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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 주간 설교 둘째 날

by liefd 2026.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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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계명( 22:34-4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은 그들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논쟁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가지 논쟁이 나옵니다.

 

첫번째 논쟁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가려는 속셈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쾌하게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알아서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쟁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서기관들이 묻습니다.

 

우리 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첫째가 장가들었다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상속자가 없으므로 아내를 둘째에게 물려주고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곱째까지 내려가면 부활 때에 그 아내는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간다고 하십니다. 재혼한 사람들은 부활하면 누구의 아내가 되는 걸까요? 성형수술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까요? 성형수술 전 일까요? 후일까요? 부활체로 변하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세 번째 논쟁은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네 번째 논쟁은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이냐? 이번에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먼저 묻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 되겠느냐?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인간적 메시야의 기대를 신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로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은 세 번째 논쟁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연합 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똘똘 뭉쳐서 집중 공격을 합니다. 첫 번째 논쟁에서 바리새인들이 깨치고, 두 번째 논쟁에서 서기관들을 묵사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 묻습니다.

 

첫 번째 논쟁에서는 바리새인들의 제자와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했습니다. 두 번째 논쟁에서는 사두개인들이 그날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이번에는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3년 동안 제자훈련을 받았지만 구체적인 상황 앞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율법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랍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당시의 유대인들은 가장 중요한 계명, 하라는 계명 248, 덜 중요한 계명, 하지 말라는 계명 365 , 합쳐서 613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248개는 신체의 구조가 248, 365개는 1 365일을 뜻한다고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율법사는 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는 것이 덜 중요한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더 잘 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조항을 만들었는데 나중에는 작은 것에 집착해서 본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신앙 생활하다 보면 작은 것에 집착해서 큰 것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신앙에 회의가 오고 낙심이 될 때 그 문제에 빠지지 말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돈 문제로 인해서 걱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돈 때문에 이렇게 신경 쓰게 만드십니까? 그럴 때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은 돈 문제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돈이 우리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돈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면 안됩니다.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일까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이것은 신명기 6 4-5절의 말씀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고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으로 올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신앙을 삶의 한 부분으로 생각합니다. 피자 한 조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냐, 교회냐, 세상 일이냐 교회 일이냐, 돈이냐 하나님이야,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이 삶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진다면 신앙생활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들을 통해서 너희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한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어떤 일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너무 잘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라고 합니다.

 

둘째로 큰 계명이 무엇일까요?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한일서 4 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분명한데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간 자신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 자신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다른 사람의 존재도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하신다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그 사랑에 감격하여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 보내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받으면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 서기관이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 32, 33).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이 서기관의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염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참인가 아닌가를 보여주는 기준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그 사랑이 반영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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