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가 팔리리라(마태복음 26:1-19)
수요일날 에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휴식을 취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틀만 있으면 유월절이다. 그때 인자는 팔려서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시점에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고 하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모여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체포해서 죽일 것인지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킬지 모르니 명절 기간에는 하지 말자는 원칙을 정합니다.
유대사가 요세프스의 증언에 따르면 네로 당시에 유월절에 256,500마리의 양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합니다. 양 한 마리 당 대개의 경우 10 사람 정도가 한 무리가 되어 제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다면 유월절에 모여드는 숫자는 약 200만명이 훨씬 넘는 숫자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게 하셨습니다(요 1:29).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가 가득 든 옥합을 들고 와서 음식을 잡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5절에 보면 이 향유는 순전한 나드 한근입니다. 나드 향유는 인도에 '나드'라는 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것인데 순전하다는 것은 백퍼센트 진액을 말합니다. 이 향유는 너무 비쌌기 때문에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는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옥합 안에 밀봉되어 있어 한번 쓰려면 옥합을 깨뜨려야 했습니다.
이 여인의 감사에 넘치는 사랑의 헌신과 예수님을 죽이려는 가야바와 가롯 유다의 계획이 대조를 이룹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분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왜 저렇게 비싼 향유를 낭비하는가?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텐데.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사해 주시고 새로운 주신 은혜를 그 어떤 것으로도 갚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머리로 계산하였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의 장례를 알고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앞두고 계셨던 예수님께는 큰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시가로는 삼백 데나리온 나갑니다. 즉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에 보면 제자들 가운데 분개했던 주동자는 가롯 유다였습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돈궤를 맡았는데 이따끔씩 돈을 훔쳐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4장 6-7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인을 괴롭게 하느냐? 이 여인에 내게 좋은 일을 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지만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은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다. 이 여자가 행한 일은 복음이 전파되는 온 천하에 기억되리라.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예수님께 아낌없이 드리는 헌물도 낭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롯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팔아 넘길테니 얼마나 주겠느냐고 거래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 3절에 보면 가롯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때부터 가롯 유다는 사람들이 없을 때에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음모는 가야바(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행 4:6, 눅 3;2)와 대제사장들의 간계와 가롯 유다의 공모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로마와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천재적인 달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팔레스틴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임기가 1년마다 로마에서 임명하였습니다. 가아바는 주후 18년에서 36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그 자리를 지키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가롯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넘기겠다는 것은 스가랴 11장 12절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은 삼십은 출애굽기 21장 32절에 보면 어떤 사람의 소가 어떤 노예를 죽였을 경우 소 주인이 지불하는 액수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시대에는 은 삼십의 가치가 물가상승으로 가치가 10분의 1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아 넘기려고 했을까요? 평소에 돈에 대한 사랑이 그를 몰아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동기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는 열심당원으로 팔레스틴에서 로마의 통치를 폭력으로 제거하려고 했는데 예수님이 죽음을 생각하고 게시는 것을 보고 메시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배신했을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즉 민족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유다의 기대에 어긋났습니다. 결국 실망 속에서 유다의 헌신은 미움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마침내는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시편 41편 9절입니다.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렇게 상황이 진행되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목요일 저녁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그렇게 싶어하십니다(눅 22:15). 최후의 만찬을 할 장소까지도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십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3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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