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탄생할 때에 로마의 황제는 가이사 옥타비아누스입니다. "아구스도"는 라틴어로 황제라는 뜻입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주전 27년에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위대하고 고귀하며 지극히 숭배받는' 이란 뜻)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는 탁월한 통치 능력과 현명하고 훌륭한 정치 및 행정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식민지에 지역에 대해 지방 자치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도 하며 그들의 문화와 종교, 생활 풍습등을 인정해 주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했으며 그 자신이 또한 위대한 건축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 속한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세금을 거두어 들이기 위하여 인구 조사를 하도록 법령을 공포하였습니다. 이 호적 기록부에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성경에 예언한 대로 성취하기 위하여 이방의 통치자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구레네가 시리아 지방의 충독이 되었을 때 실시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구레네는 로마의 시이저 황제의 고문역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당시에 시리아는 유대 지역까지 포함된 로마제국의 통치령이었습니다. 인구 조사를 한 목적은 군대 징집이나 세금 징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구 조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의 출생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그러면 성경의 에언이 성취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의 통치자를 통해서 인구 조사 명령을 내리게 한 것입니다. 타이밍도 절묘합니다. 만약 예루살렘이 분만할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더라면 문제가 될 뻔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집의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을 향하여 가야만 했습니다. 마리아도 다윗의 자손입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이 자라난 동네이고 메시야가 이곳에서 출생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미 5:2). 그때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습니다. 요셉이 해산이 임박한 마리아와 함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약 144Km의 길을 여행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산모와 태아에 치명적인 위험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안전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리아의 분만 예정일이 가까이 왔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첫 아들을 낳아서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였습니다. 아이를 분만할 여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보에 싸는 이유는 아기를 보온하고 안정감을 주기 위함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아기의 내부 장기들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구유란 가축 우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비천한 마리아를 통해서 비천한 구유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가장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첫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 이후에 자녀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계속해서 동정녀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마 13:55-56). 하지만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구유는 갓난아이를 누이기에는 안성 맞춤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수님의 탄생 소식은 천사들을 통해서 목자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당시에 목자라는 직업은 아주 천시되고 부정한 직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복음의 소식은 맨 먼저 당시에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다윗도 알고 보면 목동 출신입니다. 한편 목자들은 들판에서 살며 밤에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의 천사가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주의 영광이 환하게 둘러 비추니 그들이 크게 무서워합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복음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전해지는 좋은 소식입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이스라엘 종교가 아니라 전세계에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종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기쁨이 좋은 소식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다윗의 동네, 즉 베들레헴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주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 자체가 기쁜 소식이며,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곧 복음입니다.
예수님은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와 주로 예정하신 뜻대로 오신 것입니다(엡 3:11), 본체상으로는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주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왜 이것이 표적이 될까요? 천사가 에언한 바로 그 시기와 장소에서 태어난 아기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그 천사와 함께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들이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무엇일까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이 탄생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입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들이 서로 말합니다. 이제 빨리 베들레헴에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일이 정말 일어났는지 가봅시다.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계속해서 찾던 끝에 정말로 강보에 싸인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목자들이 천사가 전해 준 예수의 탄생에 대한 기쁜 소식을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 줍니다.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놀랍게 여깁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깁니다.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평일에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들은 바와 실제로 본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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