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얻을 것인가, 영혼을 얻을 것인가?
세상을 기쁘게 할 것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만큼 ‘어떻게 사느냐’에 큰 관심을 가지신다.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변화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배우고 또 배우는 것이다.
믿음과 삶은 병행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삼상 16:7).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직 마음만 중시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처럼(약 2:26) 겉으로는 불순종하면서 속으로만 신실한 믿음이 있다는 변명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적인 동시에 외적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지만, 그 후로도 우리는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고, 믿음의 진보를 추구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모습인지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일까? 어떻게 해야 신앙과 삶이 병행하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건강한 신학으로 풀어내는 신앙과 삶의 조화
존경받는 신학자 R. C. 스프로울이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깊은 고민을 건강한 신학과 따뜻한 격려로 풀어냈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다룬 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통해 그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힘주시고 은혜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천국 소망을 이야기한다.
성경은 입으로만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마음으로는 멀리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이러한 죄성과 연약함을 알기에 우리 스스로 좌절하고 실망하며 자책하지만, 성공과 실패가 병존하는 가운데 비록 더딜지라도 확실한 전진을 이루시는 성령님께서 오늘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본서를 통해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만나는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법을 매우 실제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성경이 제시하는 교훈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날마다 연습하라고 독려한다.
이 책은 무거운 학문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우리를 책망하거나 죄책감을 더해주는 책도 아니다.
오늘도 삶 속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우려는 작은 손길이며, 우리의 성장을 도우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만나고, 삶 속의 작은 결단과 변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는, 바로 당신을 위한 책이다!
저자 소개, R,C.스프로울(R.C.sproul)
개혁주의 신학계를 이끄는 저명한 신학자로 심오한 진리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글과 강의로 유명하다. 또한 딱딱하게 들리는 성경 교리를 명쾌한 논리와 적절한 예화로 풀어, 성경 말씀이 일상의 삶과 떨어질 수 없게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어릴 때부터 ‘왜?’라는 질문으로 가득했던 그는 대학에서 친구에게 예수님을 전해 들었을 때에도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해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찾던 모든 문제의 확실한 답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그에게 마지막 한 가지 ‘왜?’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확실한 진리인 성경을 믿지 않는 걸까?’
사람들이 성경의 진리를 의심하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그는 많은 철학자들의 책을 섭렵했지만 어느 것도 성경만큼 확실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번엔 그곳에서 갖가지 신학 이론과 성경의 신빙성에 대한 회의에 부딪혔다. 그러나 스프로울은 오히려 그 회의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더욱 확신 있는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스프로울은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해되지 않는 모순적인 대답을 갖고 편안하게 느끼는 안일함에 놀란다. 그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자세히 공부하지 않고 잘못된 추측 안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며 사는 무감각을 경계한다. 그의 글은 생각의 사각지대를 명확하게 끄집어낸다.
낙스 신학대학교 등 여러 주요 신학교에서 신학과 변증학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플로리다 주에 위치한 세인트 앤드류 채플(St. Andrews Chapel)의 목사로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평신도 교육에 열정을 품고 7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리고니어 선교회를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알리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1994년 『크리스채너티투데이』의 비평가들이 뽑은 ‘신앙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학자’ 3위로 선정되었다.
1. 인자한 은혜
맹인이 두 단계에 걸쳐 병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막 8:22-25). 우리 주님은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친히 그를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를 군중에게서 멀리 벗어나게 하신 후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하셨다.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침을 뱉으신 목적은 그를 모욕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 좀 보이냐고 물으셨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움직이는 형상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또 다시 그에게 손을 대셨다. 그러자 희미하던 물체들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시작-중생
우리 눈을 여사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보게 하시는 은혜는 중생 곧 영적 거듭남이다. 중생은 여러 단계에 걸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곧 성령께서 우리 영혼을 만져주시는 순간, 단번에 성취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으로 즉시 거듭나고 흑암의 왕국에서 즉시 빛의 왕국으로 옮겨가지만, 성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거듭날 때 사람을 걷는 나무처럼 본다. 우리의 영적 시야가 뿌옇게 가려져 있다. 모든 게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거듭난 뒤에도 계속 죄를 지음으로써 시야가 여전이 가려져 있다.
신앙의 성장 과정은 칭의, 성화, 영화이다. 영화는 주님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진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할 때 외롭다 여김을 받는다. 이것이 칭의이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온전해지는 것을 영화라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주님의 만져주심이 필요하다. 비록 우리의 눈에 비늘이 벗겨졌지만 여전히 손을 잡고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이 필요하다.
중생은 여행의 시작과 같다. 성공과 실패가 병존하고 넘어지는 가운데 성장하는 여행이다.
삼손은 감옥에서 지렛대를 메고 원을 그리며 제분기의 바퀴를 돌렸다.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진보가 너무 더뎌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손으로 바퀴를 돌리고, 곱절의 노력을 해도 아무 것도 달라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지속-성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러한 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직선과 같다.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 있다. 영광이라는 최종 목표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는 말씀을 듣게 될 날을 향해 전진한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위로부터의 부르심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진이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의 주인공 순례자는 하늘을 향해 전진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사람이 거듭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거듭난다는 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난다는 뜻이다. 거듭남의 체험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거듭났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필요하다. 자기 기준으로 거듭남의 기준을 설정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시간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역사하신다. 정말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정말로 회심했는가?“이다. 우리가 만약 성령으로 말미암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형제여 자매들이다(엡 2:8-10).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실 때 우리의 정체성이나 개성을 멸하시지 않는다.
자동차 뒷 유리 스티커에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다. ‘저를 참아주세요 하나님은 아직 저를 완성하지 않으셨거든요.’ 성화는 일종의 점진적인 과정이다.
즉각적인 성화의 과정, 은혜의 두 번째 사역, 두 번째 복을 약속하는 그릇된 교사를 멀리하라.
자기가 이미 영적인 완전함을 성취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 혹은 둘 다를 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자신이 복종할 수 있는 수준으로 대폭 낮추거나, 자신의 영적 행위에 대한 평가를 크게 부풀리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행위이며, 후자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자기기만의 수준으로 부풀리는 것은 극단적인 교만이다.
중생은 즉시 발생한다. 칭의도 즉시 발생한다. 그러나 성화는 죽을 때까지 이루어 가야할 전진이다. 허다한 장애물에 맞서 끈기 있게 싸워야 한다. 영혼의 깊은 밤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유혹의 광야를 지나야 하는 여행이다. 이 여행에는 한 가지 보증 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가시고 우리를 건너편에 데려다주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성장과 변화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에 관해 더욱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서 이루어가는 성장이 곧 성화이다.
2.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그리스도인이 성화,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배우는 데서 진보하려면 자기의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주 잊는다.
광신자는 목표 지점을 잃어버린 채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곱절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마 6:33). 예수님은 그것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언가를 구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 집요하게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을 배우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 여기서 먼저란 우선권이란 의미가 강하다. 즉 너희는 먼저, 즉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구함
불신자는 결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불신자는 하나님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다(롬 3:11).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숨는 것이다. 예수님은 길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왜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을까? 그들은 행복, 마음의 평정,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 의미 있는 생활, 그리고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고 믿는 그 밖의 많은 것들을 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구하지는 않는다. 그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유익만을 구한다. 정작 하나님은 제외시켜 놓은 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유익만을 바라는 것이다.
회심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일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찾는 일은 평생 추구해야 하는 일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된 사업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은 주기도의 중요한 내용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마지막 계명을 이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집요하게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다(행1:8).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땅에 임한다는 것은 왕의 자녀들이 지금 여기서 왕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을 섬김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다. 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시행될 때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큰 인생 목표는 왕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순종할 때 기뻐하신다.
의를 구함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예수님이 친히 나타내 보이신 의와 같은 종류의 의다. 예수님은 흠 없는 어린양이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히 그분을 삼켰다(요 2:17). 그분의 양식과 음료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요 4:34).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모방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올곧은 의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의는 모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매일의 경건과 신앙적 단어를 사용하는 이상이 것이 있다. 하나님은 매 믿음과 순종이 자라기를, 즉 젖을 먹는데서 고기를 먹는 데로 자라기를 바라셨다. 영성과 경건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더 높은 목표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들이다. 그 목표는 반드시 영성을 넘어 의에 이르러야 한다.
예수님의 영성은 궁극적으로 권위 있는 의로써 그 모습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영성은 단순히 표면적이지 않았다. 내면의 삶이 외면의 순종, 심지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순종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것, 하나님의 모든 뜻을 따르는 것이다.
미가의 요약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내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하나님은 우리가 정의와 인자와 같은 비중 있는 문제에 관심을 갖기 바라신다. 그리고 겸손한 성도와 교제하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인자란 성실한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에게 품으신 사랑, 곧 견고한 사랑이요, 인내하는 사랑, 항구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하는 모든 일을 인정하시지는 않지만 항상 그들 곁에 계신다. 우리 역시 아이들이 하는 일을 항상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준다.
성실, 인자와 같은 성품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이런 성품들은 성령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열매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이런 성실함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같은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약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
비판을 일삼는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기란 어렵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비판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서 배울 수는 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대접하는 것은 인자, 곧 친절의 문제다. 그것은 사려 깊고 인정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공손하기만 해서는 실행할 수 없다. 그것은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의롭다는 것은 올바로 산다는 뜻이고, 사람들을 올바로 대하며, 개인적으로 정직하게 산다는 뜻이다. 의로운 사람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정직은 일관성이 있다.
야고보의 요약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참 신앙이란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라는 뜻이다. 야고보는 참 신앙을 사람 지향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온정이 없는 경건은 거짓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황금률에 순종할 때 기뻐하신다. 우리가 정의와 자비를 추구할 때,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할 때 기뻐하신다. 소외되고 짓밟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기뻐하신다. 성경이 우리에게 의로운 생활의 규율로 가르치는 것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고 욕설을 삼가는 영적 생활에 대한 관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만약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규율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의의 목표를 잃은 셈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규율은 하나님이 사람을 돌아보신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3.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2:1). 적은 누룩이 온 땅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5:6).
또한 그 경고는 다른 경고와 연결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위선과(외식)과 거짓 의를 말한다. 그렇지 않은데 의로운 척하는 누룩이다.
예수님은 우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 나라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는데 뭐 걱정할 것 있느냐고 넘어간다. 물론 걱정할 게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의를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갖고 있다는 말 역시 우리가 정말 의를 추구할 때만 유효하다. 바리새인들은 표면적으로는 높은 외의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들의 의는 외적인 것, 겉모습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했다.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
구약 성경에는 바리새인이 나오지 않는다. 신구약 중간기에 등장했다. 바리새인이란 구별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이교신앙이 유대민족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염려하여 당시의 사조에서 자신들을 구별했고 열정적으로 의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들의 운동은 곧 자기 의에 뿌리를 둔 외적 경건주의로 전략해 버렸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행을 의지하였고, 자기들에겐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를 영접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세기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바리새인의 전도생활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다니 그 열정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해 보라. 매우 수준 높은 선교단체나 보일 법한 열정이 아닌가?(마 23:15)
바리새인들의 십일조생활
바리새인들이 심지어 박하와 회향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십일조를 면밀하게 드렸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리새인들의 기도생활
그들은 자신들의 경건을 대중 앞에 드러내기 좋아했다. 거룩한 자세를 취하고 웅변으로 기도했다. 그들은 기도의 골방이 없었다. 농부가 돼지에게 보인 관심은 바리새인들이 기도를 좋아한 정도와 같다. 우리의 위선적인 기도가 하나님을 노하시게 만들지만 아예 기도를 하지 않아서 노하시게 만들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의 성경읽기
바리새인들은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요 5:39). 그들은 구약 성경의 장절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마음과 혼을 간과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데만 부지런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적인 동시에 외적이다. 진정한 의는 정신과 문자를 동시에 지킨다. 이런 종류의 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를 능가한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종이다.
4. 세상과의 전투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벌이는 삼중 전투에 관해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전선에서 세상, 육체, 마귀와 대치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움직이는 곳 어디서나 우리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 창조계 전체가 구속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약식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뱀이 득실거린다. 우리의 시조를 유혹한 뱀은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
세상의 유혹
세상은 유혹자다. 우리의 관심과 헌신을 이끌어내려 한다. 하늘을 향한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보이는 것으로 우리의 관심을 끌어내려 한다. 세상이 우리를 기쁘게 하기에 슬프게도 우리는 세상을 기쁘게 하기위해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롬 12:2). 세상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순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형식, 또는 구조 편에 서는 것을 뜻한다. 인기 있는 것을 행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좋아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살면서 매일 벌여야 하는 투쟁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세속주의다. 강조점이 이 세상과 이 시대에 있다. 순간과 현재의 낙을 위해 사는 것이 이 세상의 정신이다.
예수님은 거듭해서 제자들에게 현재 너머를 보라고 말씀하셨다. 영원을 향해 눈을 들게 만드셨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말씀하셨다. 영혼이라는 저울에 달아 사리를 판단하라고 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16:26).
이 세상에 순응하려면 영혼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 세상의 정신은 ‘오늘 놀고 내일 값을 치르라’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유혹을 거절하려면 시대의 물결을 거스를 각오를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순응은 단순한 불순응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이다(마 5:11-12). 이유 없이 따로 노는 것은 좋은 행동이 아니다. 우리의 불순응은 선별적이어야 하고, 명분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불순응은 변화에 근거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롬 12:2). 우리는 세상에 굴복해서도 안되고 도피해서도 안된다. 새롭고 다른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 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주의적 도피
모든 교사와 모든 교과과정에는 관점이 실려 있다. 가치체계도 담겨 있다. 그 관점은 하나님을 중심에 놓든 그렇지 않든 둘 중 하나다.
점점 더 많은 그리스도인의 부모들이 하나님에 관한 일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게 신성한 의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학교를 뚜렷하게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 단지 성경과목을 개설하고 학과시간에 가도한다고 해서 학교가 기독교화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교과 과정의 관점이다. 하나님은 모든 학문에서 인정받으셔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능력 있는 증인이 되기 위하여 세상을 연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세속문화에 정통했다. 그는 아테네의 군신의 언덕에서 이교철학자들과 변론할 때 이교시인의 글을 인용했다(행1 7:28).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세속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도 신플라톤 철학에 학문 배경에 힘입어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중세의 대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대의 세속 철학자들과 논쟁했다. 존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만큼 키케로를 자주 인용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펜을 들어 유럽의 무신론자들을 비판했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 세속철학을 정확히 이해했고, 기독교 진리로 그것을 비판했다. 기독교적 견지를 분명하게 유지하면서도 대로는 불신자들의 말을 타당하게 여겨 인용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주의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골 2:8)
그러나 무엇을 주의하려면 그것을 알아야 한다. 낮은 지적 수준으로는 기독교교육을 만족스럽게 시행할 수 없다.
하나님은 변화된 정신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정신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교훈을 평가할 수 있는 모눈종이다.
또한 변화하라는 말씀은 정신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정신은 하나님의 관점을 깊이 공부하는데서 생겨난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을 잘 알아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다. 하나님의 게시는 성경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문화에도 자신을 계시하신다. 즉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 세상은 우리가 성화하는 데 장애물이다. 그러나 바른 관점으로 대한다면 동맹자가 될 수 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의 것이다. 아버지는 세상을 구속할 만큼 크게 사랑하셔서 세상에 찾아오신다. 세상을 버리시지도 않고 포기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과 똑같은 자세로 세상을 대해야 한다. 목표는 변화에 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과 함께 세상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회심하면 우선 세상을 등지고 포기하는 시간을 지나게 된다고 했다. 그렇게 물러서는 기간이 있다고 했다. 마치 바울이 아라비아 3년 기간의 시간을 가졌듯이, 모세가 40년 동안 혼자 광야에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루터는 세상에 다시 들어가 그것을 끌어안기 전에는 영적인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지난날처럼 세속적인 태도가 아니라 세상을 구속의 무대로 여기며 끌어 앉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상에 순응하거나 세상 유혹에 굴복함으로써가 아니라 세상에 증거하고 세상을 변화시킴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의 성화를 바라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서 별처럼 밝게 빛나기 바라신다. 그 일은 세상과 그 가치관을 올바로 이해할 때 가장 잘 할 수 있다.
5. 육신과의 전투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겪는 깊은 갈등을 나타낸다. 신약성경은 육체와 영혼 간의 전쟁에 대해 말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육체란 무엇인가?
육신-몸인가, 타락인가?
‘육신’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대개 사람의 육체적 본성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한편으로 육체는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실체를 가리킨다.
신약성경에는육체로 번역되는 두 개의 헬라어가 있다 .즉 ‘소마’와 ‘사륵스’다. ‘소마’라는 단어는 단순히 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단어다. ‘사륵스’는 단순히 몸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의 의미는 말씀이 타락했다는 뜻이 아니다. 말씀이 성육신하셨다는 뜻이다. 바울은 동족에 관해 표현할 때 골육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동족 유대인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구체적으로 타락한 본성, 사륵스를 사용한 경우가 있다. 사륵스는 우리 몸에 한정하지 않는다. 죄는 우리의 존재 모든 면을 감염시킨다. 즉 전인이 타락한다.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골 2:18). 정신이나 육체 가릴 것 없이 타락했다.
육신의 생각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사고방식을 지닌 정신이다. 그것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원치 않는 타락한 인간의 정신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사람의 정신이다.
바울은 육체(사륵스)와 성령(프뉴마) 사이에 계속되는 전쟁에 관해 설명한다. 사람과 영혼과 육체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과 육체를 섬기는 삶과의 대조이다(갈 5:16-21). 이것은 몸과 정신의 갈등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옛사람과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시는 새사람간의 갈등이다.
본성이 타락한 육체는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것을 거부한다. 육체의 일에 관한 목록을 살펴보면 음행과 술 취함은 육체적인 욕구와 신체적 기능을 가지고 저지르는 죄다. 투기와 시기는 우리의 몸과 관련해서 짓는 죄이지만 정신적 태도와 관련이 있다. 우상숭배도 우리의 몸을 사용할 수 있지만 우상숭배의 본질은 물질보다는 마음의 내면적 태도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성령과 육체간의 대조는 단순한 몸이 아니라 전인을 포함하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 즉 두 가지 생활방식 간의 갈등이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한 욕구의 지배를 받는 육체적인 삶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즉 의로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의 갈등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만약 우리가 외적인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의를 외적이고 만질 수 있는 행동으로 측정한 바리새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반면에 의를 내면적 태도로 생각하는 우리를 범할 수 있다. 정신만 옳다면 겉으로 어떻게 행동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으로 온갖 죄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외면이든 내면이든 우리의 삶 전체를 깨끗하게 하기 원하신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절제를 가르쳐 주기를 원하신다. 식욕 자체는 죄가 아니다. 우리 몸의 정상적인 기능이다. 그러나 식욕을 자제하지 못하면 폭식을 하게 된다.
성 충동도 그것 자체로는 악하지 않은 자연스런 욕구다. 우리는 배우자에 대한 성적권리 뿐 아니라 의무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결혼 밖에서는 성행위를 삼가야 한다.
루터는 정욕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말한 적이 있다. 정욕은 어떤 여성이 성적매력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게 아니다. 정욕은 단순한 의식을 상상으로 몰입할 때 생긴다. 루터는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새가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새가 우리 머리에 둥지를 틀도록 놔두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
절제는 성행위의 규율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 5:3).
하나님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의 성행위를 허용치 않으신다.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혼외정사를 금하듯이,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똑같이 정절을 요구하신다.
육체는 세상과 동지다. 세상은 사탄과 동지다. 원수는 우리를 성령에게서 끌어내 육체에 굴복시킴으로써 우리를 파멸시키려 한다.
반면 성령은 신자의 동지다. 육체가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듯 보이는 이 세상에서 성령님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6. 마귀
세상, 육체, 마귀, 이 세 원수 중에서 가장 가공할만한 원수는 마귀다. 마귀는 어둠의 주관자, 거짓의 아비, 형제들의 참소자, 간교한 뱀이라 불린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의 소소한 정욕만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가공할 세력들과 맞서 싸우고 있다(엡 6:13)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마귀와 맞서 싸우는 가운데 반드시 이해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실제로 마귀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가진 영적 존재라고 인정하면서도 마귀가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교만하고 강한 사탄
붉은 옷을 입고 쇠고랑을 친 마귀의 이미지는 중세 시대에 그 뿌리를 둔다. 중세교회는 사탄의 실재를 믿었다. 사탄이 지나친 교만으로 고통을 겪는 타락한 천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갈래 난 모자를 쓴 어릿광대로 묘사하여 사탄의 교만을 풍자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후세대들은 그 풍자를 마치 실물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성경에 나오는 사탄의 이미지는 광명의 천사로 표현하고 있다(고후 11:14). 광명의 천사는 사탄의 탁월한 능력을 가리킨다. 그는 간교한 존재이며 사람들을 속인다(창 3:1).
사탄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두 번째 이미지는 울부짖으며 삼킬 자를 찾는 사자다(벧전 5:8).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데 쓰이는 사자가 적그리스도의 원형인 사탄에게도 사용된다는 점을 눈여겨보라. 그 적인 사자는 게걸스러운 반면 유다의 사자는 구속하신다. 두 사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힘의 상징을 발견한다. 사탄의 힘은 그리스도의 힘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우리보다 뛰어난 것임은 틀림없다.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데 주로 사용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힘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힘을 과대평가하게 만든다. 일례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고, 사탄을 과소평가했다(눅 22:33). 바로 직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의 임박한 배반을 경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손을 내저으면서 부인했다(눅 22:33). 예수님은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다고 말씀하셨다(눅 22:31). 베드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그는 사탄의 손아귀에 든 찰흙과 같이 되었다.
그
럴지라도 사탄이 우리에게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사탄이 베드로를 밀 까부르듯 했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었다. 예수님은 경고와 함께 위로도 주셨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사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장소 이상을 동시에 차지할 수 없다. 선하든 악하든 모든 천사가 시공의 제약을 받는 것처럼 그도 동일한 제약을 받는다.
귀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
할리우드는 밀교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엑소시스트’와 ‘오멘’과 같은 유의 영화를 많이 내놓았다. 기독교 내에서도 귀신 추방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대두되었다. 즉 특정 귀신이 특정 죄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들은 술 귀신, 우울증 귀신, 담배귀신 따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한숨은 담배 귀신이 떠났음을 가리키고, 담배 귀신은 숨을 들이쉴 때 들어오므로 숨을 크게 내쉴 때 나간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구토는 술 귀신이 떠났다는 상징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파악 가능한 모든 것에 귀신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귀신 하나하나를 다 내좇아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이 일상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절차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신자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 사탄과 귀신에 대하여 지나치게 큰 관심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초점을 덜 맞추고 있음을 뜻한다.
성경은 사탄이 우리를 억압하고 공격하고 유혹하고 비방하고 고소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은 귀신에게 사로잡힐 수 없다. 주의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
사탄과 귀신들을 이토록 지나치게 강조하는 추세는 또 하나의 중대한 위협인, 바로 우리 죄로부터 눈길을 돌리게 한다. “마귀가 내가 이 일을 하도록 만들었어요”라고 말할 수 없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다거나 충동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사탄의 지배를 받았거나 협박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 죄가 귀신들의 지배에 위한 결과라고 보는 견해에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유혹에 굴복해도 자기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귀신 추방 사역에 힘입지 않고는 스스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겐 실제로 죄책이 없고, 귀신을 강력하게 추방하는 사역에 힘입지 않으면 절망상태에 놓인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성화의 개념을 부정한다.
유혹자와 아담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유혹과 고소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악의 없게 들리는 질문으로 하와에게 접근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여기서 뱀의 간계를 볼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에 한 가지 제약을 두셨다면 그것은 모든 지유를 앗아간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곧 하나님의 공평과 인자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아홉 가지는 허락하고 나머지 한 가지는 금지할 경우, 어린이들은 한결같이 “부모님은 저에게 아무 일도 못하게 하세요!”라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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