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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와 마르다는 자기 오빠 나사로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예수님께 전하게 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을 병이 아니라는 말씀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심한 표현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예수님 자신의 영광을 받기 위함이라는 말씀이 환자 보호자들에게 어떤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더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급하든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지체하십니다. 예수님이 골든 타임을 완전히 놓쳐버린 것이 아닐까요? 이틀 후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고쳐주시기 위해 유대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만류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방금도 돌로 치려고 했는데 다시 그리고 가시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낮이 12시가 아니냐,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직 남아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예수님이 다 아시면서도 지체하시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해할 수 없어도 (신뢰)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지체하심이 당장은 섭섭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으면 낫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에수님은 나사로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한다.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에게 가자 하시고 무덤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나사로를 매장한 장지가 베다니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가까워 많은 유대인들이 마리아와 마르다를 조문하려고 왔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합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배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으시고 냉정하다고 느낄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라도 하나님께 구하시면 주실 줄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 마르다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우리 곁을 먼저 떠난 분들이 다시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당신은 정말 믿습니까? 많은 경우에 이론은 믿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습니다.
2. 우리는 과거의 (슬픔)에 사로잡혀 현재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미래에 부활할 것을 믿지만 현재의 삶 속에서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현재시제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으냐(25-26절).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는 믿음이 약해져서 나사로의 죽음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주시지 못할 것처럼 말합니다. 마르다가 가만히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예수님이 너를 부르신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즉 마리아는 예수님의 병 고치시는 권능은 믿었으나, 부활시키시는 권능은 믿지 못했습니다.
3.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부활)의 영광과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는 것은 육신의 몸은 죽어도 영적인 (생명)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을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불신앙과 사망의 세력 혹은 마귀에 대하여 퉁분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이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이에 에수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4.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절망과 탄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비통)해 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고치시는 분은 우리의 상처를 함께 느끼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은 우리와 (함께) 우십니다.
예수께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기 전에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해주시는 일이 있지만 인간이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난다고 난색을 표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나사로의 부활한 사실을 보기는 보았으나, 거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 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구원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십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을 수건에 쌓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놀라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5. 여러 가지 위협과 억압과 눌림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들을 (우리)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사건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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