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세우는 탁월한 원리는 믿음이라고 그동안 강조했습니다. 회중들이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강한 교회와 약한 교회, 부흥하는 교회와 쇠퇴하는 교회, 건강한 교회와 쇠약한 교회 되는데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교회를 세우게 되면 네 가지의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됩니다.
첫째, 믿음으로 하면 성도들에게 열성을 불어넣습니다.
만일 성도들이 큰 믿음으로 충만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큰일을 할 수 있고 큰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교회는 대담한 목표(audacious goal)를 세우게 되고 그 목표를 이루도록 열성을 갖게 합니다.
둘째, 믿음으로 하면 기도하도록 자극을 줍니다.
큰 믿음으로 큰 목표를 세우게 되면 자연히 교회는 기도하도록 자극합니다. 기도가 많은 교회나 기도에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교회는 목표가 분명한 교회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큰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이 나타나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무리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집니다.
셋째, 믿음으로 하면 희생하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교회의 목표를 이루는 것은 희생입니다. 희생을 하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교회는 성장합니다. 그러나 희생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볼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일을 이루려면 큰 희생이 있어야합니다. 교회가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성도들일 때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넷째, 믿음으로 하면 일치를 생산해 냅니다.
교회는 논쟁이나 충돌을 일으키는 싸움을 한다면 도전할 목표를 잃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연합입니다. 서로 조화와 일치와 연합과 화합을 통해서 하나될 때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회중들의 하나 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된 교회를 찾고 계시며 그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믿음에 대한 원리 설교 마지막 시간인 오늘 특히 강조되는 말씀이 바로 하나 되는 교회를 믿음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역을 할 때 교회는 믿음에 서있는 축복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되는 교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정답은 ‘믿음’입니다.
어느 고층 건물 앞에서 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을 옮기느라 혼자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고 있던 한 청년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거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들을 때보다 오히려 그 짐은 더 꼼짝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알고 보니 엉뚱하게도 한 사람은 짐을 밖으로 끌었고 이 청년은 안으로 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스운 일 같지만 여기에 하나 되는 비결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무조건 힘을 쓴다고 하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 같고 방향이 같고 뜻이 같고 믿음이 같을 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이든 직장 생활이든 가족들과 함께 하면서 하나 되지 못하여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사회나 현대교회 안에는 점점 독특한 자기이미지 실현(self-image actualization), 자기 노출(self disclosure), 자기주장(self-assertion)을 요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림이나 이해와 사랑을 기초로 동료의식이나 지체의식을 나타내지 않음으로 마치 큰 벽을 놓고 살아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막은 벽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치 서로가 적의 관계,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기에 이런 흐름으로 인해 어디서든지 하나 되어 서로를 위하여 사는 하나 된 공동체는 보기 힘들 정도가 돼버렸습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였던 무솔리니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그가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어느 날 변장을 하고 혼자 영화관을 갔습니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화면에는 무솔리니의 큰 사진이 나타나고 모든 관중은 일어서서 국가를 부르며 박수를 쳐야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모든 관중은 일어나 박수를 치는데 무솔리니는 약간 겸연쩍어하며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바로 옆 좌석에 있던 노동자가 발로 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일어나요 나도 일어나고 싶지 않지만 일어나는 것이 신상에 좋을 거요' 하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독재자의 영상을 보고 국가를 부르면서 박수를 치는 이 감옥 같은 일치가 하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북한에 관한 TV를 볼 경우가 있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역겨운 장면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마이크를 들이대면 친애하는 지도자 000이니 위대한 하늘의 별 000 동지께 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면 미쳐도 저렇게 미칠 수 있는가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똑같이 입을 벌리면 같은 소리를 아무리 외쳐도 그런 것을 하나 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 된다는 것은 자유와 사랑이 보장되고 목적과 방향과 뜻과 믿음이 같을 때 비로소 하나 되는 것입니다.
하나 되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마지막 가르침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나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1-23).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의 통일입니다. 믿음의 일치입니다. 어떤 이해와 사랑 이전에 인격적인 공통점이나 서로가 원하는 욕구충족 이전에 믿음의 통일이 없으면 하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심의 일치화'라 합니다. 교회나 직장, 가정에서 하나 됨을 파괴하는 충돌과 갈등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근본적인 믿음의 일치가 없을 때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풀을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경우는 신앙의 답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충돌하는 원인과 결과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아무리 대화로 풀려고 해도 풀리지 않고 간격이 좁혀지지 않는 이유가 믿음의 동질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분량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나 믿음의 정도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싸움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반사행동(reflex action)으로 나타나게 되어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자기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방어하는 태도를 먼저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하나 되기 위해선 믿음의 일치와 통일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온전한 믿음과 사랑에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추구하는 목적의 일치에서 동질화가 있고 그 이후에 라야 하나 됨이 있습니다. 강압과 속박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목표의 통일과 신앙의 통일이 하나 되는 비결입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 갇힌 많은 사람들이 나팔을 불면 일어나고 취침 시간이 되면 같이 자고 일하는 노예적인 통일이 있다고 해서 하나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 평생을 함께 살았어도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부부가 20년을 같은 방과 침실에서 함께 살았다고 해서 하나 되었다고 정의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 되겠다고 결심을 해도 믿음의 일치를 이루고 난 후에야 하나 됨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50년이 넘도록 하나 되자고 애타게 소원했지만 아직도 남과 북은 갈라져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하나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정치의 통일, 경제의 통일, 도덕의 통일, 가정의 통일, 교회의 통일 모두 하나 되는 과제를 안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 되지 못하는 신자의 경우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공통된 신앙고백을 가진 신자들이 여전히 분열되고 나눠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서로 대립(polarities)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신자의 하나 됨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병이 교만입니다. 교만하면 내가 하나님이 되고 내가 우상이 됩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고 내가 절대자가 됩니다.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사건 후 시날 광야에 도착한 사람들이 어떤 짓을 했습니까? 4절에 의하면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면서 바벨탑을 쌓습니다.
그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되자, 단결하자고 외쳤지만 하나님은 저들의 교만을 보시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어 사방으로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분열은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또 하나 되는데 조심 할 것은 자기 우월감입니다. 나는 특별하다는 특권의식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합니다. 자기우월주의는 하나 되는 것을 파고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사람은 본디 같습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같이 벌거숭이로 태어났고 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세끼 먹고사는 것도 같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일부분입니다. 그런데도 많이 다르다.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구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체면과 자기 우월성을 극소화시켜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똑똑하고 모든 사람이 잘났다고 하면 공동체는 깨어집니다.
따지고 보면 별로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비오면 비 맞고, 눈감으면 앞이 안보이고, 배 아프면 약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나만은 특별해서 눈감아도 앞이 보이고, 비와도 안 맞는다고 하면 그런 사람과는 어떤 대회도 통하지 않기 때문에 중단해야 합니다. 사는 것도 같습니다. 신앙수준도 모두 거기서 거기입니다. 자기 우월감에 사로잡히면 하나 됨이 깨집니다.
더욱 하나 됨을 파괴하는 심각한 병은 자기 중심성(ego-centricism)입니다. 자기를 너무 사랑하고 자기 의견과 생각을 너무 고집하고 자기 생활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나 되지 못합니다. 자기의 경험과 세계관, 자기 욕심과 자기 자랑에 얽매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배고픔과 슬픔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교육학자의 보고에 의하면 부모의 집착으로 인해 아이들이 성공하는 쪽보다는 실패하는 쪽이 훨씬 더 많다고 했습니다. 자기 집착과 과잉 욕심의 부모님들은 대부분 밤낮 공부 못한다고 아이들을 야단칩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등생이 되기 싫어하는 아이가 있습니까? 할만하지 못하니까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다 뭐라고 합니까? ‘나가 죽으라’는 것입니다. 이제 상황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치닫고 있는데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학교가도 구박, 집에 와도 구박 이래선 안 됩니다. 아버지나 어머님께 실망한 아이는 마음 붙일 곳을 잃고 방황하며 불안정해 지는 것입니다. 너무 내가 만들고 싶어 해서 아이를 붕어빵 찍어내듯 만들려는 자기 집중력을 버려야 올바른 교육을 하게 됩니다. 내 옷에 맞추기 위해서 마음대로 아이들의 치수를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에게 조금 더 자유를 주고 그 아이가 성장해서 독립하도록 길러주어야 훌륭한 부모이며 지혜로운 부모입니다.
교회생활도 그렇습니다. 너무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하면 하나 되지 못합니다. 빌립보서 2:2-5에서 교회가 하나 되는 교회관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 됨이 있고, 하나 되는 지혜가 있고, 통일이 있고,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나를 앞세우면 안 됩니다. 주님의 생각보다 내 생각이 너무 강해도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주도권보다 내 주도권이 너무 세도 안 됩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믿음의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때 하나 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흑백 신앙이면 안 됩니다. 너무 칼을 쓰면 사람을 잃습니다. 내 것을 고집하면 사람이 따르지 않습니다. 외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불행한 교회생활입니다. 내가 손해 보지 않으려고 자꾸 손을 안으로 당기면 힘이 빠질 때가 되면 누구하나 거들어 주지 못합니다. 너무 강하게 사는 것은 피곤합니다. 너무 완벽하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 무너집니다. 약간 어릿하고 뭔가 흙을 밟고 사는 사람처럼 느껴져야 사람이 붙는 것이며 사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낮아짐으로 붙어오는 시너지(synergy) 효과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7-8).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자로 살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인격을 나타내어 하나 되게 하고 공동체를 세워 가는 신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칭찬하는 에베소 교회의 평신도 오네시보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네시보로를 소개하는 내용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말씀은 16절에 “나를 자주 유쾌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새 번역에는 “그는 나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라고 번역되어 있고, 원어에는 “아나푸뉘코”라는 말로 활력을 불어준다. 생기를 준다. 싱싱하게 만들어 준다는 뜻입니다.
오네시보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실망과 좌절에 빠졌을 때 활력과 용기와 생기를 불어 넣어준 사람입니다. 감옥의 암울한 자리에서도 싱싱한 소망과 전도의 불타는 열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바울에게 포기할 수 없는 믿음과 용기를 주었던 신자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런 오네시보로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면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존경하고 싶고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늘 이런 기도를 하고, 이런 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물질이나 어떤 힘에 굴복하지 않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 곁에 있게 되면 어쩐지 흐뭇하고 용기가 생기며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말없이 사랑하고 남의 장점을 보며, 말없이 가능성을 믿어주며, 빛도 없이 희생하는 사람 곁에 있게 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런 사람을 알게 될 때 벅찬 마음을 더욱 강하게 느낍니다.’
정말 누구와 친구가 되고 싶습니까? 단점을 말하고 고민에 시달리고 우울해 하는 친구가 아니라 생생한 활력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친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들, 격려를 하는 사람들,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을 내 곁에 보내주소서! 저는 약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성도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생기를 주는 이웃을 갖는다는 것은 살맛나게 만드는 일입니다. 좋은 믿음의 친구와 함께 한다는 것은 복입니다. 용기를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행복 중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바로 오네시보로가 바울에게 그런 친구였습니다.
바울이 1차 2차 3차 복음전도하며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실패와 절망, 좌절에 부딪칠 때마다 그런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그런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축복된 주의 사역을 하면서 친구를 잃습니다. 아닙니다. 일을 위한 것보다 사람을 얻는 것은 더 소중한 것입니다.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사람이 아니라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해 주는 오네시보로와 같은 사람이 있어야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 생활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목사님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목사님에게 믿음의 빚을 진자이며 사랑의 빚을 진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그래도 기도하고 가정을 걱정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신 분이 그분입니다. 좋은 믿음의 친구였고 예수 믿기 때문에 만난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잃지 않는 것이 예수 잘 믿는 신자입니다.
다시 바울을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6:17-18을 보면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 주라”는 말씀이 너무 신 바람납니다.
오늘의 신자들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시원케 해주고, 용기를 돋아주며, 부족한 것을 보충해주는 믿음의 신자가 필요합니다. 마치 어두운 트렁크 속에 보관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 긴요하게 사용되는 스페어 타이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 말없이 숨어 있다가 이상이 생겼을 때 나타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주고 시원스럽게 일이 풀리도록 해주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며 서로의 도움 속에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서로의 동반의존(co-dependence)입니다. 혼자서는 못삽니다. 사람이 늘 강하고, 늘 성령 충만하고 늘 은혜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믿음의 친구가 필요합니다. 용기를 주는 친구, 생기를 불러 넣어주는 친구, 부족한 것을 보충해주는 영적인 동역자, 믿음의 동지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이었던 엘레나 루즈벨트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녀의 자서전을 보면 눈물 없이는 읽지 못할 정도로 얼룩진 일생임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10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뒤 고생을 하며 자랐고 한번도 풍족하게 돈을 써 볼일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돈에 대해 말하길 ‘돈은 눈물과 땀으로 그려진 종이’라고 표현할 만큼 고통의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20살 때 루즈벨트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젊고, 패기 있고, 장래성이 있는 남자인 루즈벨트,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관절염에 걸려 다리가 말라버리는 불행을 맞게 되었습니다. 루즈벨트는 하는 수없이 휠체어에 쇠붙이를 대고 다리를 고정시켜 타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즈벨트가 엘리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불구자가 되었는데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하오?
엘리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내가 그 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줄 알았나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이 예요. 그리고 하나님도 당신을 사랑하고 계시잖아요.’ 이 말은 다리 불구로 열등 의식과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루즈벨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게 되었고 1932년 다리 불구임에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1936년 재선, 1940년 3선, 1944년 4선까지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미국 대통령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구의 남편에게 용기와 희망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던 엘리나 그는 루즈벨트의 영원한 아내이기도 했지만 영적인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당신도 이런 인격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잘못을 파헤치고, 실수를 질책하고, 단점을 뽑아내어 상대방을 허물어 버리는 신자보다는 언제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기에 하나 됨이 있고,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16절에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바울이 칭찬을 합니다. 지금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 죄수로서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이런 바울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의 진실을 평가해주고 인정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인간 관계는 한사람의 인간됨을 순수하게 인정해주는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준다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모습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을 그대로 이해해주고 알아주시는 인격으로 사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간음한 여인을 보고 그 여인의 고민을 이해하며 죄인으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셨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고민하는 니고데모를 이해하셨습니다. 물질의 욕망과 습관화된 악에 익숙한 삭개오를 이해해주셨습니다. 동전 두 푼을 헌금 통에 넣는 과부의 심정과 신앙을 이해해주시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인정받고 살려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입니다. 때문에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느 곳에서나 소속감을 갖기 원하며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교회이든 가정에서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 입맛에 맞는 것만을 고른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실증이 나고 별로 오랫동안 사귐을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경우였음을 기억해야합니다.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후 복음 사역을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침)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어떤 음성이 들려졌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눅 3:22).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한다는 인정과 너로 말미암아 기쁘다는 확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먼저 용기를 주셨습니다.
신자의 교회생활 가운데 가장 약한 부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 인격, 자질을 인정하지 않는 점입니다. 이제부터 서로 먼저 인정해주어야 서로 힘을 얻습니다. 나의 신앙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도 꾹 참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너그러움 속에 일하는 재미가 있고 소속감이 더욱 강하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가슴에 품을 수 있고 사랑으로 껴안을 수 있는 그런 곳에 하나 됨과 교회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네시보로를 칭찬할 때 17절에 보면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가정에 직장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아픔을 당하는 사람에게 찾아가 그 아픔을 나누는 따뜻한 사람이 그립습니다. 우리는 받으려고만 하지 베푸는 것에는 부족합니다. 돌아오는 몫을 챙기는 일에는 발빠르게 움직이지만 다른 사람의 이득을 위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너무나 삭막한 광야에서 사는 것처럼 메말라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바꾸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아픔을 당하는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십시오. 서로 염려해주고 사랑해 주는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네시보로라는 에베소 교회의 한 성도에 대한 바울의 칭찬을 보았습니다. 그와 같은 신자가 교회에 절대로 필요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고, 용기를 북돋워 줄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사람, 고통 받는 사람을 염려해 주고, 자기의 시간과 정성을 들여 헌신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오네시보로가 바울 곁에 있었기에 바울의 전도여행이나 교회를 세우는 사역은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장하고 축복된 교회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려면 바로 이런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오네시보로와 같은 믿음으로 하면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말하길 ‘하나님의 임재가 뚫고 들어가지 못할 인간의 상황은 없다’고 했습니다. 먼저 베풀고, 사랑하고, 용기를 주고, 이해하고, 염려해주면 어떤 얼음도 녹아버립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때까지 그 모습을 보이십시오. 여기에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하나 됨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사랑을 깨달을 때까지 이런 삶을 살아가십시다.
예화를 말씀드리며 마칩니다. 어느 청년이 전쟁에 나가 두 눈을 잃었습니다. 그는 장님이 되었다고 원망하며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대에서 붕대를 풀기 전에 의사가 말하기를 다행히도 한쪽 눈은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희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한쪽 눈만 있으면 애꾸눈이 아니냐고 하며 원망을 하며 야단입니다. 그가 불평 속에서 붕대를 풀자 눈앞에 제일 먼저 보이는 얼굴이 어머니였습니다. 그
런데 웬일입니까? 놀랍게도 어머니의 한쪽 눈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제야 이 청년은 자신의 눈 하나가 어머니의 눈인 것을 깨닫고 어머니를 껴안으면서 깊이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알 때까지 묵묵히 사랑을 보입시다. 오네시보로처럼 바울에게 용기와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고 어느 곳에서든지 영적 동역자며 믿음의 동지로 쓰러지는 약함을 일으켜주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안에서 하나입니다. 하나된 사람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의식과 믿음이 있는 곳이 교회이며 신앙의 가정입니다. 하나됨을 파괴하려는 사탄을 물리치고 믿음으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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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하라(역대하 14:1-13) (2) | 2025.06.29 |
| 믿음으로 공간을 채우라(누가복음 11:23-28) (0) | 2025.06.29 |
| 믿음으로 파워를 높여라. (고린도후서 12:1-10) (0) | 2025.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