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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의 주일 설교 15

by liefd 2026.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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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 어떻게 할 지를 구하라(열왕기2:9), 김덕선 목사

 

어제 마스크를 사러 약국에 갔습니다. 요즈음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드시죠. 그랬더니그 약사님이 그건 괜찮은데 사람들이 우울해서 코로나가 빨리 끝나야 될 텐데. 자신이 힘드는 것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의 우울한 것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이었습니다. 약국문을 나오면서 제게 떠오르는 단어는 코로나 우울증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을 못 만나고 이러다가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감도는 것, 이것이 코로나 우울증입니다.

 

수년 전에 신학교 강의를 할 때에 저는 학생들의 표정을 쭉 살피곤  합니다. 많이 어둡고 시무룩하다고 느껴지면 몇 분 동안 마음을 터치하는 시간을 잠깐 가집니다. 지금 내 마음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내가 왜 그러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 알아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러면 신학생들 가운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강의에 들어가면 눈이 반짝 반짝합니다. 이 세상에 내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분이 어디에 있을까요? 복음송 가사가 떠오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한 평생 살다가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10명의 진정한 친구, 100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성공한 삶이다.”라고 합니다. 모든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좋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철학자 플라톤의 뒤에는 소크라테스가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 뒤에는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고, 여호수아 뒤에는 모세가 있었고, 다윗 뒤에는 사무엘이 있었으며, 엘리사 뒤에는 엘리야가 있었습니다.좋은 스승을 만나면 인생의 목적이 생깁니다.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삶의 모범이 생깁니다. 생에 대한 의지와 열정이 넘칩니다.

 

오늘은 스승의 주일입니다. 바울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스승과 제자의 가장 아름다운 관계를 뭐니뭐니 해도 엘리야와 엘리사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마지막 사명은 사람은 세우는 일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이방신들과의 대결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에게 찾아온 것은 우울증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광야 깊은 곳 로뎀나무 아래에서 지기를 죽여 달라고 절규합니다(왕상 19:4). 자신은 여호와께서 열심히 특심하여 잘 해보려고 했는데 나 혼자 힘으로 어떻게 하겠느냐고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굴 속에서 푸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만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세 가지 사명을 주십니다. 하사엘에 가서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어둡고 캄캄한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에게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엘리야는 벧엘 신학교와 여기고 신학교에 제자들이 많았지만 진정한 후계자는 엘리사 한 사람 뿐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지금 길갈에 있는 선지 학교에 머물러 있습니다(왕하 4:38).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제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벧엘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십니다. 길갈은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며 엘리사의 중심 활동지입니다(왕하 4:38).

 

엘리야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하는데 엘리사가 같이 가겠다고 합니다. 2절 하반절에 보면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오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맹세하면 그대로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벧엘로 내려갑니다. 벨엘에 있는 신학생들도 엘리사에게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십니까? 그러고 보니 엘리야가 각 지역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에게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다 알려 준 것 같습니다. 엘리사가 나도 알고 있으니깐 잠잠하라고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알고 있지만 그 이상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승천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승천의 시간과 장소와 방법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 재림하실 때 그때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성도들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승천하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를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관계는 강의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만남의 시간을 통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너는 벧엘에 머물러 있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가라고 하신다. 엘리사가 그만 포기했을까요? 엘리사는 자신의 단호한 입장을 밝힙니다. 4절 하반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니느라 엘리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하니라.“

 

엘리사는 하나님 앞에서 맹세함으써 엘리야를 끝까지 떠나지 않겠다는 결의를 나타냅니다. 이는 이러한 엘리사의 고백은 자신의 인생을 엘리야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의탁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스승이 제자를 키우는 것이 필요하지만 제자가 스승을 따르기 위하여 찾아 뵙고 따르려고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좋은 스승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스승이 되려면 스승된 자의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따르는 제자들의 존경심도 필요합니다.

 

선생님이 나의 진로를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계속 도전해 주시고 연결시켜 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당신은 정말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당신도 어떤 위치에서 그런 역할을 하십시오. 우리는 주의 복음을 위하여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그램보다 훨씬 더 네트워크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여리고에 도착했을 때 거기에 있는 선지자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엘리사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도 안다. 너희는 잠잠하라. 그들은 스승이 어떻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과 같이 하고 본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다시 한번 너는 여기 머물라고 합니다. 여호아께서 나를 요단으로 가라고 하신다. 엘리사는 스승이 내게 부담스러운 것이 있어서 그러신가 하면서 포기할 것 같은데 물러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항상 우리를 위하고, 우리와 함께 거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 늘 곁에 있다는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6절 하반절입니다. ”여호와깨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떠나지 않고 함께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조건을 말씀하시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고난을 당할 때에도 베드로전서 221절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강 가에 서 있습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여리고에 있는 제자 50명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요단강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갑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승천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지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무엇이라고 부탁했을까요? 신학교 총장 자리를 물려달라고 했을까요? 신학교 땅 부지를등기 이전해 달라고 했을까요?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기를 구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부패한 시대에 다른 어떤 것으로는 불가능한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힘으로 안되고 능으로도 안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전에 개혁 한글 번역에는"당신의 영감의 갑절을 내게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지금 성경에는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제가 이 본문을 번역했다면 성령이 당신에게 역사하시는 역사의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엘리사는 엘리야가 사역의 현장에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당시에 백성들은 바알신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영감의 갑절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능력을 갖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인 것입니댜.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나타내고 싶었던 갈망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복음 사역의 가장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영감의 갑절과 순종의 자세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하지만 나를 네게서 데려가는 것을 네가 보면 이루어지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엘리사가 구한 영감의 갑절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승천을 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길을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가운데 불 수레와 불 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엘리사는 놀라서 소리를 지릅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라고 외칩니다.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명이라고 부른 것은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참 보호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엘리야가 보이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는 내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고린도전서 415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아버지 같은 스승은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끝까지 따르면서 본받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와 같은 스승이 너무나 필요한 시대입니다.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생명이 만들어집니다. 제자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낳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서 형성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여 주고 깨닫기까지 기다려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엘리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습니다. 엘리사가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은 엘리야와 이별하는 슬픔을 나타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가지고 돌아와 요단강 언덕에 섰습니다. 이전에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을 엘리사가 일하는 곳에다 던진 일(왕상 19:19)이 있었습니다. 이는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선지자직을 위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의 선지자 직분이 계승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멈추시지 않으시고 계속 이어가십니다.

 

그런데 난감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까 건너왔던 마른 땅이 사라지고 요단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면서 엘리야의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엘리사가 이렇게 외친 것은 엘리야에게 능력을 주셨던 하나님께 자기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간구했던 기도였습니다.

 

엘리사는 하늘로 들림받은 엘리야를 찾지 않고 엘리야의 하나님을 찾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고 신기하게도 물이 갈라졌습니다. 이와 같은 스승은 제자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우는 자입니다. 가라고 지시하는 자가 아니라 직접 갈 수 있도록 체험하게 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여리고의 제자들이 엘리사를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엘리야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그 위에 머물렀다 하고 그에게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50명을 보내서 성령이 엘리야를 들어 올렸다가 어떤 곳에 던졌을지 모르니 수색해야 한다고 요청합니다.

 

엘리사는 말이 안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엘리사에게 강청하니 때문에 오십 명을 보내어 사흘 동안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엘리야의 제자들은 스승 엘리야의 영이 올라가고 육체는 분리되어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아가 그들에게 내가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훈계합니다.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과 자녀들에게 영감의 갑절이 더욱 필요합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상태란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찬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면 악하고 더러운 생각이나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밀어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말에 민감하고 상처를 받는 것은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기쁨과 사랑만 충만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는 우리 믿음의 분량이 작은 간장그릇 만합니다. 그래서 금방 성령 충만을 입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듣든지 어떤 찬송을 부르든지 눈물이 나오고 기쁨과 사랑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늘 마음이 컬컬하고 답답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물탱크만큼 커졌는데 들어오는 양은 옛날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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