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노하우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 가운데 계속해서 추진되었던 한 가지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사역의 중심이 복음전파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입니다.“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이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베드로와 안드레입니다. 그들을 부르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예수님은 그들을 미래의 복음전도자로 부르십니다.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그들에게 맡기시는 장면입니다.
대부분은 성도들은 복음전파는 목회자나 몇몇 은사를 가진 자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전파는 모든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복음전파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복음전파를 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신앙은 곧 복음전파입니다.
복음전파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복음전파로 세상과 사람이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복음전파로 이 세상의 끝이 결정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성도들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하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것에 목숨을 걸어야하는지 도전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복음전파에 도전해야 합니까?
1. 복음전파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항상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18:14입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요한복음 6:39 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강한어조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복음전파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복음전파에 있어 너무 소극적이고 자신과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잃은 영혼을 찾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것을 심각한 영적 문제로 받아들이거나 회개하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만일 복음전파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없으면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별로 큰 잘못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14-16절입니다.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다 바쳤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변화된 그 순간부터 순교하기까지 쉬지 않고 복음전파자로서의 사명을 다하였습니다(고전 9:17, 행 20:24).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고 예수께 받은 말씀입니다(갈1:11).
그러므로 복음전파 곧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어떤 일보다 전도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전도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교회에서 자꾸 전도하라고 하니깐 마지못해하고 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사 41:27).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복음전파를 위하여 도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1: 13절입니다.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가장 과감하게 도전할 것은 잃은 영혼을 찾기 위하여 가족에게, 이웃에게,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2. 복음전파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예수를 믿는 길 뿐입니다. 입니다. 예수 이름 외에는 천하에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그러나 자꾸 듣게 되면 어느 날 이 말씀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 진리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14절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세상에는 구원의 복음, 생명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보다 복음전파에 열정을 쏟지 않습니다. 전도가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도 믿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전도가 되지 않는 다는 편견이나 변명은 그쳐야 합니다. 시대가 어렵고 사람들이 완악해서 그렇다고 단념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전도가 되지 않는 원인은 내가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 16절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죄가 무엇입니까? 죄가 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죄인 취급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죄인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8-9절입니다.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너무나 무섭고 안타깝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의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롬 2:12절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이러한 심판으로부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내게 주는 말씀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심판을 받게 될 사람으로 확정판결이 나기 전에 그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죄로부터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탄과 마귀의 지배 아래서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죄를 더욱 짓고 되고 계속해서 더욱 타락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3:8 절입니다.“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2절입니다.“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가 복음전파에 도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과 세상을 사탄의 지배에서 자유하게 하는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기쁨이 옵니다. 예수를 믿으면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사람의 운명이 바뀝니다.
로마서 6:22절입니다.“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디모데후서 2:26절입니다. “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며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죄와 세상과 사탄의 종노릇하게 됩니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멸망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복음전파는 구출입니다. 악과 죄로부터 구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데 도전해야 합니다.
3. 복음전파는 표적과 능력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먼저 믿은 우리의 책임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특별한 능력까지 주셨습니다.
본문 17-18절을 읽겠습니다.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표적이라는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귀신을 내쫓게 됩니다. 방언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뱀을 잡아도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게 됩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낫게 됩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가슴 벅찬 일입니까?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받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만도 감사한데 이런 능력까지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은 자신을 위하여 사용될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표적이란 하나님을 높일 때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입니다. 만일 귀신을 쫓아내고, 뱀을 집어도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고,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표적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전 문 앞에 나면서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사도행전 3:6절입니다.“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예수의 이름을 전하면 지금도 치유와 기적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으로도 감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표적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이유는 복음전파란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주권적 역사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기도해서 자신에게 보여주시는 표적보다 예수를 전할 때 보여주시는 표적이 훨씬 자주 능력 있게 나타납니다. 전도하는 교회, 전도하는 가정, 전도하는 사람에게 표적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복음전파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나 능력이나 표적을 보지 못했다고 실망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당장 예수님을 전해 보십시오. 그동안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을 보면 모두에게 표적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를 믿기 어려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표적으로 그 사람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십니다. 한가정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을로 예수의 도시로 예수의 나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우연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를 전함으로 갖가지의 표적들을 통하여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되고 도시가 거룩한 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의 도전을 계속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따르는 표적들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만 드리고 기도만 해서는 표적이 따르는 신앙이 부족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을 하신 후 제자들의 행적이 마가복음 16:2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 한절의 말씀이지만 제자들이 어떻게 변화된 사람들인가를 알게 해 줍니다.
마가복음 16:20절입니다.“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제자들이 예수의 복음을 다니면서 전파할 때에 주께서 함께 역사하시고 그 따르는 표적으로 더욱 확실하게 증언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능력의 주님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가서 전하는 곳마다 표적이 따르길 바랍니다. 살아계신 생명의 말씀에 더 확실하게 붙잡히고 더 열정적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말씀의 확신이 없습니까? 예수를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하면 전할수록 확신이 생기고 선포하면 선포 할수록 표적을 더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중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고, 전도하는 것이 창피하고, 쑥스럽고 자신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예수 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복음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복음전파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전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죄악과 타락과 질병으로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의 상황과 같습니다. 창세기6: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오늘날의 상황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하기 전의 상황과 같습니다. - 창세기18:2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정을 보십시오. 그리고 사회를 보십시오. 이대로 내버려두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멸망으로 가는 세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길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진노가 임하기 전에, 멸망이 오기 전에, 더 타락하기 전에 그들을 향하여 생명의 예수, 복음의 표적, 확신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전도만이 이 세상을, 가정을,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도전장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십시오. 미루지 말고 당장 도전해야만 합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실천하고 도전해야합니다. 예수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로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전파에 도전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들을 구출하는 유일한 방법 때문입니다.
셋째, 표적과 능력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점점 좋아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완악하고 탐욕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갖가지 병이나 절망과 아픔과 상처로 인한 인생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행복이나 자유, 기쁨과 평안을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정신적, 육체적, 환경적 고통 가운데 포로생활로 살고 있습니다. 전도는 이런 사람을 살려내어 진정한 자유와 쉼과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을 살리는 것이 전도입니다.
사람들에게 참 안식이나 기쁨은 오직 예수에게만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축제, 구원의 축제가, 생명의 축제가 매일 일어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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