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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믿음으로 파워를 높여라. (고린도후서 12:1-10)

by liefd 2025.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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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목적 있는 인생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3가지 기본적인 문제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첫째는 정체성(identity)의 문제로 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이고, 둘째는 중요성(importance)의 문제로 내가 과연 중요한 존재인가라고 질문하고, 셋째는 영향력(impact)의 문제로 삶에서 나의 위치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질문의 솔루션은 바른 목적을 찾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욥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분명하게 고백을 했습니다.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12:10).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로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때문에 목적 있는 인생을 살려면 하나님의 목적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설계하실 때도 목적을 가지고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휴식의 공간이나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세워진 곳이라기보다 교회는 최고의 가치 가있는 곳으로 세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원히 존재할(16:18)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세워진 곳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만드신 것이나 교회를 세우신 것이나 모두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목적 성취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음입니다. 사람도 믿음으로 세워지고 교회도 믿음으로 세웁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이 믿음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질 수 있는 것도 믿음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세우는 원리는 믿음의 원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네 번에 걸쳐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을 다시 재점검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한 사람이 누구인가하고 묻는다면 첫 번째 자리에 오르는 사람은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운명을 하나님께 위탁하고 바쳤던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 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1:20-21).

 

바울은 사도행전 20:23-24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평생 생명을 던져놓고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겐 하나님이 복을 주시되 넘치도록 축복을 하셔야 당연하고 상식적으로 맞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질의 축복을 받았습니까? 떠돌이 천막장사였습니다. 가정축복을 받았습니까? 결혼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명예에 대한 축복을 받았습니까? 다니면서 매맞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형통하고 기쁜 날보다 고생의 날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건강의 축복이라도 받아야 하는데 본문에 의하면 심한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 병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든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절망스런 고통과 아픔을 당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불의 하시고 도저히 이치에 맞는 것 같지 않아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주님을 부인하며 비겁하게 행동했던 베드로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해가 되고 가롯 유다에게 이런 병이 있었다면 잘못을 행하여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온전히 주를 위해 생명을 내놓고 물, 불 가리지 않고 주의 일이라면 앞장섰던 하나님의 종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실망감이 들고 잘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수고하고 헌신하는 것이 나에게 돌아오는 몫이 적고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는 원인이 됩니다.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때때로 고통에 처한 교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만 때로는 하나님이 야속하게 생각들 때가 있습니다. 불치의 병이나 사업 실패, 사랑하는 가족들과 어쩔 수 없이 사별하는 경우, 더 살아도 될 분이 먼저 떠나는 교우들을 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째서 저렇게 견디기 힘든 육체의 가시를 주시는가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며 해답을 찾기 위해 간절하게 매달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을 안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대답은 늘 같습니다. 제가 무지해서 모를 뿐이지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외모로 보기에는 다 그럴듯하게 보입니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쓰라린 고통을 안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예상하지 않았던 돌발사고, 인간관계의 문제나 육체적인 질병, 신앙의 싸움과 자기 자신과의 갈등 등, 신자는 고통과 더불어 매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고통의 상처와 육체의 가시로 인해 아픔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 바울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풀어야될 믿음과 가시의 관계입니다.

 

바울은 그 고통의 골짜기에 서서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가를 모르기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는 세 번이나 간절히 간구 했다고 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가시처럼 고통을 주는 육체의 질병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응답을 주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살피고 고통이나 아픔을 당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육체의 고통인 질병을 치료해 주시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병을 치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병을 은혜로 평가하셨다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에 걸리면 이것은 사람들의 상식으로 하나님의 저주든지 심판입니다. 어떻게 육체의 가시가 은혜입니까? 아픔을 겪는 것이 은혜입니까? 그것이 은혜라고 하시는 하나님 말씀이 7절에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질병의 고통인 육체의 가시는 사랑의 가시이며 은혜의 가시였습니다. 나를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를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나를 기고만장하지 않도록 만드시기 위하여 나를 조절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시가 조절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너무 많은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도 받았습니다. 삼층천도 보았습니다. 환상도 보았습니다.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나쁜 병이 생깁니다. 그것이 교만의 병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받은 은혜가 은혜로 남게 하게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사명으로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남겨두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육체의 가시는 오히려 축복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며 표적이며 은혜였습니다. 가시를 보면서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고 함께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가시 속에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가시를 통해 내가 무엇을 고쳐야 될지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해야 될지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나이다”(30:7-9).

 

여러분도 이렇게 사셔야 합니다. 너무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생각하지 못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버리는 비극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속된 축복이 있기 위해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축복이 나를 무너지게 하는 올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가시 신드롬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다든지 기간이 얼마 되지 않을 때 가시의 사건을 만나게 되면 겁에 질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무릎을 꿇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약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기간이 길어지면서부터 믿음이 자라고 웬만큼 되었다고 생각할 때부터 어떤 가시에 찔려도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대신에 그 가시의 정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고 자신은 가시에 찔릴 이유가 없는 것처럼 회피자가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를 무너지게 하는 무서운 것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겸손하기 위해서는 가시가 필요한 것을 이제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바울도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3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압니다.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사람인가를 압니다. 때문에 자신을 쳐봅니다. 가혹하게 대합니다. 때리기도 합니다. 억지로 자신을 묶습니다. 그러나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내 스스로 겸손하려 했지만 겸손해 지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쓴 뿌리가 빠지지 않습니다. 못된 자아가 뽑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쳐 복종시키는 길만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런 가시의 축복, 가시의 능력에 대한 깨달음이 은혜 중에 은혜라는 것입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낮은 땅에 물이 고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하나님은 은혜의 단비를 내리십니다. 높은 곳에는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너무 교만해지면 어떤 은혜도 받지 못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이 멀어집니다. 너무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잘났어도 잘나지 않은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잘난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침을 뱉어도 용서합니다. 얼굴을 때려도 맞습니다. 창에 찔려도 당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고 상대방을 엎드러지게 만들면서 승리자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짐을 지고 고통을 당하는 쪽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파워입니다. 상대방의 자존심을 밟고 눈물나게 만들면서 얻는 기쁨은 세상 사람이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다릅니다.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나의 자존심은 밟히면서도 상대방이 높아지고 위대해 지고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웃는 사람이 능력 있는 신자이며 믿음 좋은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축복 중의 축복이며 믿음의 보화입니다.

 

우리 교회는 겸손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인 육체의 가시, 질병의 가시를 은혜로 볼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아프거나 어려움을 당하면 뭔가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이 손보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성도 중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기 위하여 가시의 은혜 중에 있다라고 믿어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본인은 바울처럼 이것이 나를 낮추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한 은혜의 가시라고 여기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57:15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시고 겸손한 자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의 법칙이 이것입니다. 내가 녹아질 때 하나님은 쓰십니다. 쇳덩어리가 녹아야만 연장이 될 수 있듯이 겸손해야 하나님은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만일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큰 일들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표적을 나타낸 특별한 사람이고 영적 명성을 얻기에 충분한 인물이었기에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하나님의 일을 그릇 치지 않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육체의 가시입니다.

 

다시 본문의 내용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말씀을 깨달은 후 바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10).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육체의 가시를 안고 연약한 몸으로 살게 됨을 감사합니다. 내가 약할 때가 가장 강할 때임을 알았습니다. 내가 한번 약해질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고, 내가 한번 눈물 흘릴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고, 내가 한번 낮아질 때 그리스도의 엄청난 사랑이 내게 온다는 것을 보았기에 약할 그때가 강할 때라는 비결을 또 깨달았습니다.

 

베에토벤은 천재적인 음악가였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좋아하는 운명 교향곡, 전원 교향곡 등 수많은 불후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위대한 곡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눈과 청각을 잃은 다음 즉 육체의 가시, 육체의 고통으로 심오한 번뇌 속에 빠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에토벤에게 육체의 가시로 인한 약함을 느낄 때 오히려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강함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육체의 가시로 고통을 느낄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회임을 놓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위대함은 약할수록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입니다.

 

시편 62:5-6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 때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회임을 잊지 마십시오. 어려움 중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때에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빛으로 내게 임할 것입니다. 어려움이나 고통이나 절망은 성도를 파멸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가도록 만드는 생성 도구입니다. 때문에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어떻게 강한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육체의 가시를 놓고 기도했을 때였습니다. 너무 쉽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가시에 찔리면 무조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 받는 조건으로 기도한다는 의식이 아닙니다. 기도의 중요한 목적은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돕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믿음으로 엎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나 약할 때나 가시를 놓고 끝까지 기도의 전쟁을 치르는 것은 신자의 생존입니다.

 

야곱이 약해져서 어찌할 수 없을 때 얍복 나루터의 기도 소리를 기억하십니까? 환도 뼈를 얻어맞아 부러지기까지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며 응답을 기다렸던 야곱을 보십시오.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의 열정은 죽을 각오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기도는 몇 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밤을 세워가며 부러진 갈비뼈를 움켜쥐며 이대로 물러서면 죽는다는 절박하게 기도하는 강렬한 야곱의 결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야곱이란 이름대신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자의 이름이며 기도의 챔피언이라는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까?(32). 야곱의 기도는 생명을 담보로 하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언제나 듣는 설교라고 여기며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라고 생각하여 쉽게 넘기면 안 됩니다.

 

저는 문제 잇을 때 단순히 기도하라는 차원에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기도하라는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습관적인 기도와 생명을 건 기도는 다릅니다. 가시 때문에 기도를 하든 은혜 때문에 기도를 하든 언제나 생명이 담겨있는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부터라도 그런 기도를 하게 된다면 우리의 기도는 훨씬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결심하는 성도 여러분! 육체의 가시이든 환경의 가시이든 가시의 종류가 문제가 아닙니다. 약하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가시에 찔린 상처 때문에 눈물만 흘리지 마십시오. 아픔 속에서 고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지금이 하나님을 찾는 절호의 기회이며 그 기도 속에서 나의 약함이 곧 강함을 알게 되고 나의 교만이 무너지며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는 것입니다.

 

시편 91:15을 보십시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이사야 58:9을 보십시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신자의 간절한 기도, 환란 때 부르짖는 기도를 하나님은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괴롭습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치료해주십니다. 만일 치료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다른 능력을 주십니다. 사탄의 사자로 인해 괴롭습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물리치실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길은 기도하는 방법뿐이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 교회의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바라보고 믿고 기도하며 능력 있는 신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약한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겸손하게 머리 숙여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나는 약한 위치에 있지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더욱 강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강한 신자가 되십시오. 그래야 우리 교회도 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솔솔 부는 바람에도 휘청거리는 갈대와 같은 약한 신자가 되서는 안 됩니다. 작은 문제로도 휘청거리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폭풍 속에서도 든든히 꿋꿋하게 서있는 강한 신자 강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믿음의 기도를 하고 생명을 건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교회는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교회는 육체의 가시를 지니고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로 깨달으며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성도 한사람의 기도보다 전 성도가 함께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는 우리 주변을 바꾸어 놓으시고 강한 주의 사람으로 다시 만드셔서 사도 바울을 크게 쓰신 것처럼 우리들을 크게 쓰실 것입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짓는 것이고 세운다는 것을 기억하고 한 사람의 위대한 바울에 의해서 수많은 교회가 세워진 것처럼 믿음의 성도들에 의해서 교회가 계속해서 건강하고 강하게 세워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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