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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청결과 무화과 사건(마 21:12-22)
수단과 목적이 바뀔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예배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받을 축복을 계산하고 교회를 선택할 때도 헌신이나 희생보다 유익이나 혜택을 고려해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축복을 간구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영광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시에 제사장들은 제사 드린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는 형식적인 것으로 해치우는 것이고 관심은 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은 수단과 목적을 제 자리로 돌려 놓아야 한다는 경고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어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성전 청결 사건이 주일에 행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데 반해, 마가복음에는 월요일에 행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스룹바벨 제 2성전을 8년에 걸쳐 개축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신 성전은 지성소가 아니라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특별히 먼 곳에서부터 와서 예배를 드리는 순례자들이 희생 제사를 드리는 데 필요한 짐승, 나무, 새 포도주, 소금, 기름 등이 팔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취지는 좋은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오는 유대인들이 멀리서 소나 양이나 가지고 올 수도 없고 또 외국돈을 성전에 바칠 수 없으니까 성전에서 소나 양을 팔고 돈을 환전해 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가장 거룩한 성전에도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성전 밖에서 했지만 점점 공간이 부족해서 성전 뜰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성전뜰은 이방인이 기도하는 곳입니다. 신앙이 거래가 되거나 장사의 수단이 되어사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돈을 벌고 성공하는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수단과 목적이 바뀌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헐라 3일만에 지으리라고 하신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잘못된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이 기도하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행위는 제사장들에 의해 도입되었습니다. 상인들은 장사할 부스를 얻기 위하여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는 데, 이 돈 중의 일부는 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의 돈궤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를 위해 이렇게 부당한 거래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정화를 위해 채찍을 드셨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7장 11절에는 성전이 악용되고 있기 때문에 그 형벌로서 성전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성전으로 나오는 지체 부자유자들의 벙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아이들이 찬양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에 대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 광경을 보고 분노합니다. 예수님은 시편 8편 2절의 말씀이 자신에게 적용하심으로 이것을 읽어본 적이 없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젖 먹이 아이들의 호산나 찬양소리는 예언의 성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베다니로 가셔서 거기에 유하셨습니다. 베다니는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거기에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이 살고 있었는데(눅 21:37), 거기에 유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에 성으로 다시 들어오셨는데 배가 고프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전날 밤 밤새도록 기도하시느냐고 지치고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길 가에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서 따 먹으려고 하셨는데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으면 그 열매를 따먹는 일이 허락되어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가난한 자의 양식으로 풍요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 다른 집에 대추를 따 먹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무화과나무의 밑 둘레의 굵기가 약 1m, 높이가 5-6m나 되며 가지가 8-10m의 너비까지 뻗기 때문에 그늘은 기도와 명상과 휴식의 장소로 이용되곤 했습니다(요 1:48). 잎과 꽃이 무성하게 되었을 때 그 열매도 함께 열리는데 이스라엘에서는 그 무회고 열매가 열매를 일년에 두 번이나 세 번(태영력으로 6,9, 12월) 딸 수 있다고 합니다. 푸른 빛깔을 띤 무화과 열매들은 대개 6월까지는 먹을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익지 않았지만 그래도 먹을 수는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이 있다는 것은 비록 완전히 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매는 맺혔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셨는데 화가 나셔서 그러셨을까요?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즉 그것은 버드란트 럿셀처럼 제 철이 아니라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치 열매가 있는양 무성한 잎만 자랑했지 실상은 아무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처럼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가 나무였습니다.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경건을 자랑하지만 메시야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면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땅에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주여 주여 하면서 삶의 변화도 없고 생활의 열매도 맺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신앙생활하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경고입니다. 종교적 지도자들이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면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게 하였지만 그들이 안고 있는 인생의 문제를 전혀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그저 주일날 한번 예배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선데이 크리스찬이 아닙니까? 만약 계속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틴에 있는 여러 나무들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나무로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를 말랐다는 것은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렘 8:13 ; 호 2:12). 이것은 앞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합니다(눅 13:7).
제자들이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마가복음 11장 20절에 보면 뿌리채 말라버린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런 일뿐만 아니라 이 산 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믿음의 기도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삼지 못하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경고요 우리에 대한 믿음의 경고입니다. 믿음이란 그렇게 죌 줄로 믿습니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을 응답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에는 믿음의 기도와 더불어 능력있는 기도의 두 번째 조건으로 용서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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