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언자들의 재물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이후 왕정시대가 도래하면서 경제성장을 하였고 이러한 경제성장 이후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이는 부자들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시와 억압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메시지를 예언자들이 선포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예언이 독특한 것은 예언이 그 당시의 왕정과 정치 제도에 대해 강한 비판을 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재판 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는데(암 5:7; 사 5:23;미 3:9-11; 렘 22:13-17), 그 예언의 통렬한 비판 대상은 농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에 대한 권리를 상실케 했던 대지주들과 채권자들이었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으로 인해 이스라엘에는 땅이 몇몇 대지주들에게 속하게 되었고, 많은 농부들이 그들의 땅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사 5:8; 미 2:1-3; 겔 22:19; 합2:5-6). 그리고 당시에는 소비자들을 착취하는 상인들도 있었다(호 12:8; 암 8:5; 미 6:10). 선지자들은 가난은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부유한 자들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믿었다(암 3:9; 사 5:8; 렘 5:27; 겔 45:9; 말 3:5).
선지자들은 경제학 이론가들이 아니라 단지 사회비평가였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따라 부유한 자들의 행동에 수반되는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 주려고 하였다. 그들은 가난이 우연히 혹은 숙명적이거나 게으름으로 인해 오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가난이란, 부유한 자들이 그들의 탐욕으로 인해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저버린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했다. 부유한 자들은 그들의 능력과 재원을 공동체를 발전시키는데 쓴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유대 관계를 파괴했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 일으켰다.
대천덕 신부는 그의 저서 「토지와 경제정의」라는 책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들에 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로 뒷받침되었던 상류 계급의 모든 생활 방식-상아 궁전, 주연(酒宴), 과식, 향락과 음악에 대한 탐닉-은 농부 출신 선지자 아모스에 의해 성경에서 가장 신랄한 언어로 정죄 당했다. 그 당시 글을 쓰는 선지자는 아모스가 처음이었지만, 그 뒤를 이어 호세아, 미가,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 같은 뛰어난 선지자들이 나타났다.
아모스는 땅에 굶주린 투기꾼들을 가리켜 땅을 너무나 탐내어“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까지도 탐내는”(암2;7) 사람들이라고 규탄했다. 가난한 사람의 기업을 빼앗아 발붙일 곳조차 없게 하는 것도 모자라(사5:8)의 표현, 즉 서 있을 자리가 없을 때까지 참조), 그들의 머리에 묻은 티끌까지 탐내다니! 아모스는 토지개혁을 하든지 외국의 침략을 감수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경고한다.
가난한 사람을 짓밟고 곡물세를 착취하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어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너희는 의로운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성문 광장이 재판 장소였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성문’은 현대의 ‘법정'과 같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긍휼히 여기시리라(암 5:11-15).
가난한 자들이 법정에서 되찾기 원하는 기본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여호와의 율법은 가난한 자들에게서 세 가지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다. 첫째는 토지를 무를 권리이며, 둘째는 무르지 못한 경우 희년에 토지를 돌려받을 권리이며, 셋째는 안식년에 빚을 탕감 받을 권리이다. 사마리아가 사치스런 생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세 가지 권리를 거부한 데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아모스 8장에는“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4절) 부자들에게 대한 규탄이 이어진다. 실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모스의 후계자들의 메시지로 판단해 보건대, 나라가 망할 때까지 그 격차는 계속 증가했던 것 같다. 그 어떤 선지자도 지주와 상인, 부패한 관리들을 회개로 이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전 6세기의 바벨론의 지배 이후 유대 공동체는 계속해서 외부의 지배를 받았다. 바벨론 포로가 된 자들은 모두 무소유자로서 바벨론의 사막에서 그들의 생명을 존속시켰다. 포로 귀환과 함께 돌아온 자 역시 무산자(無産者)일 수밖에 없었다. 본토에 남아있던 자들도 황폐한 농촌과 도시에서 겨우 생존을 지속시켰을 뿐, 온 유대 공동체는 빈자의 삶을 영위하였다.
따라서 왕정시대의 부익부빈익빈 구조가 사라졌다. 모두가 빈자이므로 빈자일수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들이 되었다. 반대로 지배자인 외국인들은 우상을 좇는 불경건한 자들로 인식되었다(사 63:9). 그러나 이렇게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이방인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 갚아주신다(삼하 31:39: 렘 50:4). 한편 이러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안정과 부를 축척한 계급이 생겼으니 이들은 사제계급이었다. 이들은 제정일치 사회 속에서 국가전반 생활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고 종교세를 받음으로 부를 향유할 수 있었다. 이 종교 지도자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셈이다.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사회계층은 재산의 몰수로 인해 소멸되었고, 유대인 중 대부분은 바벨론 집단 농장의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귀향 이후에는 유대인들이 비유대인들로부터 압박과 착취를 당하게 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부자는 불경건한 자(사53:9), 빈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욥19:25; 시9:2; 69:19)와 동일시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사제계급이 점차 새로운 부자로 등장하였다.
예언자들의 재물관의 특징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이스라엘은 사회 전체의 부패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자들의 경고를 무시한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부패, 즉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 거래상의 사기, 집과 토지의 축척 등을 고발한다. 이것이 앞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 원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오늘날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조적으로 조직적인 죄악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공의 실현될 수 있도록 제조적인 장치를 강구하는 일과 개인적으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가난한 자들이 구조적인 모순으로 인해 희생과 고통을 당하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이를 테면 부동산 투기 단속을 강행함으로서 오히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게 되는 피해를 입도록 해서는 안된다. 부동산 분양 가격에 매달리지 말고, 오히려 집이 없는 서민들을 파악하여 실제로 그들의 소득 수준에 맞게 장기임대제도를 도입하여 집을 마련해 주는 정책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더 이상 2년 만에 전세금을 5,000만월씩 올리고, 월세를 얼마 더 올려주지 않으면 가계문을 닫는 일이 없도록 특단의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4. 지혜서의 재물관
1) 욥기
욥은, 부유한 자들이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어떻게 그들을 가난하게 만드는가 하는 방법을 고발하는 발언을 한다. 그 곳에는 경제적인 범좌들의 목록이 총망라되어 있다. 지계표를 옮기고 양떼를 빼앗는 사람(2절), 고아와 과부의 가축들을 빼앗는 사람들(3절), 육체적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숨는 가난한 사람들(4절), 또한 가난한 자들은 자기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들에 나가 사냥하며, 떨어진 이삭들을 줍고(5-6절), 그들은 입을 옷과 살 집도 없으며(7-8절, 10절),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자녀들을 대부금의 저당물로 붙잡았다(9절). 욥은 가난한 자들의 곤경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은 왜 억압자들은 가만히 놔두는가에 대해 궁금해 한다.
그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욥이 취하고 있는 또 다른 접근법은 좀 더 긍정적인 것이었다.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간과하는 하나님을 비난하기보다 욥은 이제 자신이 가난한 자들을 곤궁을 줄이기 위해 한 일에 대해 주장한다(29:12-30). 욥은 정말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가난한 사람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모든 면에서 구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으며(29:12), 불구자들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29:15), 과부들을 위로하기를 아끼지 아니하였다(29:13). 욥은 그 자신을 “빈궁한 자의 아버지”라고 불렀다(29:16). 그는 생소한 자들의 일을 해결해 주기도 하였으며, 겁탈당한 물건들을 빼앗아 다시 돌려주는 일도 했다고 설명한다(29:16-17). 욥은 그가 지닌 부로 가난한 자들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욥은 가난한 자들이 압제자들에게서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 침울하게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이 빈곤의 문제를 직접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 역시 빈곤은 부유한 자들에 의해 야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빈곤은 부유한 자들이 취하는 행동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지, 결코 가난한 자들의 행동이나 그들의 취한 자세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들이 그들의 가난이란 운명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책임을 지고 있음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분야이기도 하다.
욥기 29장에 나타난 욥의 회고에 보면 욥은 결코 자신의 부와 권세를 남용하거나 오용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들은 ‘지배와 종속’, ‘풍부와 빈곤’, ‘편안과 고통’ 사이에 나타나는 현실적 차이를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왔다. 더구나 부와 권세의 도덕적 책임에 대해서는 거의 외면하여 왔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부와 권세는 하나님의 지헤와 공의에 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는 달리 부와 권세는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를 이루기 위하여 쓰이는 도구이다.
2) 잠언
대개 현자들은 성공과 번영과 행복을 추구하는 자로 여겨졌다. 그들은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생활 하는 가운데 부딪치는 여러 문제들을 대처해 가는 가장 효과적인 길을 찾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현자들은 빈곤이나 부로 인해 당하는 함정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30:7-9)
빈곤으로 인해 나타나는 고난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멀리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단계들을 취하게도 할 수 있다. 빈곤과 부유함은 모두 위험한 양극단의 현상인데, 왜냐하면 두 가지 현상 모두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언서는 빈곤이나 가난 혹은 다른 주제에 대해 조직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있다. 선지자들은 가난이 부유한 자들의 탐욕과 허욕에 의해 생겨났다고 했다. 그러나 현자들은 빈곤의 근원에 대해 다른 각도로 보고 있다. 현재의 가난은 술취함과 게으름과, 태만의 결과로 가르치는 본문들이 많이 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10:4).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워하느니라....”(20:13).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21:17).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6:10-11)
실제로 현자들은 젊은이들이 자기 훈련의 부족으로 인해 오는 가난을 피할 수 있도록 다음 세대에게 경계하려고 그러한 지혜의 말들을 한 것이다. 그들은 13장 18절과 같은 말들을 많이 한다.“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지키는 자는 존영을 얻으니라.” 현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가장 동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자들마저도 그들을 멸시하는 것을 지적하면서 좀 더 강조하여 조언했다. “가난한 자는 그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아니하겠느냐”(19:7)
실제로 현자들은 가난한 자들에 대해 동정심을 보였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21:13).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정의로 대하는 것이 왕의 기본 임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 위가 영원히 견고히 서리라”(29:14). 고대 이스라엘의 현자들은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의무를 이스라엘 국민에게 확대하여 적용시켰다.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모든 국민들에게 지워져 있던 종교적 의무다. 가난한 자들에게 보이는 호위는 하나님에게로 보이는 호의로 여겼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19:17)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에 있어서 가난한 자들이란 여호와의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중요하다. 잠14:31; 17:5; 22:2은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는 것은 신성모독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인 표현으로 잠언19:17은 “가난한 자를 불씽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잠14:21은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반면에 잠28:27은 가난한 자를 못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데이비드 앗킨슨은 그의 저서, 「잠언강해」에서 잠언의 부에 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대개 ‘부’또는 ‘재물’은 ‘가난’과 대조되고 있으며, 따라서 사치가 아니라 충분함을 의미한다. 부는 인간의 노동(10:16, 13:11), ‘부지런한 손’(10:4) 그리고 ‘여호와의 축복’(10:22; 참고13:21)의 결과다. 부는 친구를 사귀거나(14:20), 가난한 자를 지배하는데(18:23) 사용될 수 있다. 불의하게 모은 보화는 삶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해 주지 못한다(10:2).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부유한 것처럼 가장 하거나 큰 부를 가리기 위해 가난한 척 꾸미려는 유혹이 존재한다(13:7).
충분한 부는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10:15; 18:11), 자자손손에게 유산을 남겨 줄 수도 있다(13:22). 하나님이 베푸시는 충족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며 자기에게도 더 많은 것이 생긴다는 자주 반복되는 공식과 연결되고 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11:24). 돈과 부를 잘못 쓰는데 대한 경고도 있다. 재물은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케네디 T 에켄은, 바클레이 패턴 구약주석에서 부자의 유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첫째, 부는 인간에게 안정을 제공한다(10:15, 18:11)
부자들은 먹는 것에 구애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적인 문제들에 쉽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그와 같이 여유가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매우 취약하여 생존의 기반이 불확실하다.
둘째, 부는 사람에게 친구가 있게 한다(19:4, 14:20: 19:7)
부 때문에 생긴 친구들이 과연 친구일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 잠언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본성, 가난한 자와는 그 누구도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을 따름이다. 가난한 사람은 이웃에 대하여도 인내해야 하며 심지어 자기 형제와 친척들로부터 냉대를 감내해야 한다. 가난한 자와 벗이 되려면 실로 많은 것이 요구된다.
셋째, 부는 사람에게 권력을 준다(22:7)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힘은 부자의 손아귀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를 운영해 나가며 시장의 가격을 결정하며 노임을 지불하고 돈을 빌려준다.
넷째, 부는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준다(18:23).
가난한 사람은 특히 자비를 얻고자 할 때 자기가 할 말을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환심을 살 수 있는 말을 준비해야 한다. 부자는 실로 무례하게 행동할 수도 있으며 가난한 자를 무시하고 쫓아버릴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부한 자는 가난한 자 보다 훨씬 많은 사회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 물론 부자가 자기들의 유리한 점들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지혜롭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 어리석다는 표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회생활의 중요 영역에 있어서 부한 자들은 지혜롭게도 혹은 어리석게도 행동할 선택의 여지를 갖고 있다.
지혜자들은 부가 지혜의 결실임을 확신하였지만 모든 부가 지혜의 결과는 아님을 또한 분명히 알았다. 그러므로 사람이 획득한 부는 지혜라는 재물에 의하여 그 진정한 가치, 즉 참된 재산인지 아니면 부채인지를 평가받아야 한다. 가장 좋은 부는 가장 오래 지속하는 부로 정직한 땀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축적된 부다(잠13:11; 참조: 10:4; 12:11; 28:19).
지혜가 있을 때 진정한 근면에는 확실한 보상이 있게 마련이다. 잠13:11에서 정직하게 열심히 일을 해서 얻은 부와 하룻밤 사이에 성취한 종류의 부가 대조되어 있다. 여기에서 가리키고 있는 것은 거래와 상업상의 투기를 통하여 얻은 ‘횡재’이다 “급히 얻은”(망령되이 얻음) 이란 말은 투기꾼이 부정직한 방법이나 부정한 거래를 통하여, 또는 기타 의혹이 있는 방법을 통하여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잠언 23장 4절에 보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고 했다. 실제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부자를 부러워한다. 그래서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관심을 가지고 노력한다. 물론 사업가나 기업인들은 큰 부자가 돠어야 한다. 기업을 잘 운영해서 번성하게 한다는 것은 국가 사회에 얼마나 큰 공헌을 하는지 모른다. 결국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이나 회사원이나 교사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되기에 애쓰면 어떻게 되겠는가? 봉급은 일정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부자가 되기 위해 무리한 방법으로 공무원이 부정하고 회사원이 횡령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이 부자가 되려고 하면 부작용이 생기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일반 백성들은 받는 것을 족한 줄로 알고 잘 관리하고 선용해야 하는 것이다.
3) 전도서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전 5:10-12)
10절은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거의 고전이 되다시피 한 구절로서. 돈의 도덕적, 영적 결과에 대한 유명한 격언인 디모데전서 6:9, 10과 좋은 짝이 된다. 여기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심리적인 측면이지만, “이것도 헛되도다”라는 마지막 평가는 이 구절로부터 배울 수 있는 궁극적인 교훈을 충분히 납득시킨다. 돈이 만들어 내는 그 채워지지 않는 갈망은 노름꾼이나 실업계의 거물이나 보수를 많이 받으면서도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물질주의자들에게 두드러진다. 돈이 가져오는 중독 증세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돈이 남기고 가는 공허감이다.
가난한 자들의 상태에 대해 흥미롭게 통찰할 수 있는 것은 전도서가 모아 놓은 짧은 비유를 통해서 나타난다.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9:14-16)
이 이야기는 경제적인 차이로 인한 계층을 인정하는 사회체재의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탁월하게 일을 처리하였을지라도 잊혀지고 마는 것은, 그들 스스로 유명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부유한 자들이 가난을 합리화하는 말들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이 이룬 성과는 크기에 관계없이 그들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자는 가난과 지혜가 부유함과 어떤 높은 왕보다는 낫다고 한다(4:13).
부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열망의 이면에는 가난한 자들의 종속이라는 문제가 있다. 전도자는 어떤 악들이 부에 대한 탐욕으로 생겨나는가를 보았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너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4:1)
전도자의 말들은 주전 3세기경의 사회 상황을 잘 반영해 준다. 그는 빈곤 그 자체나 그와 연관되어 있는 사회 경제적 문제점들에게 대한 현안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들은 그의 주제, 즉 허무와 인간 상황에 있어서의 무익함에 대해 논하기 위한 예증에 지나지 않는다.
방지일은 그의 저서 「전도서」에서 나눔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기록한다. “너희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11:1)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는 말, 먹을 것을 뿌리듯이 많은 사람에게 날라 주라는 말로 받을 것이다. 우리말로 던지라고 되었거니와 버리는 심정으로 결과를 생각하기 전에 할 일을 하기만 하라는 말로 받을 것이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1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는 ‘여럿에게’ 한 말이다.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는 말로 받을 것이다. 나눠주는 것을 힘대로 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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