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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로루하마에서 루하마(호 2:1),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4.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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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운데도 보통 사람들이 겪지 않았던 사건들을 많이 겪었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욥과 같은 인물은 특별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호세아도 그런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신앙의 간증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평범한 과정이 아니라 스페설 코스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복음성가 가사가 생각이 납니다.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을 잡고 계시 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어떤 사명을 주셨을까요? 1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에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하필이면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녀만큼은 되어야 하는데 음란한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음란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함께 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성경은 하나님을 버리고 크게 음란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것을 말합니다.

 

호세아는 당시 이스라엘의 비상 상황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을 받게 됩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 통치 말기부터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주전 722년까지 선지자로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시기에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는 번영하였지만 종교적으로는 암울한 시기였습니다.호세아 이름은 구원을 의미하는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뜻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어떤 특별한 상황을 겪고 았는 있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 저는 본문을 통해서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결혼 생활을 통해서 이러한 사명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1 2 하반절에 의하면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서 택한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심정을  헤아려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세아의 결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생각지 않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보고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당신이 호세아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1 3절에 보면 호세아는 디볼라임의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여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데는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데 이스르엘이란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스르엘”이란 하나님이 흩으신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시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첫번째 아들을 이스르엘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후는 아합의 집을 멸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유다의 아하시야의 형제 42명을 모두 죽였습니다(왕하 9:14-37; 10:19-24) 이러한 에후의 이기적인 욕망과 잔인한 습성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후의 집을 멸하려고 하셨습니다(왕하 15:8-10).  다른 하나는 결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군대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임신하였습니다. 아들일까요, 딸일까요? 딸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기거나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상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만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거두어지면 우리는 도저히 살아갈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 않으시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새로운 하루를 살아갈 있는 것입니다.  

 

고멜이 로루하마를 후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로암미”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름은 너희는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가 깨어졌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운명이 절망적인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제 하나님은 백성을 흩으시고(이스르엘)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로루하마) 아예 포기하시고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한 방법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동안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안전된 결혼생활을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사고를 치고 호세아는 찾아가서 문제를 수습해야만 했습니다.그러나 호세아 1 10-11절은 이스라엘 자손의 회복과 구원의 약속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징계와 심판, 회개와 용서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본문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헤아릴 없고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백성이 아니라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것이라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우두머리를 세우고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것임이로다. 말씀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열방이 구원을 받음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이는 것은 스룹바벨의 지도하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에 시작되어 장차 메시야를 통해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호세아 2 1절은 1 10, 11절의 결론이라고 있습니다. 이스르엘의 날에 비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형재와 자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형제에게는  암미, 나의 백성이라고 하고, 자매에게는 루하마,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선포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과 저주가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는 그날에 대반전이 이루어질 것을 시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 때문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고멜과 같이 계속해서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이유는 이스라엘이 경제적인 부요함을 의지함으로써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결국 백성들은 이상 긍휼을 얻지 못하고 고아처럼 버려지게 것입니다(2: 4)).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2 5 하반절에 보면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이스라엘은 호세아의 아내 고멜과 같이 주위에 있는 이방 나라를 의지할 아니라 그들이 섬기던 거짓 신과 우상들을 숭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II 치하에서 막대한 부와 권세를 누렸지만 그들은 모든 부귀영화를 이방의 신들에게 돌림으로써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44:17,18). 급기야 이스라엘은 사치와 향락과 방종을 낳았고, 결국 이방 민족의 악한 습성과 불의한 삶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를 계속 짓는 모습을 보고 가시나무와 담을 쌓아서 막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가시나무와 담은 견디기 어려운 심한 고통이나 최악의 상황을 말합니다. 이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지만 죄악을 끊기 위한 수단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7,9절에 의하면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남편[나의 처음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이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알지 못함이로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숭배가 헛되며 하나님을 섬긴 때의 형편이 나았음을 깨달은 후에야 비로소 처음 남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가졌고 누렸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임을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 대한 무지가 가장 죄악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의 죄악에 빠졌을 그들은 사치와 향락과 방종을 낳았고, 결국 이방 민족의 악한 습성과 불의한 삶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긴 날수대로 벌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2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타이르고 위로하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23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들을 긍휼히 여기며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바라보시며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이스라엘이 우상이나 주위 국가들로부터 도움을 받고 싶어했던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위하여 은과 금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11:14).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국가들로부터 온다고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가 막한 일입니까?

 

심지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자기 것으로 여겼습니다. 5 하반절에 보면 덕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것들을 주위 국가에서 자신에게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것이라고 우기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축복의 전달자에게 마음이 빼앗기지 말고 축복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있습니다. 징계를 통한 사랑, 막히는 사랑, 열리는 사랑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사랑하고 계십니다. 마치 사진 기사가 장소에서 방형으로 돌일한 시간에 사진을 찍어도 그것을 현상해 보며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뫃노가 아니라 멀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노가 아니라 스트레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현장에서 비로소 회복의 문을 여십니다. 고난도, 회복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거친 들판 징벌의 땅으로 데리고 가셔서 위로의 말을 주시고 거기서 비로소 그들의 포도원을 그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거친 들판에 무슨 포도원이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샏각해 주시면 거칠어진 땅을 다시 포도원이 되게 하실 있습니다.

 

그는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실 것입니다.  형벌의 고통이 있는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15).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때에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에 대한 감격과 감사로 응답할 것입니다(15). 앞으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알이라 하지 않고 남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16).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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