주리게 하시고 목마르게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로 하여금 그 분을 바라보게 하시고 육체적인 음식만으로는 생명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영적 양식 즉 하나님 말씀을 끊임없이 일정하게 섭취해야 했습니다(3절).
비록 주께서 그의 백성들을 의도적으로 목마르게 하셨을지라도 그들을 굶어 죽게 하거나 탈수 상태에 처하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분은 하늘로부터 만나로 그들을 먹이셨으며 반석으로부터 물을 마시웠습니다(3장15-16). 그 곳이 집이 아니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 구운 빵(그들 조상들이 알고 있었던 전형적인 종류) 혹은 그들이 판 우물의 물이 -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떡이었으며 ,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근원, 딱딱한 반석으로 나온 물이었습니다.
비록 주께서 그들을 낮추시며 시험하시고 계셨을지라도 그 분은 그들을 돌보았으며 , 그들을 먹이셨으며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16절). 그러나 그 분은 그들이 그들의 힘과 능력으로 광야 행진을 하고 가나안을 정복했다고 결코 말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심지어 약속의 땅의 모든 부를 그들이 이어 받았을 때라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신 모든 길을 - 특별히 "훈련"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이 적용은 거의 재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린이들과 같은, 우리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은 역시 끊임없이 훈련되어져야 합니다(심지어 매를 맞으면서까지).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광야에서 시련의 기간을 통과하도록 허락하십니다(우리를 낮추시고 시험하시며 우리의 마음 속을 드러내도록 - 우리의 머릿속이 아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나 어려운 가족 관계, 실패의 기간도 주께서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분을 의지하며 바라보게 할 것으로 사용하십니다.
주께서는 돌보시고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 - 우리가 원하는 것을 진실로 채우십니다. 그 분은 이스라엘을 먹이셨습니다. 불고기가 아닙니다. 그 분은 오래가는 옷을 주셨습니다 - 가장 최근의 패션은 아닙니다. 그 분은 그들을 크고 무시무시한 전갈이 있는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15절) - 지중해의 해안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훈련으로 다루십니다. 많은 경우 그 분의 훈련은 즐겁지 않습니다.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히 12:11). 그리고 가끔 잘못 이해됩니다. 우리의 가장 좋은 것들은 항상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16절; 히12:10). 이 것 때문에 감사함으로 우리 실패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감사로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던 모든 길을 기억합시다!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데이빗 리드
원제: ALL THINGS ARE PURE
디도서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그리스도인은 음란물(포르노)을 보면서도 그 마음이 정결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역겹고 폭력적인 내용으로 뒤덥혀 있는 비디오를 시청하고도 그 생각이 더럽혀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어떤 종류이든지 천박하고 외설적인 글을 읽고 그 사고방식에 있어 해악을 입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요?
디도서 1장 15절은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위의 질문들에 대해 "예"라고 대답하게 하는 근거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동기가 순전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읽고 보든지 상관없이 더렵혀지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런 것들에 의해 타락하게 되는 것은 불순한 마음과 동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디도서 1장 15절의 의미일까요? 이 말씀의 의미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음란한 인체 사진을 단순히 자연스러운 "예술작품"의 형태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 의미가 신실한 신자는 그런 영화, 비디오, 잡지 또는 책자의 타락시키는 영향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디도서 1장 15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면역이 있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무 것이나 보고 읽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구절은 음란물이나 쓰레기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보거나 읽을 때 기적적으로 변화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역에서 순진하게 장난치다가 아무 상처 없이 떠나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
비록 그러한 행동을 한 의도가 불신자들에게 그들을 잘 이해하는 증인이 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디도서 1장 15절에 대한 이런 잘못된 해석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타락한 인간 본성의 죄악된 갈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교묘한 시도일 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말씀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지침을 어기고 있습니다. 첫째로 말씀은 반드시 말씀에 의해 해석되어야 하며, 두 번째로 말씀은 그 본문으로부터 동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 어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디도서 1장 15절을 부도덕한 행동의 구실로 사용하도록 이끈 것입니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보거나 읽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말씀은 말씀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성경말씀의 중심이 되는 주장은 신구약을 전체를 통해서 신자는 어떤 식이든 간에 타락으로 이끄는 가능한 모든 영향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가나안 지경에 들어갔을 경우, 그들은 이방 종교의 습관에 대해 묻기조차 하지 말라고 지시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의식을 따르고자 하는 유혹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신 12:10).
우리는 고대의 증거를 통해 가나안 종교는 모든 종류의 외설적이고 부도덕한 행위 및 이런 기본 예식의 연기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모든 것이 멸망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그 땅의 우상과 부도덕함에 의해 오염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확인해서도 안되었습니다. - 비록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지라도. 그들은 순전히 깨끗한 상태로 남아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의 로마서 16:19 말씀이 가르치는 점입니다. "너희는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고상한 일들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 하며 선을 행하는 데 익숙해져야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타락시키거나 우리를 유혹가운데 이끌만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순진함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대 바벨론의 이방인들이 사용하는 부정한 물건은 만지지도 말아야 했는데(이사야 52:11),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도 이 탈기독교적 문화에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합니다(고린도후서 6:17). 만일 우리가 우리의 타락한 죄성을 자극하기 위해 쓰여지고 만들어진 것을 읽거나 보는데 착념한다면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고린도후서 10:5)"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은 확실하게 "정욕을 피하고"(디모데후서 2:22) "얽매이기 쉬운 죄"(히브리서12:1)은 무엇이든지 피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위에서 언급한 말씀들(그리고 많은 다른 말씀도 함께)에 비춰 볼 때, 디도서 1장 15절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스스로를 세속적이고 음란한 것들에 노출시키고도 해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게 정결한 것은 아닙니다. - 그리스도안에서 그 마음이 정결함을 입은 사람에게 조차도. 말씀이 서로 배치되는 의미를 가질 수 없으므로,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말씀이 정결한 그리스도인은 불결한 것들에 대해 면역성이 있다는 것을 지지하는 의미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은 그 안에서 서로 배치되지 않을 뿐 아니라, 모든 말씀은 그 문맥의 비췸가운데 해석되어야 합니다. 디도서 1장 15절이 죄를 용서하는 구실로 사용되는 것은 이 구절이 본문에서 떨어져서 사용될 경우에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디도에게 보내었는데, 그는 그레데 섬의 교회들을 돌보는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절대로 디도와 그레데의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쓰레기들로 그들의 마음을 채우고도 그 부작용을 인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디도서 1장 15절을 더러움에 대한 면역을 증명하는 구절로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의 문맥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디도서 1장 15절을 신자들에 대한 경고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방식에 대해 익숙하지 않고 순전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의 악에 대해 순진한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순전한 것으로 보이나 모든 것이 실제로 순전한 것은 아니므로, 신자들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또 다른 해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신실한 신자는 사물의 선한 부분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깨끗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性)은 잘못 사용될 수도 있고 빗나갈 수도 있지만 깨끗한 마음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性)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처럼 정결함으로 사용해야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놀랍고 깨끗한 선물로 바라봅니다. 이 두 가지 해석은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확실히 부합하지만, 이들은 디도서 1장 15절 주변의 문맥을 볼 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디도서 1장 15절 주변의 구절은 어떤 음식을 먹거나 형식적으로 부정한 시기에 무엇을 먹으면 더렵혀 진다고 가르쳤던 그레데의 거짓 교사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거짓 교사들은 '할례당'(10절)이라고 불리웠는데 1세기의 믿지 않는 유대주의자들입니다. 이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명령가운데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된 어떤 신화적인 법(허탄한 이야기)을 포함시켰습니다(14절).
그들은 영적이며 거룩하게 되기 위한 수단으로 구약의 음식과 관련된 율법과 부가된 율법과 유대주의자들의 전통을 옹호하였습니다. 그들이 강조했던 것은 내적 변화의 절대적인 필요는 인정하지 않고 정결을 위한 외적인 율법의 준수만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말씀들을 완전히 무시하였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15:17-20). 마가복음 7:19의 비슷한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주 예수께서는 바리세인들에게 내적 마음의 변화의 증거가 있다면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1:41).
그렇다면 "깨끗한 자"는 회심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통해 내적 마음의 변화를 가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는 신성을 나누어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깨끗합니다(베드로전서 1장 4절). 비록 우리가 아직 인간의 죄성(罪性)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새로운 영적(靈的) 생명(生命)은 "깨끗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새생명으로 인해, 부정한 음식에 대한 구약의 율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예식적인 규범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폐기되었습니다.
음식에 대한 허탄한 인위적인 율법이나 먹는 것과 관련되어 씻는 예법과 관련된 규정들은 그리스도인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깨끗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소고기, 돼지고기, 생선, 또는 어떤 음식이라도, 주중의 아무 날이나, 씻은 손으로든 안씻은 손으로든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과 어떻게 먹느냐에 대해 건강과 위생과 그리스도 안의 자유 등의 이유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깨끗하지 않은 음식이나 음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디모데전서 4장 4,5절)
디도서 1장 15절의 후반부와 16절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믿지 않는 사람이 "더럽다"고 표현된 이유는 회심의 순간에 찾아오는 속마음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의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이 아니므로 깨끗하지 않습니다. 즉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요한복음 3:3)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마음과 양심이 모두 더러운" 것입니다.
허탄한 법이나 정결 예식의 준수는 불신자가 깨끗하게 되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들의 문제는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입니다. 회심시 일어나는 내면의 변화 없이는 믿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의 준수와 정결 예식이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16절은 불신자들의 행위가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얘기합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주님을 알았다면 하나님을 비방, 부인하는 일-율법과 예식을 따르는 것이 당신을 거룩하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하게 만든다고 가르치는 일-을 그만하였을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런 자세를 취하는 것은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것(16절)입니다.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관점은 너무나도 좁고 광신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라는 말씀은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되어 기록된 말씀이지 어떤 비디오를 보거나 또는 어떤 종류의 잡지를 읽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디도서 1장 15절은 그러한 쓰레기들이 그리스도인에 의해 다루어질 때 조금이라도 질이 향상되거나 그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을 읽거나 볼 때 그 악영향에 대해 어찌어찌하여 면역성이 길러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Garbage in, garbage out')는 말은 성경의 말씀이 아니지만,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정신과 관련해서도 확실히 맞는 얘기입니다.
각자의 성장 정도와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은 읽는 것과 보는 것으로 그 마음에 무엇을 프로그램하느냐에 대해 극히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디도서 1장 15절을 공부하면서 합당한 성경 해석을 위해 필요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원칙을 배웠습니다. 한가지는 개개의 성경 구절을 해석할 때 말씀이 쓰여진 역사적 배경과 주변 구절의 문맥을 조명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의 원칙은 성경말씀은 성경말씀으로 해석해야 하므로 개개의 성경구절 해석이 나머지 성경말씀과 배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에 따른 우선 순위, 데이빗 리드
원제: THE PRIORITY OF PURPOSE
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의 목적
당신의 친구 중 믿지 않는 어느 친구가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고 제안하면서, 신약이던지 구약이던지 아무거나 택해보라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당신은 어떤 책을 먼저 택하겠습니까? 아가서? 요한계시록? 혹은 레위기인가요? 아마도 요한복음을 선택할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최선의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요한복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확실히 아가서나 레위기, 요한계시록과 같은 성경보다 이해하기 쉬운 성경일 뿐만 아니라, 특별히 요한복음의 목적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구요?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요한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는 요한복음의 목적에 대해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으로 가득한 책이며, 구도자들과 함께 공부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입니다. 구도자들과 함께 요한복음을 읽고 공부한다면, 성령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구원얻는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요한복음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7가지 표적
요한복음은 우리 주님의 행하신 일곱 가지 표적을 따라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일곱 가지 표적을 아시나요? 이 일곱 가지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을 읽을 때, 그러한 목적을 마음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을 받은 기자가 우리에게 이것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도록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주목적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요한복음에 있는 수많은 "복음 구절"을 사용해서 구도자들에게 증거하게 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시는 이 사실을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론 레위기나 아가서, 혹은 요한계시록, 그 밖의 다른 성경책을 통해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의 목적은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는 구약의 놀라운 율법 책 가운데 하나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가서의 목적도 분명히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장래 일에 대한 많은 상징들을 담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 조차도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책인데, 하물며 구도자들에게는 어떠하겠습니까? 강조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비록 성령님은 성경의 어느 부분을 들어서도 사람의 마음속에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지만, 우리가 영혼을 얻기 위한 분명한 목적에 따라 우선 순위를 정해서 먼저는 구도자로 하여금 요한복음부터 읽게 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택한 일곱 가지 표적을 통해 그리스도의 자연과 질병과 그리고 죽음에 대한 절대적인 권세를 보이심으로써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 기적들은 요한의 의도를 따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하시며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심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이 모든 일곱 가지 표적들은 주님의 권세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들을 고치시며, 도우시는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적들을 통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 - 예수님의 말씀, 강화, 그리고 "나는 ~ 이다"로 표현된 선언 등은 모두 이 책의 최종적인 목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그 최종적인 목적이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입니다.
역사적인 정확성
사도 요한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내는데 있기 때문에, 요한이 선택한 일곱 가지 이적은 오늘날 어떤 (기적을 믿지 않는) 신학자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일곱 가지 "표적"들은 그 사건의 실제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공개적인 사건들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했던 A. D. 85년경에는 그 이적들을 친히 목격했던 많은 증인들이 살아있을 때였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기록했던 이적들에 대한 사실성 여부를 문제삼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만일 요한의 기록이 거짓이거나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라면 이러한 사건들의 역사성을 부인하거나, 부인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는 첫 번째 표적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 표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인데, 이것은 가나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했을법한 공개적인 혼인잔치였습니다. 최소한 600리터의 물을 매우 맛이 좋은 숙성된 포도주로 바꾼 그리스도의 능력은 몇 번의 손동작으로 하는 마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조그만 마을에서 "혼인잔치에서 일어나는 기적"과 같은 결혼식 공연을 위해 마을 사람들도 모르게 그토록 많은 포도주를 사서 숨겨두었다가 옮기는 일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성격의 엄청난 기적적인 사건을 조작해서, 금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발각될 것이 뻔한 일을 실제적인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술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기적적인 사건을 초대교회의 잘 속아넘어가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수년간 용인되다가 점차적으로 과장되어 온 이야기로 치부해 버릴 수도 없습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공개적인 사건이 후에 기록되어 널리 회자된 사이의 시간적인 간격은 너무도 짧기 때문에 후에 개정되었다거나 재구성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능한 설명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일으키신 기적에 대한 정확한 사건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써 은혜로우셔서 생명의 근본 물질인 물을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인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써 이 혼인잔치를 인정하시고 즐겁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시에 정한 결혼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를 한 몸되게 하신 것을 인정하는 하나의 인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목적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표적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부인할 수 없으며, 또 실수할 수도 없는 확고한 증거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또다른 표적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제시해주기 때문에 비평가들의 비평은 유지되기 심히 어렵습니다. 왕의 신하와 같은 공적인 사람의 아들이 즉시 고침을 받은 기적적인 이야기(요한복음 4장)를 각색했다거나 대낮에, 그것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일어난 38년 된 병자를 예루살렘 벳새다의 우물가에서 치유한 기적을 조작했다거나, 또는 날 때부터 소경되었으며, 회당에 출입하면서, 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요한복음 9장) 극적으로 눈을 뜨게 된 기적적인 이야기를 거짓되이 꾸몄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나이도 다양하고, 경험도 다른 여러 계층의 5,000명의 사람들에게 기적의 결과가 아닌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늘어난 것(요한복음 6장)으로 생각하도록 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비평가들의 비평의 문제점은 현장을 목격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기록을 알고도, 또 이러한 기적적인 일들이 초대교회의 신앙의 토대가 된 것을 알고도 그것의 허위성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의론자들이 나사로와 같이 베다니의 조그만 마을에서 죽은 지 4일이나 지난 상태에서 죽음에서 살아난(요한복음 11장) 특정 인물에 대한 기록에 대해 어떻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 당시에 주님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생각해봅시다! 요한의 기록이 거짓이라면 기적이 일어난 사건과 그것을 기록한 시간 사이의 간격이 불과 50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로 믿고 받아들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시간적인 간격 사이를 신뢰할만한 유대인들의 구두로 전해지는 전승에 의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실제적인 사실이 요한에 의해 각색되었다면, 그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에 의해, 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이든, 아니면 예수님을 배척했던 자들이건 간에 그 사람들에 의해 정정되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제자들에 의해서만 목격된 물위를 걸으신 그리스도의 기적조차도 회의주의자들이 두 가지 이유로 반대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첫 번째, 이 날 밤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갈릴리 지역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갑작스러운 폭풍과 갑자기 고요해진 이 사건이 모두 지어낸 이야기라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두 번째, 5,000명을 먹인 사건에 함께 했던 수천 명의 사람 중 누구라도 주님이 다른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셨거나, 호수 주변을 걸어서 가버나움으로 가셨다면(요한복음 6:22-25 참조) 주님이 물위를 걸으신 요한의 기록을 거부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이 기록한 이 기적에 대해 - 요한복음에서 기록하고 있는 일곱 가지 표적 중 어느 것이라도 마찬가지로 -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바로 잡고자 시도했던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성취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1,2세기의 많은 성경독자들은 요한복음을 읽은 결과로 믿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의 목적은 오늘날에도 실제적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회의주의자일지라도 요한이 기록한 그리스도의 이적적인 기사를 통해, 성령님께서는 나사렛 예수님은 역사 속에 사셨던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확신케 하는 역사를 하십니다. 요한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요한이 기록한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사건들을 믿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이름을 힘입어 새생명을 얻을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목적
반대로 요한일서의 목적은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과는 사뭇 다릅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이 구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특별히 믿는 이들에게 기록한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의 목적은 그때에나(A. D. 90년), 오늘날에나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요한일서를 읽는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하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일서의 우선적인 목적은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구도자들에게 요한일서를 첫 번째로 읽도록 권하지 않기를 바라며, 오히려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믿는 이들에게 첫 번째로 권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의심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목적에 따른 우선 순위를 자신에게 적용하여 요한일서를 먼저 읽어보면 어떨까요!
가족 앨범
요한일서는 가족 사진 앨범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가족 사진 앨범을 열어보면 도처에 여러분과 가족의 얼굴과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가족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가족 사진 중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면 여러분의 가족관계에는 무슨 문제가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방법으로 여러분이 요한일서를 읽어보면,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가족의 한 일원이라면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여러분의 구원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요한일서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며, 여러분은 자신에게 "나는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경험을 하였는가?"라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나타난 "가족 앨범" 속에서 참된 신자들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요한일서 1:8-10을 보면, 여러분이 믿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쉽게 자신이 죄를 범했으며 본질상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를 바라며, 죄를 범하는 대신에 의를 행하고 있으면, 앨범의 각 페이지마다(요일 2:4-5, 2:29, 3:6-8, 3:23-24, 5:1-3)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하나님의 가족 중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여러분은 요한일서 2:9-11, 3:14과 4:7-12에 나타난 하나님의 가족의 모든 지체들과 더불어 행복하고 사랑스런 사귐을 나누고 있는 사진들 속에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심을 고백하면 요한일서 2:22-23, 4:14-15, 5:1, 5:10-12에서 자신의 사진을 확실히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자신의 재물에 대해 이기적인 마음이 없고, 기꺼이 재물을 궁핍에 처해있는 가족들에게 나눠주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요한일서 3:17-18에서 사진이 찍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가족 앨범 속에 있는 참된 믿는 사람들의 사진들입니다. 요한일서의 "사진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찾으셨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나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3:9)나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3:10)와 같이 부정적인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했다면, 진심으로 여러분이 거듭난 경험이 있는지 체크해 보길 바랍니다! 현재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 요한일서의 "부정적인 모습"들과 일치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일까?" 혹은 "아버지와 다른 가족의 지체들과 친밀한 교제에서 멀어져 있어서, 그 결과로 가족들과 행복하게 함께 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닌가?" 요한일서의 앨범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에 따른 우선 순위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원칙
모든 성경이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처럼 그 목적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여러 차례 읽다보면 일반적으로 기자가 하나님이 그 성경을 기록하기 위해 마음에 품었던 목적이 무엇인지 드러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그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깨닫게 되면, 그후에 당신은 그 책의 목적이 드러나 있는 구절들을 해석한 대로 목적에 따른 우선 순위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이나 절의 형태가 아니라 책의 형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음을 기억합시다! 그러므로 성경책 각각의 목적을 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각각의 의도한 바를 파악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 데이빗 리드
원제: FAITH THAT WORKS
로마서 3:3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야고보서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서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모든 성경 중에서 야고보와 바울 보다 서로 모순되게 보이는 성경 저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구원의 중요한 교리에 관해서 한 기자는 어떤 사람도 공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기자는 그 사람의 선행이 구원에 한 역할을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바 의롭다함은 행함이 없이 오직 믿음만으로 된다는 것과 야고보가 말하는 바 의롭다함은 행함과 함께 한다는 말은 확실히 풀리지 않는 교리의 불일치인 것 같이 보입니다.
이 분명한 모순은 위대한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성경의 정경에서 보다 낮은 수준으로 야고보서를 여겼다는 것으로서 그 중요도가 큽니다! 몇몇 학자들은 루터의 야고보서에 대한 입장은 과장되었다고 믿고 있으나 야고보서를 '보잘 것 없는 서신서' 로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바울과 야고보는 성경 기자로 영감을 받았습니다. 바로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분명한 기자이며,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과 야고보가 이제 천국에서 신학의 서로 다른 것을 화해하고 있다고 상상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으로서 이 서신서들이 서로 모순될 수 없기 때문에 바울과 야고보의 서신들이 조화될 방법이 있습니까?
바울과 야고보가 말하지 않은 것
이 서신들의 조화를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우리는 그들이 말한 것과 정확하게 비교함으로써 영감을 받은 두 사람의 저자가 말하지 않은 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야고보가 선행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마치 50%의 믿음과 50%의 행함과 같이- 믿음과 행함이 어느 정도 혼합된 결과로 의롭다함이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음을 주시하십시오. 그가 말하는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선행이 구원받는 믿음과 분명하게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무슨 믿음이든 사람을 구원한다고 말하지 않고 구원받는 믿음이 선행의 결과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시하십시오. 그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행함은 구원의 근본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야고보와 바울의 서신이 충돌노선상의 필연적인 충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처음에는 철저하게 모순되게 보일지라도 진실로 정반대 되는 의견도 아니고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것도 아닙니다. 야고보와 바울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보다 상세하게 말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는 관점이 중요합니다.
질문: 동시에 정사각형과 정삼각형으로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순간오답 :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물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깊고 올바른 대답 : 피라미드입니다! 한면 -지면에서 보면 그 것은 삼각형으로 보입니다. 위에서- 공중에서 보면 그 것은 정사각형입니다.
위의 묘사가 우리들을 바울과 야고보의 말을 보다 더 이해하게 합니다. 야고보와 바울이 구원받는 믿음에 대해 기록했을 때 서로 모순되고 있지 않습니다-단지 그들은 다른 관점에서 믿음을 본 것입니다! 바울은 위에서부터 보았고 -신성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각 사람의 믿음의 질을 그 결과를 보지 않더라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믿음의 질은 선행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 것에 의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한편 야고보는 땅에서 -인간의 관점에서- 믿음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할 수 있듯이 사람의 심장을 볼 수 없습니다만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의 삶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선행으로 그 믿음의 고백을 증명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받는 믿음은 보여지는 투시도에 그 믿음이 어떻게 정의되는 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믿음의 두 가지 정의가 서로 상반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믿음의 두 가지 정의가 서로 상반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받는 믿음이 행함과 관계없는 믿음이지만 사람의 관점에서 믿음이 사람이 볼 수 있는 선행이 따르는 믿음이라면 구원받는 믿음의 정의에 있어 "관점의 차이"가 필수적으로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예
야고보와 바울이 둘 다 예로서 아브라함을 인용한 것은 확실히 이 구절의 조화에 있어 중요합니다. 바울의 요점은 그가 할례(순종의 행위)받기 전에 그리고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 4: 2-3).
다른 한 편 야고보의 요점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행위로 완전하게 혹은 인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으니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야고보2: 21-23).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나님이 선언하도록 한 결과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세밀하게 주의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창세기 15:6에서 의롭다 여기심은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믿음의 행위가 있기 30여년 전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야고보가 정밀하게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2:23)에서 말하고자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고보와 바울 사이의 모순 점은 정말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그를 의롭다고 하기 위한 본질적인 장점의 어떤 종류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의 진실성을 인정하거나 명백하게 하기 때문에 필수적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은 위한 어떠한 행함도 있기 오래 전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다 것은 바울과 야고보의 마음 가운데서 분명한 요점입니다.
바울에게서 더 자세히
바울이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 말해야 했던 것을 고려해볼 때 그가 다른 서신서에서 그가 기록했던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갈 5:6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야고보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어째거나 바울은 선행을 반대합니다! 구원받는 요소로서가 아니라 구원받는 믿음으로서 증거를 나타내야만 한다는 것은 옳습니다.
우리가 행위로 인한 구원의 잘못된 가르침의 증거구절로 알려진 에베소서 2:8-9을 올바르게 인용할 때 또한 바로 다음 구절을 바울이 기록했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도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2:10). 분명하게 바울은 선행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의 로마서의 목적은 선행을 근거로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어떠한 사람의 생각도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공로를 얻기 위해 해야 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야고보에게서 더 자세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관한 다음 구절은 야고보 혹은 바울의 소리처럼 들립니까?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마치 로마서의 바울 사도의 그것처럼 분명하게 들리죠. 그렇죠? 아닙니다! 이 구절은 야고보서 1:18절의 야고보의 기록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한 야고보의 강조가 공로로 구원을 얻는 공로구원을 의식한 것이 확실히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관하여 말한 것을 생각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2:25)의 생(生)으로부터 야고보가 예를 든 행위는 결코 선행이 아닙니다! 믿음을 빼면 이 행위는 살인 기도죄(아브라함)이며 반역죄(라합)입니다! 이 행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행, 집 없는 자를 도와주고 화목을 도모하는 것과 같은 것과 전혀 다릅니다.
믿음을 빼면 아브라함과 라합은 전혀 선행으로 인정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의 행위"는 인정받을 만한 선행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라합의 선행에 믿음을 더하는 것은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의 요점은 그들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위가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이미 있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비록 아브라함과 라합이 사회적, 종교적 전혀 다른 배경에서 언급되었더라도, 그들 둘은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는 믿음의 증거로 그들의 가장 가까운 것- 각각 가족과 조국을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야고보가 믿음과 행위에 대해 어떻게 논쟁을 시작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야고보서 2:14). 다른 말로 누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고백은 단지 말뿐인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사람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은 분명하게 "아니오"로 울려 퍼질 것입니다. 단지 지적인 동의의 믿음은 야고보서 2:19에서 말한 것처럼 귀신들의 믿음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확실히 그러한 종류의 믿음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믿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야고보는 그 질문에 답합니다. 그것은 순종의 행위로 그 자신을 진실하다고 보여주는 믿음인 것입니다. 행위 그 자체는 의롭다함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의롭다함에 필수적인 종류의 믿음의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머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단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머리와 마찬가지로 그의 마음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행위"로 그 자신을 증거했습니다. 그 행위가 그들을 구원하지 않습니다만 그들은 진실되고 구원받는 믿음의 확고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복음을 위한 접근
바울과 야고보에 의해 제기된 '믿음/행위'에 대한 의문의 다른 접근이 오늘날 다른 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는데 좋은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기 위해 공을 쌓아야 한다거나 천국에 가기에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에게 로마서의 진리를 나눌 수 있습니다. 구원은 행위와 별개입니다!! 다른 한편 "느슨한 생활"을 하는 개인이 "모임이 나가고", "손을 들거나"혹은 그들이 어렸을 때 복음 전도단에서 "회원으로 등록"했기 때문에 그들이 천국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과 함께 야고보의 진리를 나눌 수 있습니다. 순종의 삶으로 그 자신을 증명하지 않는 믿음은 미심쩍습니다. 왜냐하면 행위을 뺀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야고보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충돌부분은 단지 겉부분일 뿐입니다! 영감을 받은 기자로서 그들의 말은 일치됨이 분명하며 그들이 일치시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의롭다함은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 홀로만 됩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홀로 있는 믿음만은 아닙니다. 선행은 구원의 길로서 믿음을 동반하지 않습니다만 구원의 증거로서 믿음을 동반합니다. 구원받는 믿음은 죽은, 지적인, 비활동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진실로 구원받은 믿음은 순종 행위가 따르는 믿음입니다! 구원받은 믿음은 행위가 따르는 믿음입니다.
바람에 투자하면, 데이빗 리드
원제: INVESTMENT IN WIND
호세아 8:7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것이라"
호세아 12:1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여러분은 바람에 투자한다는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바람을 팔고자 가판대를 설치해놓고 호객행위를 하는데, 그 줄에 서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의 정신을 의심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어쩌면, 어쩌면 ... 여러분도 바람에 투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여러 가지 활동들이 마치 흘러 넘치는 물항아리에 손을 넣어 한 움큼 잡았으나, 손을 펴보면 한 움큼의 공기(바람) 외에는 없는 것과 같다면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여러분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조차도 바람에 투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얻은 영원한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주 예수님을 내 개인의 구주로 믿은 순간부터 확고하며 영원히 안전합니다. 우리가 이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우는 문제(고전 3:10-15)에 관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우리가 받게 될 배당금은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안전한 곳에 투자할 수도 있고, 혹은 바람에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바람과 같이 없어질 것에 열심히 투자합니다. 당신은 혹시 바람에 투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바람에 투자했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바라고 수고하였으나 결국은 모든 것을 "불어 버린" 사람들에 대한 슬픈 기록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이방 우상에게로 배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여러차례 "투자 자문단"을 보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헛된 것에 투자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같이 소경된 상태에 빠질수 있지 않을까요? 즉 하나님의 조언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직 헛된 바람을 좇아 투자하는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 말입니다.
호세아의 예언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투자에 대한 매우 극적인 설명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비유되었습니다(호 1-3장). 호세아는 자기 아내, 고멜에 대해 사랑과 돌봄과 보호와 안전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그러나 고멜은 그러한 남편을 배신하였으며, 남편에게 신실치 못했습니다. 호세아 3장은 고멜이 매춘부의 지경에까지 떨어진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할지라도 호세아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호세아는 자기 아내의 몸값을 주고 다시 사서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은 신실치 못한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그림입니다. 이러한 자기 백성에 대해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그림은 구약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리입니다. 이렇듯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으로 인해 찬양을 올립시다.
호세아 4장에서 14장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주님에 대한 신실치 못함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슬픈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게 위해 매우 생생한 화법이 사용되었으며, 바람에 대한 비유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바람을 사용해서 세가지 은유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세 가지 모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실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고(8:7), 바람을 먹으며(12:1), 동풍을 따라가고(12:1)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바람에 투자하는 세가지 다른 측면을 서술하는 것입니다.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둔다"는 표현 속에 두 가지 법칙을 보게 되는데, 곧 추수의 법칙과 증식의 법칙이 그것입니다. 추수의 법칙에 따르면 우리가 심는 대로 거두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곡을 심으면, 알곡을 거둘터이요, 쭉정이를 심으면 쭉정이를 거둘 것이요, 바람을 심으면 바람을 거두리라는 것입니다. 추수의 법칙은 물리적인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이고 도덕적인 영역에도 적용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간과 자원과 힘을 영원한 가치있는 일에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자아 중심적이고, 우상을 숭배하며 어리석고 쓸데없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바람을 심는다"는 표현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우리도 혹시 바람을 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현재 참여하고 있는 모든 활동들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해보고, 그것들을 하나 하나 지금부터 100년 간 지속되어도 좋은 것인지 체크해보기 바랍니다. 바람에 속한 것들은 왼편에 다시 옮겨 적습니다.
우리는 혹시 새 옷이나 레크레이션, 혹은 오락 등 - 혹은 육체의 쾌락을 좇는 다른 영역들도 포함해서 - 에 우리의 시간이나 정력과 돈을 너무 많이 쓰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씨앗을 뿌리고 나서 영원한 복락을 거두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성장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 5:21)는 경고는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상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숭배했던 단지 나무나 돌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도적질해서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우상들은 단지 바람을 심는 씨앗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심는 사람은 추수의 날에 바람 외에는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증식의 법칙이란 바로 여러분이 심은 것보다 그 이상의 수확을 거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 줌의 씨앗을 뿌렸는데 수확기에 알곡으로 가득한 밭에서 수확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간의 민들레 씨앗을 뿌렸는데, 온통 "금빛 찬란한 잔디밭"을 보게 되는 것이며, 바람을 심었을 뿐인데 광풍을 거두는 것을 말합니다! 광풍이란 단지 많은 바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광풍이란 파괴적이며, 참화를 가져오는 흉폭한 바람입니다.
수확의 법칙과 마찬가지로, 증식의 법칙도 도덕적이고 영적인 영역에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에 속한 헛된 일에 우리의 삶을 투자하게 되면, 우리는 수확기에 아무런 것도 거두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황폐화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질서하고, 혼돈되고, 산만한 삶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삶을 이 세상의 바람에 투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증식의 법칙에 의하면 우리의 삶 가운데 토네이도가 오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바람을 심는 삶을 고집한다면 그 삶이 파산되는 일은 단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호세아 12장 1절에서 이스라엘은 "바람을 먹는" 것으로 그려졌습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이스라엘 모두를 위한 것이었으나 북쪽 열지파에게 직접 증거된 것입니다. 바람을 먹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은 혹시 바람을 양념으로 넣은 샌드위치를 먹어본 일이 있나요? 바람으로는 우리의 배고픔을 달랠 수도 없고, 몸을 건강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양식이 되지 못하고, 아시다시피 바람에는 영양소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상의 "부요한 삶"을 가져다주는 것들로 자기 영혼의 양식을 삼았으며, 거짓 선지자들의 말(메시지)로 영의 양식을 삼았던 것입니다.
호세아 시대나 우리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외적으로는 물질적인 번영을 이루었지만 내적으로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파산상태에 처해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님께 돌이킴으로써 영적 주림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대신 계속해서 바람을 먹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이방나라들로부터 미혹을 받았으며, 거짓 선지자들의 호리는 말로 자기 영혼을 배불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운명은 헛되고 공허하고 영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이스라엘이 걸었던 전철을 밟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바람을 양식으로 삼는 시험에 들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말은 흔히 영화나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는 "정크 푸드(형편없는 음식)"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바람 판매꾼들이 "어서 들어오라"고 목청을 높여 호객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교제보다는 세속적인 클럽이나 단체에 속하기를 열망하며, 영적인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오락과 취미생활, 혹은 여흥에 관해서는 일인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단지 바람에 속하는 프로그램들입니다. 심지어 엄청난 시간과 정력을 쏟는 우리의 연구와 경력조차도 하나님이 없다면 다 바람을 먹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충만하고 만족히 여길 수 있습니다만 장래는 과연 어떨까요? 우리가 만일 영적 성장이 멈추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혹시 우리가 바람을 먹고 주리거나 허함을 느끼지 않으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묵상해야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기를 바라고, 그 말씀을 먹는 입맛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호세아 12장 1절에는 또한 이스라엘이 동풍을 따라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풍이란 팔레스틴 사막 동쪽에서 지중해 방향으로 불어오는 끔찍하고 두려운 시로코(Sirocco) 열풍을 말합니다. 그 바람은 몹시 뜨거우며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열을 동반하는 광풍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파괴적인 바람을 피해 숨거나 도망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좇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스라엘은 이러한 동풍을 따라갔을까요? 1절의 하반절에서 그에 대한 예를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큰 권세를 가진 두 이방나라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앗시리아와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만, 동시에 앗시리아의 가장 큰 대적이었던 이집트에 기름을 수출하고 있었습니다. 이 무슨 외교정책이란 말입니까?! 안전을 위해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그것은 곧 시로코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 좇아가는 것과 같이 어리석인 일이었습니다! 평화와 안전을 위해 주님께 돌이키는 대신에,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을 결국 멸망시킬 외부 세력에 의지했던 것입니다. 앗시리아가 동풍처럼 이스라엘을 파괴시키는 일은 그리 오래 지연되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북이스라엘 왕국은 완전히 섬멸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도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외부세력"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도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요? 왜 우리는 저축을 합니까? 마태복음 6장 33절의 투자원칙이 우리에게 충분히 안전하지 않단 말입니까? 왜 우리는 그토록 긴장하고, 그토록 많이 염려하는 것입니까? 빌립보서 4장 6절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충분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안락한 삶"을 위해 그토록 많은 시간과 돈을 허비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이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충분히 무게가 있지 않나요? 아마 우리 중 대부분은 자신의 투자 정책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으며, 혹시 동풍을 좇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동풍을 따라가는 것은 결국 평강과 안전을 주지 못하며, 마침내 우리 자신을 전복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즉 영원한 가치를 주는 것이라곤 우리 수중에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았던 가장 지혜로운 사람인 솔로몬도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 후에 하나님 없는 인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이스라엘 민족은 솔로몬 왕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장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앞에서 지혜롭게 행하고, 바람에 투자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사랑의 목적, 데이빗 리드
원제: THE GOAL OF LOVE
딤전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그리스도인에게 행해지는 설교와 세미나는 무엇을 그 목적으로 삼아야 할까요? 지식? 진리? 행위? 예배? 아니면 이 모든 것일까요? 디모데전서 1:5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의 가르침과 설교의 목적은 사랑(하나님을 위한 사랑과 사람을 위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율법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 이와 동일한 것이라고 가르치며, 위의 본문은 우리의 가르침과 설교에 있어서 그 목적이 이러한 목적에 이르러야 함을 알려줍니다.
이 성경말씀을 처음 읽을 때 디모데전서 1장 5절에 있는 목적은 1) 사랑, 2) 선한 양심, 3)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 등의 삼중 목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이 문장의 구성은 의심할 바 없이 사랑이라는 한 가지 목적만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사랑은 곧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구절에 대한 알기 쉬운 표현으로 새국제번역본(NIV)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이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첫 번째로 투옥된 후 디모데에게 쓴 서신입니다. 바울은 석방되자마자, 전도 여행을 계속하였고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목자를 돕기 위하여 디모데를 그 곳에 남겨 두었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교회는 그 당시 잘 세워진 교회였습니다(이 교회가 세워진 것은 이 서신서가 쓰여지기 약 10 년 전이며, 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8-19장 참조). 그러나 교회의 질서와 기능에 관한 문제점들이 발생하였고, 사도는 에베소에서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디모데를 가르쳤습니다.
마케도니아로부터 온 것과 같이(1:3) 바울이 디모데를 격려하고, 그의 책임을 기억나게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그의 믿음의 아들에게 썼다는 사실로 보아 이 편지는 마케도니아로부터 왔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로 돌아 갈 의도였읍니다(3:14, 4:13). 그러나 한편으로 디모데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인 하나님의 집에서 스스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3:15).
이 성경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조직에 관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장로들과 집사들(3장), 교회 내에서 남자와 역자의 역할의 차이(2 장), 교회가 과부들을 돕는 것에 관한 질문(5장), 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관하여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충고할 것인가(6장), 기타 교회 질서에 관한 많은 것들. 그밖에 서신서 전반에 걸쳐 거짓 교사와 그들의 왜곡된 교리의 위험에 관한 경고들이 있습니다. 진리로부터 벗어난 교사들이 에베소에 모습을 나타냈고, 디모데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조언이 필요했습니다(1:3, 19, 4:1, 6:3, 20).
에베소 교회의 잘 구성된 조직과 기능을 붕괴시킨 것은 아마도 이들 거짓 교사들이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로 하여금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에 계속하여 집중하도록 일깨운 것이 정통에 관련된 본문에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디모데의 책임은 에베소의 자칭 교사들을 가르치고 명령해서 그들의 초점이 왜곡되지 않고, 교리의 가르침이 사랑의 궁극적인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의 가장 놀라운 관점은 (문맥이 특별히 왜곡된 가르침에 관한 것임을 볼 때) 진리보다 사랑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랑이 거짓 없는 믿음의 결과였기 때문에, 진리를 옆으로 밀어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기록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가르침과 선포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리가 아닌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단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쓰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물론 "우리의 가르침의 목적은 사랑과 함께 하는 진리"라고 쓰거나, 그와 유사하게 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종종 선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진리에 관하여 너무나 관심을 갖기 때문에, 정통 신조가 모든 그들의 가르침과 선포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 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회중이 지식으로 무엇을 행할 것인가 보다는 그들이 믿는 바의 세부 사항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믿음을 생활 가운데 나타내는 것 보다 신학의 세부항목을 더 중요시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러한 지도자들은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구절은 신학에서 세부 항목을 다루는 것이 사소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정확한 교리가 좋은 가르침과 선포의 최종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정통이 틀린 목적은 아니지만, 정통 자체만으로는 목적에 도달하기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르침과 선포의 최종 산물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그분의 명령과 원함에 대한 경배와 경건한 순종에 의하여 특성을 나타내는 삶으로 보여진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서서히 채울 것이요 우리는 연민과 배려로 다른 이들을 돌볼 것이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가르치고 선포하고 우리의 가르침의 목적에 도달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4:15-16은 또한 진리와 사랑의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가 만약 이 성경 본문을 쓴다면 우리는 16절을 다음과 같이 썼을지 모릅니다.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진리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러나 이것은 성령께서 바울에게 쓰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자양분을 위하여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적절한 몸의 성장은 반드시 동정(compassion) 뿐만이 아니라 대립도 포옹하는 사랑의 관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포되고 가르치는 진리의 목적은 지각, 신조, 그 진리에 대한 집착 등을 초월하여 있습니다. 제한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영적 성장은 올바른 교리가 목적에 도달하는데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교리가 목적인 교회를 낳을 것입니다. 올바른 것들을 믿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조가 주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하여 능동적인 사랑을 낳지 못한다면 그 가르침은 목적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로 정통인 교리는 능동적인 사랑을 낳습니다. 비정통적이거나 균형이 잡히지 않은 가르침과 대조하여, 올바른 가르침은, 단지 "논쟁"(1:4)이나 "헛된 말다툼"(1:6)이 아닌, 사랑을 낳을 것입니다. 동일한 요점이 디모데전서 6:3-5에 있습니다. "바른 말씀"(6:3)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건강하고 건전한 교리를 뜻합니다. 바른 말씀은 경건 - 단지 경건한 믿음뿐만 아니라 경건한 삶을 낳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경건에 의하여 특징지어질 때, 사랑의 목적에 도달할 것입니다. 건전하지 않은 교리는 몸을 건강하고 흠없이 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시기와 다툼과 욕설과 악한 추측과 삐뚤어진 논쟁을 낳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슬픈 문제점들이 당신의 교회나 교제 모임에서, 또는 당신의 삶에서 나타난다면 이것은 건전한 교리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디모데의 시대에, 목적에 대한 관점을 잃어버린 교사들은 믿음에 대하여 사소한 것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들(6:4에 있는 말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질문과 논쟁)을 꼬치꼬치 캘 뿐 아니라 성경을 벗어난 것들(1:4에 있는 우화와 족보)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동일한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성경 밖에 있는" 외경과 위전(僞典)(역자 주: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기록들)(고대의 비성경적 기록들)이나 또는 같은 시대의 베스트 셀러 기독교 서적 등에 관하여 가르치고 선포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것은 강한 인상을 주거나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전한 교리의 목적을 떠난 것입니다. "다른 행성에도 도덕적 존재가 있을까?" 라든가 "예수님은 목공소에서 일하시면서 잘못 측정하신 적은 없는가"와 같은 주제의 설교나 세미나로 흥취를 더하는 것은 회중을 잠들게 하지 못하게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분명히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닙니다. "락 음악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또는 "주님의 재림 일자(日字)"와 같은 부가적인 논쟁에 관한 연속 강의는 보다 많은 관중을 끌 수는 있으나 성경적 가르침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실제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매일의 음식과 같은 올바른 교리적 가르침 조차도 궁극적으로 목적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선포와 가르침은 단지 논쟁이나 헛된 말다툼(1:6), 시기와 다툼과 욕설과 악한 추측들과 삐뚤어진 논쟁으로 인도할 뿐입니다(6:4).
건전한 가르침과 선포의 목적이 되는 사랑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불순한 동기가 감추어진 사랑이 아닙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여기에는 내게 필요한 어떤 것이 있는가?", "어떻게 내가 이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와 같이 질문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우리가 쫓아야 할 구주와 본(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계속하여 높이는 가르침을 낳습니다.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은 의로우며 예수님을 닮은 삶을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대부금을 시간에 맞게 갚으며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하거나 소득세를 속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도덕적 표준에 관한 실제적인 적용은 뉘우침과 교정을 가져오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을 가져오는 선포와 같은 것입니다.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은 가면을 쓰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교회 연극을 공연하거나", 단순히 위선적인 입술로 하나님을 섬기거나, 간간이 효과 없는 성경적 생활 양식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온 마음으로 드리는 신뢰로 특징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목적과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에 관한 일관된 사역은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낳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의 책임입니다. 당신은 성장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성경적인 가르침과 선포의 목적은 정확한 교리와 올바른 생각보다 뛰어난 것이며, 그것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선한 양심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삶의 기쁨, 데이빗 리드
원제: The Joy of Living
전도서 11:9-12:1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도서 전체를 읽으십시오)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쉽지 않고, 영적인 성장도 자동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정도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혹이 있고, 우리를 극단으로 흐르게 하려는 시험도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어떤 것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조언해주는 선배 그리스도인들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 속에서 합당한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균형을 유지하면서 삶을 즐기고 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즐겁고 행복한 감정만을 좇아 살게 되면 우리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난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자신을 정죄하는데 이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것은 재미나 행복에 탐닉하고 방종하는 삶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고상한 척, 혹 너무 심하게 경건의 모양을 내고자 하면, 다른 그리스도인 친구들로부터 외면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참된 경건이란 자신에 대해서는 표준을 높게 하되, 다른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너무 고고한 삶을 추구하다보면 우리의 삶에 기쁨을 잃기 쉽고, 우리의 삶이 메마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누가 보겠습니까? 따라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합당한 균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단지 마음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한편에는 쾌락주의자가 되는 위험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삶의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합당한 태도를 견지하지 않으면 낙담과 침체의 위험이 있습니다.
전도서는 우리 삶의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대한 바른 자세를 잡아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으로 이 전도서를 읽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이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낙심과 낙망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모든 것이 헛되고 의미 없다는 것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사실, 이 전도서는 "삶의 참된 즐거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으로, 삶의 행복과 즐거움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쉽게 단정해버릴 수 없는 책이며, 쉽게 접근할 수도 없는 성경임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된 이 전도서에 대한 해석이 교회 역사를 통해 다양하게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수 차례 이 전도서를 읽은 후에야, 전도서의 전체적인 메시지가 분명하고 명료하게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의 삶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모른다면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가 헛될 뿐입니다. 그것이 공부하는 것이든, 사업을 하는 것이든, 소유를 많게 하는 것이든(잠 1:12-2:11) 상관없이 헛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없는 삶이란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익하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전도서에서 이러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소경된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사실 이러한 결론은 전도서 곳곳에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굉장한 것이 됩니다. 믿는 이는 삶 속에서 참된 행복과 즐거움을 실제로 만끽하게 됩니다. 실제로 전도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의 상급인 것입니다(2:24-26, 3:12-13, 5:18-20, 9:7-9을 보시오).
비록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허락하시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두신 우리를 향하신 뜻과 계획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서를 살펴보면 성령님이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하신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도서 3:10-11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제한을 두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사람이 이 우주를 아는데 제한이 있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예측할 수 없지만, 주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 것을 알므로, 믿는 이들은 아무 염려 없이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3:1-11).
그 이하의 본문을 살펴보면(3:12-13),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인생이 수수께끼 같고, 모순처럼 보이고, 때로는 의미없는 나날을 보내는 것 같을지라도 우리로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행복을 주시고, 그 낙을 누리도록 인도하시는 한 우리가 삶을 즐기고, 기쁨을 추구함으로 웃음과 오락을 누리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서의 전체적인 메시지입니다. 전도서의 모든 구절은 이러한 조망아래 읽고, 또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행복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상고하기 전에, 이 전도서에 대한 해석 중 하나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이 전도서의 처음 부분을 하나님이 없는 삶이란 모든 것이 헛되다는 조망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절들이 문맥이나 전도서의 전반적인 흐름과 관련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인용된다면, 전도자의 말처럼(전 1:2) 헛되이 전도서를 가르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3장 19절에서 사람과 짐승의 운명이 일반이라는 구절을 읽고나서,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성경적인 것인가요? 우리가 성경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성경은 이러한 생각을 가르치지 않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전도서에서도 그러한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도 문맥을 통해 살펴볼 때 그렇지 않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3장 17절을 보면 성령의 감동을 통해 기록하고 있는 저자도 사람과 짐승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람만이 도덕적으로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심으로써 사람과 짐승이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계시를 통해서만이 사람의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는 진리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12장 7절에서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서를 특별히 주의해서 읽어야 만이 소위 난해 구절들을 본문에서 빼내서, 전체적인 흐름과 관계없이 멋대로 해석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습니다. 시편 49편 12절과 20절을 보면 이와 유사한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전도서에서 밝히고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한 지침을 살펴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있는데, 전도서의 결론부(12:13-14)에 함께 열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며, 장래에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삶의 즐거움과 쾌락을 추구하는데 있어 명심해야 할 이것들은 사실 전도서 마지막 두 구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도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언급한 이 구절들 외에 5:1-7, 8:12-13, 11:9-10, 그리고 12:1-7을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11:9 상).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11:9 하)는 지침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젊고 또 기회가 있는 대로(11:9-10) 낙을 누리고 살 수 있지만, "너의 창조자를 기억"(12:1)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을 과도한 정욕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늙고 쇠했을 때보다(12:1-7) 젊고, 건강하고, 헌신할 힘이 있을 때 더 중요합니다. 주말에는 학업에서 손을 놓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야외로 소풍을 가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습니다. 너무 딱딱한 얼굴을 버리고, 유머와 덕담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도 좋습니다. 또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도 좋습니다. 결혼관계 안에서 부부간에 성의 기쁨을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며,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이 심판을 받거나 상을 받을 것을(고후 5:10)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을 남용하는 시험에 쉽게 빠질 것도 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지침을 따름으로써 삶의 유익한 오락이 절제 가운데 누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 가운데는 슬픔의 때와 시험의 때, 기쁘지 않은 때가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외적인 행복이나 즐거움만을 바라는 안이한 삶의 태도를 교정하십니다. 전도서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습니다(예를 들어 3:4, 7:2-4을 보시오).
성경의 모든 책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빛을 통해 읽을 때, 성경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전도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위해서 삶의 기쁨에 대한 전도서의 지침을 신약성경의 다른 교훈과 함께 상고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전도서의 전체적인 메시지가 신약성경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 6:17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한 우리가 삶을 즐길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러한 삶의 즐거움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포기하는 특권이 있음을 신약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생 그리스도인인 경우 주말에 유익하고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오락을 포기하고, 캠퍼스 전도 프로그램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인 그리스도인은 스포츠계에서의 명망과 장래를 포기하고 주님을 더욱 섬기기 위해 작은 교회의 목회자나 어려운 사역을 맡아 일할 수도 있습니다. 젊은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더욱 섬기기 위해 결혼도 포기하고, 해외선교에 자신의 일생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선물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우리는 주님이 부르셔서 맡기신 영역에서 충성되게 섬기기 위해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포기할 특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을 모르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삶의 정상적인 모습은 이러한 삶의 즐거움과 행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이에 대한 균형잡힌 삶이 요구됩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성경전체와 조화롭게 읽기만 하면, 우리가 삶을 즐겁고 유쾌하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지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실패가 끝이 아니다, 데이빗 리드
원제: FAILURE IS NOT FINAL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56-62).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행 15:36-40.
당신은 금년초에 어떤 결심을 했습니까? 그 결심들이 깨지지 않았나요? 다이어트나 운동 등의 결심들도 몇 주만에 희미해집니다. 아마 신앙적 결심들도-성경 일년일독과 같은- 잘 해내지 못하고, 당신은 훈련되지 못한 자신을 두고 낙심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희미해진 새해의 결심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큰 실패로 고심하고 있을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용서받기 힘든 일로 주님을 실망시킨 적이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죄책감이 들고, 반성하게 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절망적입니까? 우리 주님을 위한 일에 당신이 쓸모없다고 느끼십니까? 아닙니다, 희망을 가지십시요 - 실패가 끝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중에 어떤 중대한 실수라도 회복받지 못할 길은 없습니다. 실수가 정당화되거나 눈감아 줄 수는 없지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기회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실수하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아시고, 뉘우치는 자에게 자비롭게도 회복케 하십니다(시 103:8~14).
하나님은 신자의 절망적인 삶을 회복시키고 아름답게 가꾸는 놀라운 방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신자의 실수가 하나님을 위한 삶의 끝이 아니라는 많은 예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외 믿음의 조상들과 모세, 다윗, 엘리야, 요나 등 여러 믿음의 영웅들의 삶의 실수들을 상고해 보십시요! 여기서 우리는 신약속의 두 인물 베드로와 마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실수
사도 베드로의 삶 중에 잘 알고있는 얘기 중 하나는 주 예수님을 부인한 장면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베드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의아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비슷한 상황에서 더 신실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 만찬 저녁에 베드로는 그의 믿음을 확신하여, "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 할 때, 주 예수님께서 "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힘있게 말하기를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몇 시간 후에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는 주님일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막 14:71). 곧 닭이 울고, 잡히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측은하게 바라보실 때 베드로의 그 죄책감과 후회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뜰에서 나아가 심히 통곡할 때, 그는 그의 실수로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주님과 함께 있었던 자가 아니라고 부정했을 뿐 아니라, 그분을 알지도 못한다고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이 재판장으로, 또 십자가에 못박히러 끌려갔을 때, 베드로는 아마 그의 슬픔과 죄책감을 말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회복
하지만 베드로의 실수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은혜 속에 그분은 베드로를 위한 위대한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조반을 먹을 때,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의 특별한 대상이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생각과 죄책감에 대해 모두 알고 계셨고, 질문과 대답으로 어떻게 베드로를 조심스럽게 회복시키실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읽어보면, 우리 주님의 베드로에 대한 친절한 치유는 이사야 42:3 에서 주님에 관한 놀라운 구절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라고 베드로에게 묻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한 사랑이란 단어는 그리스어로 두 가지 다른 단어로 표현되는데, 그리스어로 "phileo"라는 단어는 "친절한(부드러운) 애정(사랑)" 을 가리키고, "agapao" 라는 단어는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자발적인 자기 부인(자제)" 의 의미를 포함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첫 번 째, 두 번째 질문할 때 "agapao" 단어를 사용하셨고, 세 번째 물으실 때는 "phileo" 를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세 번 모두 "phileo" 단어로 대답하였습니다. 아마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람어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아람어는 이 두 그리스어와 유사한 뜻의 단어들은 없다. 하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요한(그 대화 중에 함께 있었던)은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의 본질(실체)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이 두 그리스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베드로의 성급한 맹세(주를 부인하지 않겠다)와 그 후의 실수(주를 부인함)로 인해 그는 아마 주님에 대한 사랑을 "agapao" (자신의 희생의 의미를 지닌 강렬한 사랑)로 고백하기에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위한 계획을 여전히 가지고 계셨으며, 완전한 모사(자)로서, 주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수가 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모사)은 영향력이 컸습니다. 베드로를 하나님께서는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주님에 대한 사랑은 감옥과 죽음,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를 희생하도록 인도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셨다면, 우리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대하시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 중에 베드로의 실수와 회복을 기록함으로써 우리에게 이 놀라운 교훈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마가의 실수
요한 마가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그는 기독 초기 시대부터 사도들을 동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도망갔던 젊은 남자가 마가 자신일 가능성도 있다(막 14:51-52). 초기 신자들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에도 이 집으로 찾아왔으며(행 12장), 벧전 5:13 에서, 베드로는 마가를 믿음 안의 아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베드로가 마가를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을 인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드로와 마가 사이에 영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확실히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도 바나바는 마가의 생질(사촌)이었고(골4:10), 마가가 사도 바울에게 소개된 것도 바나바를 통해서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전역에 퍼진 흉년으로 유대에 있는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 안디옥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행 11:27-30).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으로 돌아갔을 때, 마가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전도 여행을 떠나는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습니다. 마가는 구브로 섬 사역 당시 그들과 동참했었지만 전도팀이 중앙 아시아 지역 내로 출발할 당시, 마가는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 집으로 갔습니다(행 13:13).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아마 그는 집이 그리웠거나, "아시아 독감" 같은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는 전도 여행의 어려움(고생)을 원치 않았을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사실, 앞으로 떠날 전도 여정이 강도가 들끓는 험한 산들을 지나갔어야 했습니다. 아마 그는 통솔권이 사촌 바나바가 아닌 젊은 청년 바울에게로 넘어가는 미묘한 변화가 싫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바울과 어떤 신학적 견해가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마가는 그에게 맡겨진 주님의 일과 전도단에서 물러났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이 실수가 마가의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 제외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두고 심하게 다투었고, 그 결과 두 노련한 전도자들이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중앙 아시아쪽으로 떠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어쨌든, 이전 마가의 불참(이탈)으로 두 개의 전도팀으로 나누어진 것은 마가의 실수를 정당화하거나 눈감아 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의 실수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의 회복
성경은 바나바와 마가의 구브로 섬에서의 사역의 결과를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마가의 그 이후의 활동은 그의 실수가 그의 끝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마가를 주님의 일을 하는데 제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약 10년 후 바울은 로마에서 감금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성도들과 지역교회로 권면과 위로의 편지를 썼고, 우리는 여기서 마가가 바울의 은혜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다시 한 번 바울의 전도단의 소중한 구성원임을 보게됩니다.
빌레몬서에서 마가는 바울의 개인 문안 인사에서 다른 팀들의 성도들의 이름과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몬 1:24). 골로새서 4:10 에 언급된 글에서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게 마가가 이르면 영접하라고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 풀려났을 때, 마가는 바울의 가르침 속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두 번째 로마에 갇혔을 때 쓴 마지막 편지에서 마가가 다시 한 번 언급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라고 썼습니다(딤후 4:11). 마가의 처음 실수는 단지 그의 믿음의 길에 일시적인 퇴보였습니다.
마가의 실수가 끝이 아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한 성경의 책 중에 하나를 기록하도록 그를 택하셨다는 것이며, 마가가 쓴 복음의 주제는 "온전한 종되신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위대한 주제의 영감을 받아 그분을 섬기도록 마가를 특별히 택하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패한 삶을 회복시키실 수 있다는 증거가 더 이상 필요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장래 주님의 일에서 마가를 완전히 제외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이 됩니다.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회개하는 성도들의 과거 실수를 붙들고 그들의 사기를 꺽고 낙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잘못한 그들을 영원한 "2등급 그리스도인" 이라고 간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의 형제와 자매들의 실수가 반드시 영원한 인격적 결함인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용서하시는- 성도들을 용서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인격을 매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엡 4:32, 요일 1:9). 우리는 그들을 용서하고 교제와 봉사하는 일에 회복받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실수가 그리스도와 봉사의 영역에 영원히 영향을 미치더라도 하나님은 결코 한 신자를 구원과 앞으로의 신앙 생활에서 제해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우리 신자들에게 하나님보다 더 냉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수한 성도의 신앙 회복은 영적 동료인 성도들의 중요한 역할이다. 바울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갈 6:1)라고 썼다. 그리스어로 "회복하다" 라는 단어는 "뼈를 맞추다", "그물을 고치다" 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 이것은 회복된 신자가 앞으로의 그리스도의 일에 유용할 것이라는 명확한 뜻을 지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 베드로와 마가의 삶 중 이러한 사건들을 남겨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실수없는 삶을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침륜과 의심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 눈덩이처럼 몰려오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셨다고 잘못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잘못을 용서하시는 것을 -어떤 종류의 일이든지- 믿지 않음으로 그분의 인격을 비하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예들이 용서된 잘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수가 끝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마가의 삶이 이 사실에서 더 이상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실수가 끝은 아닙니다!
예배는 생활이다, 데이빗 리드
원제: Worship is a Way of Life
막 14:3-9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마 26:6-13 및 요 12:1-8]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는 예배당에서만 가능하다" 또 "예배는 입에서 계속적으로 나오는 화려한 말들로 되어진다" 혹은 "아름답고 따뜻한 느낌이 마음에 넘칠 때 예배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는 꼭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예배의 전부라는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종합해 볼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나"에 대해 직접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이 감사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며 외형적이고 기계적인 종교적 행위로부터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감사는 입술로 또는 삶으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나"에 대해 하나님께 말로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일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감사로 인해 말이 아닌 행위로 드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조롱과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의 도덕기준을 낮추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 학생은 주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며, 그는 거룩의 기준이신 하나님께 그의 삶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이 좋지 않은 일로 여기는 일들을 분냄이나 씁쓸해 함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도 주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요구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하지 않는 예배는 불평하는 입술과 더렵혀진 삶을 살다가 주일날 아침 하나님께 드리는 입술의 기도와 찬양보다 하나님보시기에 훨씬 기쁘게 받으실만한 것입니다(이사야 1:10-17). 물론 바람직한 것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어려운 생활가운데에서도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예배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러 범주가운데 하나인 것이 아니며, 예배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전체입니다.
마태복음 14장 3-9절에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모습은 우리에게 예배의 여러 면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2장 1-8절 말씀을 볼 때 그 여인이 베다니의 마리아임을 알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10:39에서 주님의 무릎 앞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배우던 그 마리아이다). 우리는 마리아의 경배의 행동을 연구하면서 우리 자신의 예배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배는 희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배의 이러한 면은 주님께 향유를 붇는 것이 마리아에게는 큰비용이 드는 일이었음을 통해 강조되고 있습니다. 순전한 나드는 모두 인도에서 수입되는 매우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삼백 데나리온(5절)은 그 시대 보통 남자 일꾼의 일년치 삯에 해당되는 액수인데, 마리아의 예배에는 많은 수고와 희생이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예배는 나에게 어떠한 값을 치르게 하고 있습니까? 혹 그것은 전혀 희생이 없는 싸구려 향유는 아닙니까? 나의 예배는 주님을 위한 시간의 희생을 포함하고 있습니가? 아니면 자신을 위한 즐거움만으로 삼고 있습니까?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부적절하거나 엉뚱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건조하고 먼지가 많은 기후에서 손님에게 기름으로 발을 씻고 머리에 붓도록 하는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마리아가 통상 붇는 기름이 아닌 값비싼 향유로 부은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특별하였습니다. 그녀가 삼백 데나리온으로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녀는 그것을 희생하여 한 행동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모두 나타내었습니다. 일년치 봉급으로 우리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 많은 금액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 한번에 희생할 수 있는가? 입술로만 아니라 삶으로도 예배는 희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3장 15-16, 로마서 12:1).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는 우리로 얼마의 값을 치르도록 하고 있습니까?
예배는 취(取)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희생보다 한 단계 더 앞선 것입니다. 어떤 것을 희생한다하여도 반만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예배의 방법이 아닙니다. 다시 마리아의 행동을 보면, 주님은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저녁식사를 위한 손님이었습니다(아마 그는 주님에 의해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들 중의 한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식사 때 사람들은 낮은 식사테이블 주위로 등받이 없는 짧은 소파 위에 누워 몸을 발꿈치로 받치며 다른 손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일상의 모습이었습니다.
마리아, 그녀의 오라비 나사로와 언니 마르다 역시 손님이었다. 저녁식사 중에 마리아는 주님의 소파에 다가와서 옥합을 깨뜨려 열어 주님께 값비싼 향유 전부를 부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은 그것이 한 근이나 되었다고 한니다. 정말 엄청난 양의 향유입니다. 대개 나드 향유는 정제되어 기름끼가 있거나 끈적거리지 않습니다. 순전한 나드는 매우 맑으며 빨리 증발되는 휘발성 액체 향유입니다. 분명 그 집은 향유의 향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요 12:3).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마리아가 그녀의 예배 행위를 통해서 취한 것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귀중한 향유 몇 방울로 주님을 기름부은 것이 아니며, 그녀는 그 향유 반만을 사용하고 반은 남겼던 것도 아니며,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예배입니다.
8장에서 주님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의미의 원뜻은 번역상 충분히 전달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는 큰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마리아가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까지 갔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몇 방울만을 또는 반만을 행했다고 말씀하셔야 하겠습니까?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가? 나의 미래와 얻고자하는 경력에 대한 나의 계획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나는 오직 나를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 취하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가? 예배는 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결코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명의 손님들(가롯 유다와 다른 제자들-요12:4, 마26:8)이 예배드리는 마리아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행동을 쓸데없는 짓이라며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더욱 긴요하게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4-5절). 그러한 얘기는 충분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까? 일년치 봉급은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우는데 충분히 쓰여질 수 있습니다. 보통의 기름으로도 그 일을 할 수 있었을 때에 왜 그 큰돈을 한 병의 값비싼 향유에 써버렸을까요? 마리아가 그 순간의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이고 그녀는 보다 자제했어야만 했던 것은 아닌지요! 하지만 그러한 추론은 우리 주님에 의해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옹호했을 뿐이니라 잘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6절).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선한 행동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주위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찬양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을 완전한 시간낭비로 여기는 것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예배하기 위해 불쌍한 자들의 필요를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항상 있는 불쌍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항상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7절).
사실 주님의 이름으로 불쌍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것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하지만 주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 없이 단지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예배가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점에서 불균형한 경향이 있습니다. 바람직한 것은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그러한 찬양이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행동으로 항상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예배의 깊이는 8절에서 더욱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저는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장사를 준비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리아는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다른 믿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제자들보다도 훨씬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마8:31, 9:31-32). 정상적인 절차는 죽은 후에 향료와 함께 향유을 붇는 것입니다(요19:40). 마리아는 주님이 곧 그들로부터 떠나갈 것이라는 것을 깨달기에, 그래서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 장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요한복음 12장 3절은 몸에 향유를 붇는 것은 그 머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래서 마리아의 행동은 만찬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붇는 일반적인 관습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예배의 깊이가 있었습니다. 다른 손님들은 값비싼 향유의 낭비만을 보았으며, 그들은 마리아의 행동이 순간적인 감정의 흥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주님은 그것이 마음을 잘 표현한 것이었고 예배의 의미 있는 행위였던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9절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깊이의 예배입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지녔으며, 마리아에 의한 기름부음은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부여한 일이나 직분이나 행동이 무엇이든지 그 안에서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예배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학업, 사회 생활 등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말과 삶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예배가 우리의 생활이 되도록 합시다
여우를 잡으라, 데이빗 리드
원제: CATCH THE FOXES
아가서 2:15 -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아가서 전장을 읽으시오.
봄은 만물이 생동하며, 그 꽃을 피우는 시기입니다. 물론 사랑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차고 혹독한 겨울바람과 메마른 가지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따뜻하고 온화한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색채가 화려한 꽃잎이 머리를 드는 계절입니다. 생명과 사랑의 기운이 곳곳에서 느껴집니다. 실로 위대한 생명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원이나 나무숲을 거니노라면 - 만일 여러분이 특별한 사람과 함께 동행한다면, 이는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그러나 잠깐만 멈춰 생각해 봅시다! 과연 성경에서는 이러한 "봄날의 사랑"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봄날의 사랑"이란 제목은 어떻습니까? 확실히 그러한 제목은 너무도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실제로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꽃피우는 로맨스"와 같은 제목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사실 아가서 전체가 사랑과 로맨스에 관한 것입니다. 위의 제목은 사실 성경으로부터 직접 발췌한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우를 잡으라"는 구절이 사랑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교훈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이 구절은 이성(異姓) 상대를 좇아 다니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여우를 잡으러" 가기 전에 아가서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약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중에는 한번도 아가서를 읽어보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울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가서를 읽고, 또 연구해본 그리스도인이라면 아가서를 해석하는데 있어 모든 성경학자들과 주석가들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가서에는 두 사랑하는 연인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가서에는 세 사람이 관련된 사랑 이야기라고 보기도 합니다. 세 사람이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는 1,700년대 말에 등장한 것으로 비교적 교회 역사에 있어서 최근의 것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 사랑 이야기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젊은 여인과 목동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아마도 북 이스라엘 수넴 지역 출신인)과 목동은 같은 마을 출신으로, 서로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멜로 드라마의 악역"처럼 솔로몬 왕이 등장해서, 그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났습니다. 솔로몬 왕이 그 아름다운 여인의 마음을 빼앗고는 자신의 정욕을 위해, 이미 많은 첩들과 시녀들이 거하는 왕궁으로 데려다가 두었습니다(아 6:8 참조).
그러나 솔로몬 왕의 구애와 많은 부에도 불구하고, 술람미 여인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데 실패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의 마음은 여전히 자신의 약혼자인 목동을 향해 있었으며, 그 목동만을 생각했으며, 꿈도 그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목동이 자기의 연인을 솔로몬 왕의 수중에서 구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오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에게 자유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술람미 여인과 목동은 함께 자기 고향으로 가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가서를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는 솔로몬 왕이 시골처녀인 술람미 여인을 참으로 사랑하게 된 이야기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솔로몬 왕은 자기 나라의 북쪽을 여행하는 중에 이 아름다운 처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영지에 속한 포도원을 돌아보는 여행이 아니었나 추측이 됩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이 돌아보는 중에 가족의 포도원 가까이에서(아 1:6) 일하고 있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이 곧 "신데렐라"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왕은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서 술람미 여인을 자신의 왕궁으로 데려가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목동으로 변장을 하고는 술람미 여인과 사랑의 관계를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그 계획이 적중했습니다!
따라서 솔로몬은 자신의 신분을 술람미 여인에게 드러내고, 그후 그 두 사람은 결혼을 했습니다. 물론 솔로몬 왕은 결혼에 드는 비용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혼예식의 모든 과정 하나 하나가 아가서 3장 끝에서 보는 것처럼 너무도 화려하고 장관이었습니다. 결혼예식은 4장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결혼예식은 5장 초반부에서 마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왕궁이고, 많은 하객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솔로몬 왕과 신부사이의 사랑은 더욱 깊어만 가고, 아가서 나머지 부분을 통해 살펴볼 때, 더욱 성숙해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끝은 "그러므로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가서는 어떤 동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가서는 비록 시의 형태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 한가지 예로 5장에 보면 두 사랑하는 연인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7장 후반부와 8장 초반부에는 술람미 여인이 왕궁에서의 공인으로서의 삶에 어려움을 겪은 일이 나타나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 왕에게 자신이 자라온 고향으로 가서 단순한 삶을 살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아, 사회적인 예절과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금기사항들, 그리고 원할 때 남편에게 입맞출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긴 - 오라비처럼(아 8:1 참조) -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은 더욱 성숙해갔습니다. 두 부부의 사랑은 많은 오해를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사소한 일들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침식당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혹은 주시는 우리와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 -우리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우리의 특별한 사람에 대한 사랑 -을 위해 수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작은 여우를 잡는" 일이 중요하게된 이유입니다.
아가서에서 여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중에 하게 된 이유는 만물의 아름다움이 처처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언덕을 어느 봄날 걷게 되면서부터입니다(2:10-13). 두 연인은 서로 화해하면서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고, 이제 그 아름다움을 그 무엇으로도 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새로이 꽃피는 로맨스 뒤에는 여전히 잠재적인 문제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제들이 작은 여우에 해당합니다.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망쳐놓고, 사랑의 감정을 잠식시키듯, 성숙하는 사랑의 관계를 사소한 문제가 그 관계를 훼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은 여우"들은 반드시 잡아야 하고, 더 이상 훼손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작은 여우"들은 항상 우리가 사랑의 관계를 발전시키려고 할 때, 우리 주변에서 맴도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사랑의 관계를 예를 들어봅시다. 모든 일이 순조로워 보일 때, 게으름 -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규칙적인 기도시간을 방해하는 - 이라고 하는 "작은 여우"가 나타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특별히 택하신 우리의 사랑하는 특별한 사람(연인, 혹은 부부)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불필요하게 관계를 깨뜨려서 그 아름다운 관계를 훼손시키는 "말을 실수하도록 하는 작은 여우"는 어떤가요? 실제로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찢는 비록 작지만 질투심이나 오해의 "작은 여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편에서 작은 여우를 잡고자 하는 행위가 없다면, 작은 여우들은 어른 여우가 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의 포도원을)먹어치울 것입니다.
이러한 교훈은 아가서에서 뽑아낸 것인데, 실제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교훈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우를 잡으라"는 구절이 다른 뜻으로 해석될 때에도(어떤 사람은 이것을 낮잠을 자고 있는 술람미 여인을 오빠들이 깨우고 나서, 문자적인 의미로 가족 포도원을 여우로부터 지키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함),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랑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사랑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많은 교훈이 그 속에 담겨있습니다.
아마도 이 아가서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교훈은 "성"이란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성(性)이란 터부("no, no")의 대상이거나 인류를 번식하기 위한 수단만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육체적인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성경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안에서 누리는 성(性)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옛날 랍비들은 히브리 소년들에게 나이가 30세가 되기 전에는 아가서를 읽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소년들이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일에서 삶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가서는 성에 대한 건강한 생각을 갖도록 하고, 사랑과 결혼의 고결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깊고도 놀라운 사랑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아가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그리는 아름다운 밑그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그 신부 사이의 사랑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반영하도록 정하셨습니다(엡 5:31-32). 여러분이 결혼하기로 결심한 때로부터 여러분의 결혼을 통해 우리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놀라운 비밀을 드러내도록 정해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결혼은 수고로운 많은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잡아야 할 많은 "여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결혼생활을 살펴보도록 권하시는 이 메시지를 흐리는 "작은 여우들"을 그냥 방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활한 작은 여우들은 비록 잡기에 수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영역은 바로 사랑의 관계가 성숙되는 곳에 한정되어 있는데, 부지런히 애쓰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될 때, 그 일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영적 리더십, 데이빗 리드
원제:Spiritual Leadership
에스라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영적 리더십은 군대의 리더십이나 정치적 리더십, 혹은 회사의 리더십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영적 리더십이 이와 같은 류의 리더십과 공통점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모든 유형의 리더십에는 공통점이 다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군대의 리더십, 정치적 리더십, 그리고 회사의 리더십의 좋은 자질들은 주님께 헌신되어 사용되어질 때,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 리더십은 비록 헌신될 지라도 이러한 자연적인 특성이나 달란트 그 이상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공적인 사업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성공적인 영적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이 회사나 조직을 탁월하게 이끌지라도, 혹은 유력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교회의 일이나 주의 사역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탁월한 인도자가 된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이에 대한 이유로는 영적 리더십에 대한 추가적인 통찰이 필요합니다. 영적 리더십은 자연적인 자질 그 이상이 요구됩니다. 영적 리더십을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특성은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영역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리더를 알아보고, 그들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성공적인 리더십에 대한 성경적인 기준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처한 문화적인 개념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영적 리더에 대한 많은 본보기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에스라는 이에 대한 귀감이 되는 인물입니다. 성경 중에서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에스라서의 7장에서 10장을 보면 그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데, 에스라는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과 달란트가 주님의 일에 완전히 헌신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능력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책임이 함께 어우러진 인물로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등장하는 중요한 유대백성들의 지도자 세 사람 가운데 에스라가 영적 리더십에 있어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스룹바벨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백성들을 인도한 인물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백성들을 인도한 사람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의 영적 부흥을 인도한 사람입니다. 이 몇 개의 장에서 에스라의 영적 리더십에 대한 영감된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영적인 리더로 사용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몇 가지 통찰력을 얻게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된 사람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에스라의 제사장으로서 배경과 그가 받았을 훈련을 생각해볼 때(스 7:1-5), 에스라는 제사장의 직무에 헌신되었을 것이지만, 그보다도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자신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히브리 학사들은 두루마리 성경을 필사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자신을 드렸습니다. 말씀에 대한 에스라의 헌신은 에스라서 7:10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스라는 주님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그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는 일에 뛰어났음이 분명합니다(스 7:6). 참으로 이러한 자질이 오늘날 필요한 영적 리더십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준행하고, 그 원칙들을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는 일에 자신을 드린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고 적용하는 일이 몸에 배려면 주일학교에서 배우는 성경공부나 "경건시간"에 성경을 읽는 분량, 그 이상의 성경연구가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는 헌신된 마음이 필요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금 당장에라도 영적 리더로 택하실 수 있겠습니까?
에스라는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기는 잘하지만 실제 행하기는 더디합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에스라는 모든 일에 대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기나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안전한 여행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에스라의 기도에는 어린 아이들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구하는 것도 포함시켰습니다(스 8:21). 확실히 먼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 여정의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여행 가방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매일의 삶의 일상적인 것, 그 이상을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도덕적인 삶에 대해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에스라는 자백과 함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스 9:5-15).
비록 에스라가 그러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에스라는 겸손하게 그 민족적인 죄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그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영혼을 쏟아놓았습니다. 에스라의 기도의 삶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애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영적 리더로 택하는데 조건이 되는 인격적인 부분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자질이 있습니까? 이러한 에스라의 본이 백성들을 어떻게 회개로 인도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10:1). 영적 리더들에게 에스라의 기도생활이 더하게 되면 오늘날에도 그 동일한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과 함께 일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리더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능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점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을 위에서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방향으로 가도록 백성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레위인 중에서 아무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을 때,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레위인들을 얻는 훌륭한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100여년전 느부갓네살 왕의 침략에 의해 황폐화되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긴 여행길에 오른다는 것은 바벨론에서의 편한 생활과 사업과 재산 그리고 친척들, 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떠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갔을 때, 다시 "부를 얻을 수 있는 전망"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 고된 노역에 참여하는 일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은 주님의 집에서 제사장들을 도와 섬기는 일에 책임이 있는 이스라엘의 지파였습니다. 그러한 레위인들이 바벨론에서의 편한 생활을 버리고 굳이 예루살렘에 돌아갈 무슨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에스라는 250여명의 레위인들을 바벨론에서의 편한 삶을 버리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집을 섬기도록 감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것이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능력입니다! 그와 같은 영적 리더십이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섬김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섬기도록 격려하는데 특히 필요합니다.
에스라의 백성들과 더불어 일하는 능력에 대한 또 다른 증거는 "융통성 있는 굳은 마음"에 있습니다. 이 말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도덕적인 문제에 직면했을 때(9:1-4), 죄를 묵인하거나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크게 범죄했으며, 반드시 엄중한 처리가 있어야 함을 분명히 했습니다. 동시에 에스라는 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융통성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에스라는 스가냐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10:2-4). 오늘날 양무리의 제안에 결코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영적 리더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한 방법이나 절차 등에 대해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에스라로부터 융통성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에스라의 융통성있는 굳은 마음은 예루살렘 광장에 백성들이 모였을 때 또다시 나타났습니다(10:9). 이방 여자와 통혼한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성경적인 표준을 계속해서 지키려는 에스라의 굳은 마음이 피력되었습니다(10:10-11). 그 이유에 대해 귀를 기울이려는 에스라의 융통성도 보입니다(10:12-15).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으며, 일을 바로 잡기를 원했으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더군다나 큰비가 내리고 있었고 무척 추운 날씨였다. 에스라는 사실 비가 오건 오지 않건, 문제를 즉시 처리하도록 내모는 경직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 리더는 너무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고, 해명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마냥 재촉하는 사람들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일할 수 없으며, 따라서 좋은 영적 리더가 될 가망이 없습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이 마음으로 회개하였으며,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에스라는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일을 바로 잡힐 것으로 확신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10:16-19).
에스라의 재물(money)에 대한 자세는 그의 영적 리더십에 있어서 중요한 특성 중 하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에스라 시대 이후에 많은 영적 리더들이 돈에 대한 일에 실수함으로써 낭패를 보아왔습니다. 에스라가 두 가지 위험스러운 극단을 피했음을 살펴보면, 하나는 에스라가 자신을 돈에 가까이 하는 것을 피함으로써, 돈에 대한 "실수나 유혹"을 받지 않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12명의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관리하도록 책임을 부여했습니다(8:24-30). 이 재원(財源)에는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받은 자원제와 바사 왕인 아닥사스다 왕의 예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7:11-20). 에스라서 7:18에서와 같은 제안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가 혹시라도 그 재물에 손을 댈까 염려스럽습니다. 영적 리더로서 에스라는 재물을 직접 관리함으로써 생길지도 모르는 잠재적인 문제들을 피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에스라는 재정적인 일에 완전히 자신을 제외시키는 극단을 피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돈이란 철저히 계수되어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야 함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8:33-34). 영적 리더들은 자신이 맡은 재정에 대한 회계의 기록을 유지해야 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교회와 그 사역의 재정문제에 있어서, 돈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일도 영적인 일이라는 사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두 가지 극단을 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재정에 대한 균형잡힌 사고를 지니는 것은 건강한 영적 리더의 표식입니다.
에스라서의 이 몇 장을 여러번 읽고 묵상해보면, 에스라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스 7:6,9,28, 8:18,22,31) 받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능력을 주시지 않고 영적 리더십을 맡기는 법이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영적 리더십이란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책임이기 때문에,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선한 손이 여러분을 도울 것으로 확신해도 좋습니다.
완전한 종의 본, 데이빗 리드
원제:The Model Servant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1-4)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확실히 중요하고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 중대한 영역에 있어서 균형 잡히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섬겨야 하는가?" 또는 "내게는 무슨 사역이 최선인가?"라는 질문들은 그리스도인의 섬김에 대해 흔히 제기되는 것들입니다. 합당한 균형을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요구됩니다: "내가 좋은 종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이 쓰시는 종이 될 수 있는가?" 사실 이러한 질문들은 먼저 우리가 주님을 위한 봉사에 있어 어디에서 그리고 무엇을 통해 섬길 것인가를 살펴보기 전에 숙고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종의 모델이십니다. 주님의 지상 사역의 기간 동안 주님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보면 주님은 야망에 찬 제자들에게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종의 도(servanthood)에 관한 모든 질문들은 우리 주님의 본을 살펴봄으로써 설명되어집니다. 주님은 완전한 종이셨고,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십니다.
주 예수님의 종의 성격을 분석함에 있어 살펴보아야 할 많은 성경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전체는 완전한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는데, 마가복음을 이러한 전망을 가지고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따라야 할 종의 정신과 태도에 대한 풍성한 통찰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연구의 대상은 이사야서의 메시야-종의 장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메시야가 종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구약 성경들은 메시야가 위대한 선지자, 위대한 제사장, 그리고 강력한 왕으로 오신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가 또한 겸손한 종으로 오신다는 예언을 더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자기 종으로 부르셨으나, 이스라엘은 주님을 배신함으로써 그 특권적인 신분을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종종 하나님의 종으로 언급하였으나(41:8, 42:19, 43:10, 44:1, 45:4 등을 보라), 이사야는 종의 역할이 개인 - 메시야 -으로 대치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이 "이방의 빛"으로 삼을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메시야이시며,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분도 메시야이십니다(사 49:5-7). 메시야가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생각은 유대인들에게 너무도 놀라운 것이어서,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이 진리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정통적인 유대교에서 메시야에 대한 개념은 나사렛 예수님과 같이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납득하지 못합니다.
이사야에서 종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장은 이 예언서를 둘로 양분하고 있습니다. 종의 장들은 42장에서 시작되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곧 하나님의 종이 백성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속죄제물이 되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53장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메시야 부분은 때때로 이사야서의 네 개의 "종의 노래"로 언급되는데,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노래는 이사야 42:1-9, 두 번째는 이사야 49:1-13, 세 번째는 이사야 50:4-11, 그리고 네 번째는 노래는 이사야 52:13-53-12입니다. 종의 노래는 종의 성격과 사역에 대한 다양한 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종의 노래의 시작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완전한 종의 주요한 성격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것들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 섬김에 있어 유용하게 되고자 한다면, 우리 안에서 개발될 필요가 있는 도덕적인 자질들입니다.
본이 되는 종(model Servant)의 주요한 성격은 이사야 42:1-4에 나타나 있으며, 다음의 "하나님에 대한", "자기에 대한", "사람에 대한", "세상에 대한" 네 가지 면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구절에서 우리는 본이 되는 종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각 구절이 보여주는 것은 인자이신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완전한 의존적인 관계를 통해 종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은 특별히 택함을 받았고,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 도우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 종은 유일하게 택함 받은(the chosen Servant) 종이십니다.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의 성령이 그 위에 능력을 더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공의를 세우는 메시야의 사역은 세상의 위대한 지도자(그런 사람 중에 바사왕 고레스가 있는데, 그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종의 노래 속에 여러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4:28-45:5을 보라면, 고레스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상태에서 고토로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사용하셨으나, 그는 결코 공의를 세우거나 하나님의 율법을 세상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비록 고레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목자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종"으로 불리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호칭은 장차 하나님의 겸손한 종으로 오실 메시야, 곧 고레스와 같은 강력한 세상 지도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메시야를 위해 간직되었다)들의 실패하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살펴보고 싶은 것은 성령의 "충만(success power)"이 오늘날 우리가 완전한 종의 본을 좇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의 섬김에 있어서 매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자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일하는 것을 만족히 여기고, 홀로 섬기고자 작정합니다. 완전한 종의 모든 행함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었으며, 그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것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요? 이러한 칭찬은 완전한 종에게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받으실 때와 변화산상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17:5)는 아버지의 칭찬을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종의 본이신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한 순종과 복종에 있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과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과는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또 우리와는 얼마나 대조적인지요! 우리의 헌신이 약해지고 흔들릴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보다는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명예를 위해 행하곤 합니다. 우리는 왜 개인적 헌신의 삶보다는 우리의 대중적 이미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일까요? 아아, 우리의 섬김이 완전한 종의 본을 따라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 바뀌길 바랍니다!
이제 2절에서 우리는 본이 되는 종의 특징 중에 "자기에 대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장차 오시는 종은 많은 사람들을 소리 높이거나 극적인 대중 연설을 통해 자기에게로 이끌지 않으십니다. 그는 크게 외치거나 나서지 않고 온유한 성품으로 말씀하십니다. 그의 사역의 고요하고 삼가는 방식은 용기나 사명감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내기 위한 뜻이 전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엄청난 무리의 사람들을 섬기실 것이지만 인기나 겉치레, 혹은 허세 따위에는 전혀 안중에도 없으실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자주 무리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신 것을 설명하면서 이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마 12:18-21을 보라). 완전한 종으로서 주님은 뭇사람의 이목과 인기를 피하셨습니다.
우리와는 얼마나 다르신가요!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 사람의 이목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기가 쉽습니다. 사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섬긴 우리의 봉사나 업적이 각광을 받아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물위를 걷거나 혹은 떡 몇 덩이로 많은 무리에게 먹일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할지 상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본이 되는 종의 자기 겸손의 모습은 그 능력과 영적 은사를 그분의 사역기간에 사용하심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 본이 되는 종의 자기를 드러내려하지 않는 겸손한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온전한 종의 자기 겸손의 본을 따른다는 것이 언제나 격렬한 대중과의 논쟁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에게 행한 행동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요 2:14-16). 그러나 만일 이러한 정면대립이 주님의 종으로서 주요한 특징이 아니었고, 또 우리가 주님의 본을 좇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과는 거리가 멉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거리나 골목에서 복음을 들고 나가 크게 외치는 종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속적인 복음 전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도록 하시는 많은 사람들 -예를 들어 회사 동료나 학교 친구, 옆집 사는 이웃, 혹은 해외 여행길에 우연히 비행기 옆자리에 앉게 된 사람 등- 과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나누는 종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거리에서 복음을 외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끌게 하기 쉽습니다! 종인 우리들이 복음 메시지를 거리에서 살아냄으로써 - 즉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삶으로써 -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되면, 더욱 겸손하고 우격다짐식이 아닌 본이 되는 종의 모습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본이 되는 종(model Servant)의 "사람에 대한" 특징이 있습니다.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에 대한 두 가지 모형은 우리 주님의 사람을 대하시는 은혜로움과 인자하심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한 갈대는 별로 가치 없어 보이고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정상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러한 상한 갈대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집어 내팽개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사람들을 대하시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에게는 어느 누구도 무가치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주님의 동정의 대상이었고,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꺾는 일 - 물리적이든 영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 이 없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은 연약하고 깨어지기 쉽고, 쉽게 마음 상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시간을 내어 이러한 볼품없고 꺼져가는 불빛을 돌보아 다시 힘을 얻는 일에 애쓸 까요? 주님이 상한 갈대와 같은 사마리아 여인(요 4장)과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니고데모(요 3장)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상한 갈대와 같고 여러분의 믿음이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지 않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너무 상해있고, 또 여러분의 믿음은 거의 꺼져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너무 기진해 있고, 그 어떠한 그리스도인의 섬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조차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이 되신 종은 아직도 상한 갈대를 치유하고 꺼져가는 등불을 소생케 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의 부드럽고 온유한 손에 자신을 의탁하고, 주님의 인자하신 돌보심을 경험한 우리들은 반드시 우리가 다른 동료 종들과 다른 상처받은 사람들을 대할 때 주님의 본을 좇아야 합니다.
4절에서 우리는 본이 되는 종(model Servant)과 "세상에 대한" 관계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장차 오시는 종이 세상의 압력에 의해 "낙담하거나 쇠하지 아니하는 것"을 봅니다. 이 두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상하다"와 "꺼져가다"는 3절의 단어와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완전한 종이신 주님이 상하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세상사람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을 도우실 것이지만, 주님은 결코 상하거나 꺼져가는 등불과 같이 되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의 낙담케 되는 일이나 낙심케 하는 일, 그리고 악한 세력은 결코 주님의 사역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신 이 종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인가요!
겸손한 종이 장차 임하실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이 세워지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께서는 비록 그 결과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지만, 인내 가운데 하늘의 원칙을 전파하시고 그에 따라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 이 구절에 약속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고레스와 같은 세상 지도자들은 자기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승리로 영화를 뽐내다가 이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지만, 그러나 온전하신 종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이 땅 위에 굳게 설 것을 바라며 사셨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부활하신 주님은 곧 이 땅을 통치하시기 위해 다시 오십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의롭고 온전한 율법이 굳게 세워질 뿐만 아니라, 큰 기쁨 가운데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수고하신 열매를 바라며 지금까지 하늘에서 기다리시는 우리 주님의 인내를 생각해보십시다.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합당한 종의 태도가 있습니다. 섬기러 오신 우리 주님의 "세상을 위한" 결과가 즉시 나타나지 않고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본을 보이신 완전한 종의 본을 좇기만 합시다.
의의 길, 데이빗 리드
원제:PATHS OF RIGHTEOUSNESS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을 과연 알 수 있을까? 이러한 주제에 대해 이미 많은 분들이 설교하고 글을 썼기 때문에, 또다시 거론한다는 것은 어쩌면 시간낭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주제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하는 느낌은 들지만, 다시 한번 다루고자 합니다.
잠언 3:5-6절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주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지도하실 것이라는 약속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좇아야 할 인생 길을 미리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이 구절이 과연 한 개인에 대한 특별한 인도하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일까요? 우리의 "길을 지도(평탄케)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사는데 있어 장애물을 제거해주시겠다는 주님의 선하신 생각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straight paths)"는 구절을 일반적인 인도하심이나 삶의 길에 놓인 여러 가지 장애물을 제거하심에 대한 것으로 분별하는 것이 다른 성경의 빛으로 이 본문을 조명하여 볼 때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는데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삶에서 여러 가지 장애물을 제거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도하심으로써 어떤 특별한 장애물로부터 "길을 평탄케" 해주시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바가 아닙니까?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를 돌보시되, 일반적으로 경건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격려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삶의 길에서 가장 좋은 길로 우리를 특별히 인도해주실 수는 없단 말입니까?
시편 23편 3절에 보면 이와 유사한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즉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나의 삶에 있어 특별한 인도하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인도하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요? 시편 23편 전체를 살펴보면, 일반적인 인도하심 그 이상의 약속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데 있어, 양을 내어놓고 일반적으로만 인도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양무리 앞서 가시도 하고, 좋은 목초지를 택하여 그 길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이 시편 23편은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이 자기와 목자되신 주님과의 관계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자들은 항상 온 양무리를 인도하는데, 다윗은 "(그가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다윗은 목자와 양무리에 대한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개인에 대한 인도하심에 대해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주 예수께서 자기 양을 개인적으로 돌보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요한복음 10장 3절의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택하신 "의의 길"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받는 삶이며, 이것은 주의 모든 양에게 동일합니다. 예를 들어 의의 길은 결코 음행이나 간음으로 인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의 길은 결코 과식하거나, 폭언하거나 속이는(학생의 경우 컨닝하거나 컨닝 페이퍼를 만드는 등) 곳으로 통행하도록 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길에 나타나는 표지판은 성경에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주 안의 지극히 작은 양이라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나에게만 적용되고 다른 주의 양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을까요? - 예를 들어 대학에 진학할 것인가, 또는 직장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결혼할 것인가? - 하는 특정한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삶에 있어서 이러한 부분을 하나님이 미리 예정하셨을까?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학 선택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대학들이 있습니다. 그 대학이 기독교 대학이건 세속적인 대학이건 학교를 마치고 나면 "직업도 구해야 하는" 현실 상황에서 모든 대학이 여러분의 그리스도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고 또 도전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바로 여러분에게 가장 합당한 수업 환경과 룸메이트와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 상대를 미리 아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고, 여러분의 재능과 영적 은사를 통해 주님을 섬기는데 그것들을 사용할 가장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주목하시고, 이 모든 상황을 헤아리면서, 여러분에게 합당한 대학을 선택해 주시지 않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위해 가장 좋은 의의 길로 인도할 대학을 하나님께서 택해 주시도록 맡기지 않겠습니까?
직장을 구하는 문제도 대학 선택의 문제와 동일합니다. 세상에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고 성공하게 하는, 그리고 여러분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많은 직업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직장을 결정해주시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엡 1:11) 하나님은 여러분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여러분의 현재 그리고 미래의 영적인 상태와 영적 성장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 유용성을 고려하여 가장 이상적인 직장으로 인도해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현재의 능력과 잠재력 그리고 단점과 연약함에 대해 모두 아시는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역사의 모든 사건과 상황을 주관하십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합당한 직업이나 직장은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에 따라 합당한 때가 되면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혼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에게 아내나 남편에 대한 성경적인 조건에 합하는 많은 그리스도인 남녀가 있지만, 이 모든 남녀가 여러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합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과연 여러분의 부족한 부분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배우자를 알고 계실까요? 물론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인지 가장 잘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누가 여러분에게 가장 합당한 배우자인지, 또 언제가 결혼하기 가장 좋은 때인지 알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서 하나님의 구약 백성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 백성을 위해 장래에 소망을 주는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도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선한 계획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 그 이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돌아올 것에 대한 상세한 계획(예레미야 29장 본문 참조)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상세한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의의 길로 행하기 위해 일반적인 선한 계획 그 이상을 마음에 두신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것을 낱낱이 헤아리십니다. 모든 세부적인 것까지도 아시고, 조절하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나의 삶에 대한 세세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러한 세부적인 사항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떤 결정이 필요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길을 어떻게 발견하고, 또 그 길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난관에 봉착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향한 계획이 있다면, 마치 지도를 펼쳐서 옳은 길을 가도록 빛을 밝히 비추시듯이 보여주실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은 지도에 빛을 밝히 비추시듯 우리를 인도하는 일이 없으므로, 우리 삶에 어떤 특별한 계획도 없고, 다만 우리가 좇아야 할 일반적인 인도만을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추측들은 모두 옳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대한 상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만, 마치 지도 위에 빛을 밝히 비추시듯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 계획하신 것을 미리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고자 정하신 방법을 따라, 그 방법을 우리가 사용합니다.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그 말씀을 확신하고 좇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특별히 정하신 계획입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의의 길이 어떤 특별한 지시나 혹은 평범하지 않은 결정을 요구하게 되면, 주님은 때가 되면 우리에게 그것을 밝히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많은 성경의 예를 볼 때, 정말 하나님이 택하신 길이라면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이나 환경을 통해서도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사사기 7:4-8에서 기드온의 예라든가, 사도행전 8:25-40의 빌립의 경우처럼).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대부분의 경우, 성경에서 믿음의 용사일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매일의 삶에 있어서 의사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정상적인 방법은 "지혜의 길"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지혜의 길이란 단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따라 결정하고, 우리 하나님이 주신 성경적으로 조명된 상식에 따라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자기의 뜻을 계시하심으로, 우리는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특별하게 알리시지 않는 삶이 아니라, 어떤 일에 대한 결정을 우리에게 유보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로 결정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성경에 조명을 받은 상식을 사용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상식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도덕적으로 흠이 많고, 육신에 죄악된 본성이 남아있고, 사단의 궤계에 자주 빠질 뿐만 아니라, 많은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결정이 필요할 때, 특히 우리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을 해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고, 우리가 처한 환경을 영적으로 바로 보기 위해 기도해야 하며, 성령의 감화된 양심이 민감해지도록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상식이 우리가 성경을 아는 지식에 의해 크게 좌우되는 것과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착념함으로써 우리 삶의 결정이 성경적인 원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되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좇아 행하는(갈 5:16)" 삶이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을 좇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건과 상황의 세세한 부분까지 주권적으로 통제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삶을 위해 미리 예비하신 의의 길을 좇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시점에 와서 우리는 몇 가지 논리적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의 불순종과 상식의 결핍이 하나님이 나의 삶을 위해 미리 정하신 계획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고의적으로 의의 길을 떠났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실수로 인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계획이 계속적으로 변경되고, 내가 내 자신의 방법을 주장하는 한,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가는 일이 과연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있어서 위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므로, 나의 실수는 결코 하나님을 방관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나의 삶을 향한 자기의 계획을 바꾸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해 생기는 실수는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게 될 것이고, 축복과 상급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기에, 이러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이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시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가장 합당한 계획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내 삶에 있어 만나게 되는 모든 사건과 상황조차도 나를 하나님께로 다시 돌이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거나 부분적으로만 헌신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심에 대한 실례를 구약성경으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 땅에서 구속하시고,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셨을 때, 주님은 그들을 한 단계씩 믿음으로 행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주님의 임재하심에 대한 가시적인 방법인)으로 인도하셨으며(출 13:21-22), 구름이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구름은 항상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면서, 어디로 가야할 지, 언제 움직여야 할지를 지시하였으며(민 9:15-23),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불만을 토할 때에도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향해 절하고 그 앞에서 춤을 출 때에도 그곳을 떠나지 아니하고 함께 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그들을 그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지 아니할 때에도 구름은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한 40년 동안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고 인도했습니다. 민수기 33장은 우리에게 이러한 방황의 역사를 33단계로 나누어 그 이름을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름이 움직여야 할 때를 아셨으며, 또 어디서 구름을 멈추도록 해야할지 정확하게 아셨으며,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뜻을 거스려" 투덜거리며 불평할 때에도 하나님은 정하신 계획에 따라 자기 방법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확실히 하나님은 오늘날도 정하신 계획에 따라 자기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여정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역설하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하나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애굽에서" 구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내가 의의 길을 떠나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나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더 이상 진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내 삶에 있어 나의 죄나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온 결정이 있을지라도,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고(holding patterns)""행사를 바르게 하면(course correction)" 하나님은 나에 대한 자기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빌 1:6 참조).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향해 가진 마음의 최고의 갈망은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욱 닮아가는 것입니다(롬 8:28-29). 의의 모든 길은 그 길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이러한 영광스러운 목표를 이루도록 되어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
제자의 삶, 데이빗 리드
원제:Discipline is demanded
고전 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딤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이상의 성경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삶에도 제자도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마치 여름휴가 동안 즐기는 서핑이나, 일광욕, 혹은 낮잠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근면한 학생, 혹은 훌륭한 운동선수와 같이 잘 훈련되어 절제된 삶인 것입니다!
운동선수의 삶에 요구되는 훈련에 대해 생각해보면, 운동선수의 삶은 오락이나 사교클럽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삶은 오래고, 힘겹고, 훈련되고, 계속 절제 속에 있는 기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느 축구팀의 훈련현장을 방문해서 살펴보기 바랍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고된 훈련을 받는 선수들의 비명과 신음 소리에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탈진상태에 빠진 채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선수를 보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추스려서 진력하고, 더 힘내고자 하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비유로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 경기는 달리기 경기, 레슬링, 그리고 권투경기들입니다. 24절은 오직 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의 경기"에서 상을 얻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승리자가 되기 위해 달리듯이 경기에 임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모든 승리하는 운동선수들이 자신을 훈련하고 단련하듯이 우리도 훈련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 시대에 있었던 경기는 "모든 일에 절제"(25절)하는 훈련을 통해 승리할 수 있는 경기였습니다. 따라서 엄격한 음식조절과, 격렬한 연습, 성적인 금욕, 그리고 점호시간 준수 등과 같은 훈련이 요구되었습니다. 운동선수의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적용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스포츠나 그 밖의 여러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절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행하는데 너무 바쁜 나머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교제나 기도를 위한 시간을 따로 할애하지 못할 정도로 바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TV를 보거나, 잠을 자거나, 또는 시사 잡지를 봄으로써 기도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절제해야 합니다. 27절은 여러분의 몸을 야구방망이로 치라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알람시계를 아침 5시 30분경에 맞추어 일찍 일어나 주님과 함께 하는 경건의 시간을 날마다 갖는 습관을 기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을 연구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15절은 우리에게 이 일에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날마다 시편 한편씩을 읽는 것으로만 족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정확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일군과 사람이 인정하는 일군은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연구하고, 규칙적으로 읽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표와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소경처럼 길을 잃게 될 것입니다. 또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지도 모릅니다!
비록 제자로서 훈련 속에 사는 삶이 어렵지만(많은 시간이 걸릴수도 있지만), 그 결과 반드시 상급이 주어질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25절). 그리스 시대에 경기에 임한 운동선수가 자기 삶을 단순한 화관이나 죽은 나뭇잎으로 엮은 화환을 위해 그토록 절제하였다면, 우리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상급을 얻도록 얼마나 우리의 삶을 절제해야 될까요! 디모데후서 2장 5절은 우리에게 훈련 규칙이나 경기의 원칙을 깨뜨린 사람에게는 아무런 상급이 없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제자의 삶은 일생에 걸쳐서 지속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운동장 한바퀴를 남겨둔 달리기 선수가 앞선 선수를 따라잡기 위해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리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 성숙을 위한 지름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적 성숙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하신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위한 원칙과 원리를 계속 지키는, 즉 제자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제자의 삶이 없으면, 상급도 없습니다!
주여, 왜 나를, 데이빗 리드
욥기 7:19-20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여, 왜 나를? 당신은 하나님께 그러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이나 그 이상 그러한 질문을 했거나 적어도 그것을 생각했었습니다. - 특히 극심한 압박이나 고난의 때에. 3,000여 년 전에 욥이라는 사람이 극한 고난을 당하였을 때, 하나님께 그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구약성경 욥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롬 15:4).
오래 전의 욥의 기록을 살펴보고 오늘날 "왜, 나를?"이라는 질문에 어떻게 적용할지 하나님의 대답을 자세히 관찰해봅시다.
"주여, 왜 나를"이란 질문은 욥기에서 문제와 씨름한 보다 중요한 질문 중의 한 부분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분이 어떻게 고난을 허락하셨는가? - 특히 죄가 없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셨는가? 올바르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가? 분명하게 불일치하나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은 신정론(神正論 :악의 존재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는 주장, 역자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욥기는 이러한 신정론을 인정합니다. 미천하고 죄가 없는 욥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이 책에 다룬 고난이란 특별한 측면은 신자의 생활 가운데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이냐? 입니다. 고난의 복잡한 문제의 모든 상세한 부분을 다루고 완전한 대답이 성경에서 이 책의 의도는 아닙니다. 욥에게 있어 그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셨음을 우리는 압니다. 여기 욥기는 우리의 선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모든 방면에서의 완전한 치료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여, 왜 나를?"이란 질문에 대한 세가지의 분명한 대답은 욥기의 간단한 연구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욥의 고난중 가장 분명하고도 첫 번째 이유는 욥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진단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참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믿음을 시험하신다고 가르칩니다. 베드로전서 1:7에서 인정받은 믿음은 금보다도 귀하여 하나님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가져옵니다. 우리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마치 한 아버지가 어린 자녀에게 종일 놀이만 하지 않고 약간의 짐을 지워 집 가까이에 미리 계획된 상황에 처하게 하여 그의 성격을 검증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끝까지 버티는 그의 아들을 알게될 때 아버지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첫 번째로 욥기의 2장에서 욥의 믿음을 신중하게 시험하는 환경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욥기 1장 시작 부분에서 욥은 거부(巨富)이며 영향력이 있으며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과 그의 믿음을 욥기 1:1에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의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진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성품에 그러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우리는 욥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면 참소자의 두 개의 거대한 파고가 얘기치 않게 조상에게 휘몰아치고 그를 믿음에 발버둥치게 남겨 놓습니다.
첫 번째 파고에서 욥은 그의 모든 자녀와 소유를 잃어버립니다. 그 상실의 양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것이 우리가 "왜 나를?" 이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을 전혀 합당치 않게 합니다. 비극적인 손실에도 불구하고 욥은 이생의 모든 소유가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욥은 주께 경배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고난의 파고 후에 욥의 믿음의 진단을 1:22에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내려집니다.
두 번째 고난의 파고는 신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욥의 온 몸은 병들었습니다 . "기가 막힘", 이 말이 욥의 몸의 상태를 적절히 표현하는 유일한 단어일 것입니다. 그의 몸은 고통스러운 악창으로 덮혔습니다(2:7). 그의 살은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진액과 딱지로 덮혔습니다(7:5). 그가 겪는 고열과 극심한 고통으로부터 놓여남은 없었습니다(2:13과 30:17,30). 이러한 극심한 환경 아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어떠한 믿음을 내보일 수 있을까요? 욥의 반응은 하나님께 깊게 뿌리내린 믿음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참으로 하나님께 거역함 없이 기꺼이 받아드릴 수 있을까요? 다시 욥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은 2:10에서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라고 내려집니다. 하나님께서 그 종을 고난을 받게 하실 때 욥의 믿음을 단순하게 검진하기보다는 더 깊은 뜻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욥의 믿음을 발전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내심이 많은 욥의 신앙도 성숙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욥은 호된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을 부인하기보다는 "주여 왜 나를?"라는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7:19-20 참조). 사실, 3장에서 31장까지 욥은 그의 세 친구의 위로자에 대하여 계속되는 항변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왜 이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하시는가를 깨닫을 수가 없어서 "왜 나를"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그분이 하시는 것을 모르셨을까? 엘리바스, 빌닷, 그리고 소발은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논지는 간단합니다. "모든 고난은 죄의 결과입니다. 욥은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므로 욥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철저히 그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이점에 있어 욥은 옳고 그의 충고자는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욥을 제외한 그들은 종말에 희생을 드려야만 했습니다(42:7-9 참조).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질문과 "왜 나를?"이라는 태도를 가짐으로서 잘못했습니다. 이것이 욥의 신앙이 개발될 필요가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들 또한 그렇습니다. 32-37장에서 네 번째 위로자인 엘리후는 욥의 3명의 위로자보다 진리에 가깝습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지금 하나님께 단련을 받고 있으며 그분께 의문을 갖기보다는 하나님께 굴복해야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후를 사용하셔서 욥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수월하게 사용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종국에 엘리후가 희생제물을 드리지 않고 또한 욥이 엘리후의 모든 말에 잠잠했던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끝으로 주님께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욥의 항해에 곧바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일련의 질문들로 주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지식과 능력을 욥에게 언뜻 보이게 하셨습니다. 단지 햇병아리이며, 유한한 피조물이 전능하시며 절대주권자이신 창조주께 그의 섭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욥은 과연 누구입니까? 욥은 유치원의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뽐내며 잘난 체하는, 그의 생각에는 수학실력이 최고수준이라고 알고있는, 대수학을 공부하는 고등학생이 갑자기 아인슈타인을 만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욥의 반응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의 발전에 크다란 진보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참조 40:3-5, 42:1-6). 욥은 그의 미천함과 무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전의 "왜 나를?"라는 어투에서 물러나서 그의 그릇된 태도를 반성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아주 큰 계획을 갖고 그의 고난을 포함하여 모든 만사를 지배하시는 분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겸손하게 주님의 손에 자신을 복종시켰으며 더욱더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렸습니다. 욥은 그의 신앙의 위대한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발전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주여 왜 나를?" 이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미성숙의 표시이며 자기의의 잠재적인 교만의 표현입니다. 불순종의 태도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한다든지, 하나님의 불공평하시고 그분이 무엇을 하시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고 하는 생각은 확실히 교만의 근본 죄악입니다.
성장하고 발전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바로 알도록 요구하는 믿음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편안한 항해 기간에는 가끔 우리 스스로 만족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을 판단합니다. 역설적으로 우리의 잘못된 태도를 바꾸는 것은 "왜 나를?" 라는 거친 상황을 통해서입니다.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손길에 겸손하게 복종하며 그 분의 측량할 수 없는 인도에 의탁하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고난에 대한 응답은 욥의 믿음을 또한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전시물 하나"입니다. 땅위의 사람들 뿐 만 아니라 하늘 위의 존재들에게 1:6-8과 2:1-3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욥의 신앙이 드러났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탄에게 하신 질문에서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비록 욥의 신앙이 완전하지 않고 진전되어 가는 과정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의 신앙을 나타내시는 데 여전히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실 때에 기뻐할 수 있을까요? 천사들이 우리의 믿음의 증거를 살피고 있다는 이러한 사실이 더욱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사탄은 믿는 자의 참소자로 일컬어지는 것을 유념하십시오(참조 스가랴 3:1, 계시록12:10). 불행히도 우리는 영혼의 대적하는 자가 우리의 생활에서 참소할 수 있는 많은 증거들을 보통 많이 갖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난이 너무 커서 우리의 신앙을 버려야 할 그러한 상황을 결코 허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도가니에 얼마나 열기가 필요한 지 한계를 두셨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12, 2:6). 고린도전서 10:13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열기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여전히 한계를 두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욥을 두르는 산울은 동일하게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1:10).
주님께서 우리가 상황을 충분히 다룰 수 있을 만큼 튼튼하다고 아실 때에만 울타리를 낮추십니다. 욥기의 마지막 장은 욥의 회복된 행복한 장면을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의 고난을 통한 목적이 욥에게 성취되었고 이제 그는 복을 받았습니다. "주여, 왜 나를 "이라는 질문에 하나님의 대답을 이제 우리가 알게 될 때 우리 또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데이빗 리드
원제:God's Lamb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너희 어린 양은 흠없고 일 년된 수컷으로 하되"(출 12:5)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너희가 알거니와 ...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계 5:6)
베들레헴 주변 지역은 양떼를 목양하기에는 이상적인 장소입니다. 좋은 목초지가 많을 뿐만 아니라 목자들이 쉴만한 장소로 사용할 수 있는 동굴이 있는 언덕이 수없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 근처에는 이러한 양들이 매매되는 큰 시장도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많은 양떼들은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르는 것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행사 기간 중에는,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각 지역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모여듭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집에서 기르던 양들로 제물을 삼기보다는 예루살렘에 와서 양들을 사서 그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제물로 드려질 양은 흠이나 점이 없는 깨끗한 것이어야 했습니다(출 12:5, 레 22-23장, 민 28-29). 따라서 베들레헴 지역에서 양떼를 치는 목자들은 이러한 특별한 목적에 따라 드려질 양떼들을 매우 조심해서 돌보아야 했습니다.
거의 2,000여년 전에 한 마리 매우 특별한 어린양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어린양은 예루살렘에서 속죄제물로 죽을 운명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 어린양은 아무 흠도 없이 태어났으며, 희생제물로 드려지기에 합당한지 매우 세심한 검사를 받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때가 차매 이 어린양은 친히 하나님이 이끄셔서 희생의 자리까지 인도되었습니다. 이 어린양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바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했던 것입니다(요 1:29,36).
하나님의 어린양은 아무 흠이 없었다. 하나님이 희생제물로 친히 준비하신 이 온전한 양이신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으십니다. 성경은 주 예수님께서 아무 죄가 없으신 분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벧전 2:22),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고후 5:21)이시며, "그에게는 죄가 없으십니다"(요일 3:5). 우리 주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생애 가운데 두 번이나, 하늘로서 우리 주님이 아무 흠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선언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17:5).
이러한 하나님의 선언은 우리 주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뿐만 아니라(마 17:5),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바로 전에 침례를 받으실 때에도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어떤 기적이나 말씀 강론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이 친히 준비하신 어린양이 아무 흠이나 점도 없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보면, 주님은 그 어떤 놀이나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도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따라 무엇을 소유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부모님과 선생님께 진실만을 말씀드렸습니다.
청년 때의 주님은 한번도 목수의 일에서 눈을 돌린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일에 싫증을 내시며 손을 놓은 적이 없으셨고, 욕구불만으로 목청을 높인 적도 없으셨습니다. 주님이 성인으로 성장해 가면서 여성에 대한 주님의 생각은 항상 정결하셨습니다. 주님은 일가친척에 대해서도 항상 존중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양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얼마나 죄악되며, 또한 죄의 본성에 물들어 있는지 다시금 돌이켜보게 됩니다.
거의 33년 동안 하나님의 어린양은 밤낮으로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시험을 받으셨으며, 그 순결함이 입증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주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히 4:15)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어린양이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히 9:14)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정결함을 입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데서 유월절 어린양(출 12장)의 피를 통해서 구속함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도 죄로부터 구속함을 받은 것은 "흠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벧전 1:19)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잠잠하였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고난을 받으실 때에도 주 예수님은 그 입에 궤사가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벧전 2:22-23). 거짓 고소를 당하셨을 때에도, 주님은 자신을 방어하거나, 변호의 말을 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마 26:62-63, 27:12-14). 주님이 곤욕을 받으시고 공격을 받는 중에도 불평의 말이나, 혹은 욕이나 복수의 맹세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충분히 그러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음에도 참으셨습니다(마 26:53). 만일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상상해보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자기 연민이나 자기 정당화 혹은 자기 변호에 빠지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입을 지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2:19-23에 보면 우리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도 우리의 "입을 열지 말아야 할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자취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잠잠할 것에 대해 주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 그 장엄한 이사야 53장에서 우리는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잠잠한 양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7절). 실제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은 거의 대부분이 장차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생애의 최고의 시기에 무슨 일이 있을지 다 아셨으며, 곧 자기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질 것"(8절)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선 양과 같이 되셨습니다. 즉 잠잠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잠잠함이 주 예수님과 털 깎는 자 앞에 선 양과의 주요한 비교대상이지만 "털 깎는다"는 개념을 좀더 생각해보면, 우리가 더 묵상할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다. 우리 주님은 확실히 우리를 위한 십자가에 나아가는 길에서 양이 털이 깎이듯이 옷이 벗겨지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진해서 자신의 하늘에 속한 영광과 위엄의 "옷"을 벗으시고, 겸손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 합당한 공경을 받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계속해서 주님을 능욕했으며, 사실은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수많은 증거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로 영접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주님에 대한 능욕은 그리스도께서 마귀와 한패라는 억지와 억측으로 점철되는데 까지 나아갔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격적인 위엄을 빼앗기는 수치도 감내하셨는데, 특히 주님이 로마 병사들에 의한 조롱과 고난,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힌 동안 더욱 심했습니다. 주님은 조롱을 받으시고 뺨을 주먹으로 치심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았으며, 사람이 아닌 벌레와 같은 대우를 받으셨습니다(시 22:6). 주님은 글자 그대로 옷벗김을 당했으며, 그 당시 문화에 속한 가장 굴욕적인 방법으로 수치와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묘사된 털을 깎는 과정을 통해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주님은 의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주 예수님이 본래 가지신 인격적인 의가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속물로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섭고도 두려운 진노가 그리스도께 쏟아 부어졌는데, 이것은 불의한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께서 마치 죄인처럼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죄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렇듯 "털 깎이는"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의의 옷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고후 5:21). 마지막으로 털 깎이는 과정은 주 예수님의 육체적인 죽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죽는데 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즉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다!(빌 2:5-8)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렇듯 털 깎는 과정이 온 생애를 걸쳐 나타났음에도 이기심이 없는 잠잠함으로 견디신 것은 작은 고난 가운데서도 "불평의 소리"를 끊임없이 내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희생제물로 드려졌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연한 사건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님이 불행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만 머무셨어도, 자신을 변호하기만 했어도, 기회가 있었을 때 도망치기만 했어도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때가 찬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행 2:2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희생제물의 위치로 보내졌습니다. 오래 전 아브라함의 때에 하나님이 번제로 드려질 특별한 어린 양을 정확한 시기에 예비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창 22장을 읽어보라). 이제 하나님은 죄를 단번에 없애기 위해 드려질 속죄제물인 매우 특별한 어린양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는 하나님의 약속의 최종적인 성취가 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이제 서 계신다. 히브리서 1:3과 10:12이 우리에게 주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을 말하고 있지만, 사도 요한은 장래 일에 대한 계시를 받을 때, 어린양이 서 계심을 보았습니다(계 5:6). 이것은 성경이 서로 모순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일한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예수님이 문자적인 어린양이 아님을 기억하라).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심을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사가 충족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속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이제 다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는 해결되었으며, 이제 피로써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자! 하늘에 서 계신 어린양에 대한 이상은 동일한 진리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더 이상 제단 위에 죽임을 당한 채 누워있지 않습니다. 한번 죽임을 당하사, 단번에 영원히 죄를 정결케 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제 부활의 승리에 가운데 서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5장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우주적인 찬양과 경배를 받고 계심을 보게 됩다. 베들레헴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신 어린양이신 우리 주님이 장차 모든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관심과 예배의 대상이 되시도록 영원히 서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어린양이 지금 여러분의 모든 사랑과 경배의 중심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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