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 19절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나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여 저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신앙고백을 하는 과정을 일컬어 해산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이 믿음이 자라고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열심히 헌신하며 봉사하는 것으로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갈 4:15).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완전한 요소가 있어서 한 순간 시험을 당할 때 신앙이 무너지고 허우적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이 다시 해산하는 수고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장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다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과정을 해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 인격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게되는 과정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중생(重生)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과정이지만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게 하는 성화의 과정은 일평생 꾸준한 노력과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 나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인내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고 삼 년 동안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으로 교훈 하시고 몸소 실천하여 본을 보이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였습니다(요 13:15). 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였습니다(마 11:29).
성도가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지식적으로나 이론적으로만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까지 철저하게 예수님의 모습으로 그 인격이 닮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빌 2;5). 이러한 일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해산하는 수고」를 말한 것은 그리스도교 복음운동과 관련된 적절한 비유입니다. 그는 전도를 통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되는 일을 해산하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15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여 자식을 낳는 산모의 심정을 비유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신비로운 축복과 또한 죽음을 각오하는 고통의 의미를 다같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6:21).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의 강조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완성되어 가도록 하기 위하여 노심초사하며 고통을 감수하는 부모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9에 “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적절한 자양분을 공급해 주어야 됩니다. 육신의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양질의 음식을 섭취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하게 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양분을 공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2).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우 처음 바울이 전한 순수한 복음을 받았을 때 신앙이 자라고 주님께 대단한 열심을 다해 봉사를 다짐했으나(갈 4:15), 거짓 선생들의 잘못 된 교훈을 받아들여 탈선하는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갈 3:1-3).
에베소서 4:22-24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라도 그 속에는 육신의 사람과 성령의 사람이 공존한다고 하였습니다(롬 7:21-23). 그 중에도 육신의 성품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유혹이나 자기 속에서 발동하는 정욕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도록 작용합니다. 이것을 억제하며 하나님과 더욱 밀착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로마서 8:7-9에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4에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26에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우선하지만 여기에는 우리들 스스로 예수를 닮아가기 위한 피나는 훈련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해산하는 수고」라고 하였습니다. 곧 죽음을 통과하는 것 같은 자기와의 싸움을 하여야만 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6:6-7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였다가 다시 옛 사람의 자리로 떨어져 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죄의 종노릇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불행한 것인가를 알 것입니다(히 6:4-6).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해산하는 고통을 반복하면서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과 인간의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새 생명을 얻는 일의 경우 생명을 잉태하게 하는 것이 은혜로 되는 것이라면 해산하는 수고는 사람이 담당하여야될 부분입니다. 더욱이 세상에 난 생명이 그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성된 인격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많은 수고가 투입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
에 따라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피나는 훈련을 거듭하여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기 못지 않게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가 담당하야 될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해산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짐승들에게도 해산의 고통이 있지만 사람이 겪는 고통에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범죄한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형벌로 해산의 고통을 크게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해산하기까지의 임신 기간도 무척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곧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이 7-8명 계신데 이 분들을 보면 '참 힘들겠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임신을 하게되면 입덧이 심한 사람은 제대로 먹질 못해 눈도 안보이고 마비까지 오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화장품도 바르질 못하고, 심지어 세수 비누로 세수도 못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정점은 역시 출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산모가 아기를 낳으려고 분만실에 들어가면서 신을 벗을 때 '이 신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생명을 탄생하는 과정이 그 만큼 위험스럽고 또한 고통이 심하다는 말입니다. 네! 한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눈물을 쏟고 땀을 쏟고 피를 쏟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해산의 수고라는 말은 여자들에게만 사용되지만 영적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적인 생명의 출산은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만 영적인 생명의 잉태와 출산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 지방에 가서 전도해서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 '전도의 과정'을 '해산의 수고'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의 자녀 하나 출산하는데도 그렇게 많은 고생과 어려움이 따른다면 죄와 마귀에게 사로잡힌 영혼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구원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수고가 따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도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으로 실망하지 마십시오. 또 핍박과 괴로움이 있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한 생명의 탄생에는 언제나 해산의 고통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최근 스웨덴의 한 연구소가 실험을 통해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소는 산고를 겪고 낳은 아이들과 진통제를 맞고 무통 분만한 아기들을 자세히 비교 관찰해 보았더니 모자간의 정과 그 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진통이 심할 수록 모자간에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의 원천이 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되고, 반대로 산고의 진통이 없으면 그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분만 후 아기들의 행동이 다른데 진통을 겪은 아이들은 곧바로 엄마의 젖을 찾아 안기는데 반해, 무통 분만아들은 엄마를 찾아 더듬거리는 반응을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연구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증명해 주는 것일 뿐 아니라, 산고를 통한 출산이 산모나 신생아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영적 출생에도 해산의 고통이 따라야 더욱 귀하고 또한 확실한 믿음의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한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10개월의 시간과 어마어마한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영적 생명을 낳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명을 교회에 나오도록 하고 구원받게 하기까지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하고, 땀흘리는 수고가 있어야 하고, 희생의 피까지 쏟는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의 대가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즉, 해산의 수고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산의 고통을 피하지 말고 기쁨으로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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