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은 누가 지어주었습니까? 이전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요즈음은 부모들이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태명이 진짜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삭(창 17:19), 솔로몬(대상 22:9), 요시야(왕상 13:2; 왕하 22:1), 고레스(사 44:28-45:1), 세례 요한(1:13,60-63), 예수(마 1:25)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동일하게 순종하는 부부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아이가 태어난 지 팔일이 되면 할례를 받게 되고 이어서 이름을 짓게 됩니다(눅 1:59, 2:21). 이 의식을 통해 부모는 이 아이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이십니다.
유대인 산모는 자녀를 낳은 후 율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찾아가서 정결예식을 행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율법에서 산모와 아이는 출혈로 인해 부정하기 때문에 정결예식을 행해야 합니다. 남자 아이는 40일이 지나서 정결예식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레 12:1-5).
번제는 출산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마음을 표하기 위하여 드렸고, 속죄제는 출산에 따른 부정을 제거하는 의미로 드렸습니다. 이때 각 예물은 번제로 양, 속죄제는 비둘기를 드립니다. 하지만 가난한 경우 번제로 양 대신 비둘기 둘로 드렸습니다(레 12:8). 한 마리는 번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속죄제물로 드렸습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후자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당시 비둘기의 가격은 어린 양의 1/10정도였습니다.
율법에는 처음 태어난 짐승의 새끼는 하나님께 드리도록 규정하였습니다(신 15:19). 그리고 율법에는 처음 태어난 남자 아이를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레위 지파를 성별하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장자의 수가 레위인의 숫자의 비율에 맞지 않을 때는 한 사람당 다섯 세겔을 속전으로 지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갑니다. 바로 그때 신실한 남자 성도 시므온과 여자 선지자 안나가 아기를 보고 메시야의 사역에 대해 증거합니다. 대단한 영적 통찰력입니다. 하나님은 시므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이 만남을 에정하셨습니다. 시므온은 평생을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왔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살아왔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대망하는 기도를 드려왔습니다. 특히 시므온은 주의 그리스도, 즉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바로 이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시므온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시골 출신의 요셉과 마리아가 안고 있는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그가 메시야임을 바로 알아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제는 말씀해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제 죽어도 더 이상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메시야를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눈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구원의 복음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세계만방에 확산될 것을 에고합니다. 구원의 복음은 이방을 비추는 생명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시므온의 찬양의 소식을 듣고 놀랍게 여깁니다. 시므온이 그들이 축복하면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예언합니다. 예수로 인해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세움을 입기도 하고 걸려 넘어지기도 할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세움을 입지만 에수를 배반하고 거역하는 사람들은 걸림이 되어 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될 것을 예언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많은 비방과 조롱을 받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박해와 멸시와 조롱을 받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예정된 것입니다(사 53:4-12). .
마리아는 가장 복을 받은 자입니다(눅 1:42). 그러나 한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목격하면서 칼이 네 마음을 찌르는 고통을 당할 것이다. 여기서 칼은 대검을 가리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받을 때 큰 칼이 찌르는 것보다 더한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낸다는 것은 었을 것이다. 이제 예수를 정말로 섬기는 사람과 섬기는 자들과 대적하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될 것입니다다.
시므온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이 예언을 선포할 때에 이 특별한 아기를 알아보는 또 다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안나입니다. 그녀는 선지자입니다. 안나가 그를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렇게 증거합니다. 안나는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섬겨왔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였습니다. 그녀가 결혼할 나이가 약 14살쯤 결혼해서 7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그만 과부가 된지 84년이면 나이가 105살입니다. 지금 나이가 84살이니깐 63년 동안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며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모든 것이 다 잘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환난을 겪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누구를 섬기며 사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주의 율법에 따라 준행한 후에 갈릴로 돌아가 나사렛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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