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그 동안의 여러분의 수고가 고난에서 외관으로 이어지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여러분의 생애에 열리는 북. 누리는 복, 나누는 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영광
과 고난의 비율이 50:50 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의 연속으로 힘들어 하는 분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자기는 고난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의 삶은 고난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대개 고난에서 고난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옛날 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도 못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젊어서 고생은 끝까지 고생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힘드는 순간에도 딛고 일어서는 것이 그래도 나있는데 요즈음은 한번 꼬이면 좀처럼 풀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의 기질 가운데 하나는 한번 잘되면 계속해서 잘되고, 한번 안되면 계속해서 안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소 극단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축구 경기를 해도 후반전에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안됐다 하더라도 한번 잘해보자고 마음을 먹으면 역전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역사 가운데 고난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질이 생긴 것같습니다.
신자는 자신이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자신의 감정에 좌우되지 말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컨대", 오히려 불신자들보다 신자들이 고난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어려운 일을 담할 때 인생을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고난의 이유를 너무 캐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냥 고난을 고난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믿는 아내와 믿지 않는 남편이 고난을 당할 때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누가 믿음이 좋은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은 살다보면 그릴 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믿는 아내는 모든 게 귀신의 역사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불신자들에게 모든 게 귀신의 역사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지 마십시오. 불필요한 거부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상하게도 신자들이 고난을 너무 미신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이렇게 되는 것은 사람이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정이 안 풀리는 것은 자리가 안 좋여서 그렇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사업이 잘 인되는 것은 교회를 잘못 다녀서 그렇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잘못한 것을 조상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고난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반응하지 마십시오. 고난에 대한 피해의식을 버리십시오. 자신이 잘못한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고난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해도 해도 너무 한다" "그렇게 한다고 내가 달리질 줄 아느냐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담하게 해고를 당하거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난의 이유를 너무 따지지 마십시오. 타인의 고난에 대해 너무 쉽게 속단하지 마십시오. 고난의 크기 때문에 너무 좌절하거나 탄식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이런 고난을 당하다니 무슨 죄가 많아서 그 사람이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욥이 무슨 죄가 많아서 그런 고난을 당했던가요.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을 그런 식으로 대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도 그런 식으로 대했습니다. "우리도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당해도 알리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신자의 삶을 가리켜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0절에 보면 "주님을 위하여 소유를 포기한 사람들은 백배의 보상을 이 세상에서 받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마태복음이나 누구복음에서는 여러 배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전국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받습니다. 그러나 핍박을 반드시 겸하여 받는다고 했습니다(막 10:30), 가치관의 충돌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영적인 테러현상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는 고난을 당할 때 그냥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 디시에게 부당한 대우를 만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러워서 그만두어 합니까? 아니면 마지못해 죽으라고 다녀야 합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모든 행위를 지켜보고 계심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 과정이 자신에게는 힘들어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합니다.
비록 우리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해도 분노와 수치심을 갖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목적 기운데 하나는 신자들의 본보기를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본"이란 단어는 처음 글쓰기를 배웅 때 정선을 따라 연필을 움직이며 글을 쓰는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즉 우리기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 자취를 따라가이 언니다.
신자는 정차 나타나게 될 영광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새로운 마음을 가져이 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계속해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과거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아이 합니다. 신자는 상급을 얻기 위하여 계속해서 투자해야 합니다.
문제는 현재의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고후5:10절의 말씀에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신자는 고난을 당할 때 자신이 위축을 당하거나 안믿는 사람들을 오히려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만 왜 이런가? 하는 생각으로 불행해지면 안됩니다. 오히려 차이점을 축복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간파해야 합니다. 성경은 매우 예리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주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사라지는 어떤 것을 붙들고 허전해 하게 됩니다. 괜히 내가 이런 것을 위해서 이 고생했는가 하는 후회가 듭니다.
심지어 자연계 조차도 허무한데 굴복하고 맙니다. 왜 이런 형상들이 나타나게 될까요? 이것은 바로 인간과 자연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너무나 허망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른 것은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바꾸어 가다가 결국 영원한 것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사람이 똑똑한 것 같지만 이외로 멍청합니다. 몇 번 잘못된 것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실어기는 동안에 신자가 불신자가 힘들까요? 불신자보다 신지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새신에서 신이기는 동안에 경계 되는 고통은 누구나 예외가 있습니다. 신자는 거기에다가 영적인 시험은 언제나 따라 다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고통 지수는 봉신지가 훨씬 더 크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봉신지는 고통을 당할 때 미래에 대한 기대기 없기 때문에 훨씬 더 힘들게 느껴집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잘 되지 않을 때 허무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고난을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별로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지 스위팅은 시련에 관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시련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경험이며,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우리 삶의 일부분입니다.
둘째, 시련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C. B. 윌리엄스는 베드로전서 1장 17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비록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으로 슬픔에 휩싸여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 가운데 기뻐하십시오. 이와 같은 시련은 힘든 것이지만 잠시 동안일 뿐입니다.
셋째, 시련은 헛되이 버려서는 안될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또 필연적으로 좋은 것도 아니지만 시련은 궁극적인 선을 위한 하나님의 활동을 성취시킵니다.
신자의 고난은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을 기대하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이것은 현실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얻게 될 영광의 관점에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을 때 고난은 곧 절망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사람은 고난 중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고난 뒤에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며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탄식하며 고통하며 사는 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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