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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 누구에게 구해야 하는가?(욥기 42:7-9),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6.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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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이라는 영화는 용서와 치유를 담고 있는데 기독교의 부정적인 이미자를 부각시키는 작품입니다. 전도연, 송강호가 열연한 밀양의 시놉시스가 전개됩니다. 남편을 교통 사고로 잃은 서른 세 살 피아노 강사 이신애(전도연)는 아들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작은 도시 밀양에서 피아노 학원을 연후 새로운 시작을 시작하지만 그녀에게 또다른 불행이 찾아옵니다.

 

아들 준이 납치후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파괴되어 내동이쳐집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교회에 다니는 약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회복이 됩니다. 어느 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기 아들을 납치하고 살해한 죄수를 용서하려고 면회를 갑니다. 용서의 표시로 꽃 한송이를 준비해서 들 뜬 마음으로 찾아갑니다.

 

신애가 이 죄수에게 그동안 너무나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이 죄수는 자신의 잘못으로 엄청난 불행을 안겨 드려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뭔가 잘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신애가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을 받고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때 이 죄수도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은 후에 새 사람이 되었다가 자신의 말만 합니다. 자신이 용서하기 위하여 찾아갔는데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아서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기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애는 이 말에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의 용서는 안받아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순간 신애는 멍한 표정으로 그 죄수의 말을 듣다가 가져간 꽃을 떨어뜨립니다. 자신이 용서하려고 찾아갔는데 하나님께 이미 용서받았다고 그렇게 표정이 밝고 기뻐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신애는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품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괴롭히고 방해합니다.

 

그동안 기독교는 용서의 차원에 있어서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그 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용서받은 것에 기뻐하기만 한 게 아닐까요? 깊은 상처와 아픔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고통을 외면한 채 말입니다.

 

 

1.사람에게 잘못한 경우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욥의 세 친구는 욥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날려버리고 10남매가 하루 아침에 죽어가는 비보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몸에 욕창이 생겨서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해 기왓장으로 긁어야만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위로하러 갔다고 너무 안타까워서 욥에게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렇게 하다가 욥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고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욥에게 위로하러 갔다가 오히려 욥의 속을 뒤집어 놓은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 가운데 제일 연장자인 엘리바스와 그의 두 친구에게 욥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용서를 구하라고 제안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욥이나 그의 친구 세 명에게 진노하십니다(7). 이러한 상황에서 욥은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욥은 자신의 교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합니다.

 

욥기 42 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 친구가 욥에게 잘못한 것은 누구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까요? 사람에게 잘못한 경우에는,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요? 하나님께만 죄를 자백하고  사함 받으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의 세 친구가 욥에게 당신의 죄 때문에 이러한 고통과 불행이 닥쳤으니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권면이 옳지 않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란 불교용어로서 선악에 대한 결과에 따라 보응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당신이 잘못 살면 불행이 찾아오고 당신이 바르게 살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욥에게 찾아온 불행은 욥의 어떤 잘못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여주기 위한 시련입니다. 고난이 때로는 죄의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은혜의 기회로 주십니다. 욥에게 주신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기회였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고난당한 자에게 찾아가서 위로하기는커녕 고난 받는 이유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2.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반드시 찾아가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그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받기 위하여 이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8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세 친구들이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는 것은 욥에게 용서를 구하고 화해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욥이 세 친구를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욥을 기쁘게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욥이 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욥의 기도를 받아들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대로 행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여호와께서는 욥의 기도를 받으십니다(9).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의 복을 주십니다(10). 갑절의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완전하고 풍부하다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께서 욥을 온전히 용납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욥이 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은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용서의 기도를 받아야 합니다. 욥이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켜 주십니다. 친구들의 죄가 용서함 받고 하나님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는 사건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표합니다.

 

마태복음 5 23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이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 형제와의 불편한 관계는 최대한 빨리 풀어야지 오해와 분노로 인하여 상처가 곪아터지도록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는 사람들과의 관계회복을 포함합니다. 사람들과의 잘못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먼저 용서를 구하고 기도를 받고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유대교는 가해자의 회개가 없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로 보지 않습니다. 가해자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는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회개하지 않는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정의와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유대교에서 진정한 용서는 다음과 같이 한다고 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라. 하나님과 공동체에게 잘못을 고백하라. 공개적으로 참회하라.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라. 피해자에게 보상하라. 피해자에게 진실로 용서를 구하라. 필요하다면 피해자의 도움을 받아라. 그리고 세 번까지 용서를 구하라. 잘못을 저지르게 할 조건들을 피하라. 처음 잘못을 저질렀던 것과 같은 상황을 만나면 다르게 행동하라.

 

 

3.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언제나 빚진 자의 심정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위하여 용서하는 과정은 잘못된 것일까요? 요셉이 애굽에 양식을 사러 온 자기 형들에게 보자마자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용서했을까요? 요셉이 형들에게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받아들입니다( 45:8). 이것은 요셉이 지나온 날을 되돌아볼 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신 후에 보복이 두려워 요셉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혹시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는 아니할까" 하고 아버지 야곱의 유언을 전합니다.

 

창세기 50 17절입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용서의 확신을 주지 못한 것 같아서 슬퍼합니다. 용서를 받아야 할 요셉의 형들은 17년이 지난 후에도 (야곱이 130세에 애굽에 와서 147세에 죽음)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동생 요셉으로부터 그들의 잘못을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용서받아야 할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에 가득차서 다른 사람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근간에 일어난 미투 운동도 비슷한 패턴을 받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피해자인 모검사가 자신이 성 폭행 당했다는 것을 폭로합니다. 모교회의 간증 집회에서 자신이 과거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받았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가해자의 모습을 보고 격분한 나머지 폭로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 사실을 폭로하면서 피해자는 이렇게 항변합니다. 회개는 피해자에게 직접 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 검사의 입장이 제겐 얼마나 충격적으로 와 닿았는지 모릅니다.

 

오히려 세상이 용서에 대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구나! 우리가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일 때 피해자가 이런 반응을 나타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잘못한 것을 직접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가졌던 용서를 구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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