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군의 승리로 끝난 걸프전은 30여개국의 건승 환희로 메스콤이 온통 들떠 있었지만 그 전쟁으로 죽어간 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하나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이라크에서는 15만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부상자는 백만명이 넘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승패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인간의 고귀한 생명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습니다.
세계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쟁은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1차 대전이 1914년에 일어나고 이 전쟁으로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벨포어 선언을 함으로 이스라엘 독립이 약속되었습니다. 12차 대전 후에 발포어 선언이 효력을 보게 되어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남.북한간의 불신과 대립의 가장 큰 원인은 남북이 한국전쟁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1개월(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가량의 한국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최소한 60만 이상의 남북한 현역 군인이 전사했고, 유엔군 33만명, 공산군 즉 180만명, 민간인 24만 4천명이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행방불명 36만 삼천명, 전쟁 미망인 50만명, 순교자 4만명, 10 100만의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6.25는 우리의 역사를 50년 이상 퇴보시켰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교회 분열이 민족의 분단을 심화시켰다는 사실은 서글픈 일입니다. 6.25 동란을 겪으면서 한국교회는 역사의식의 부재를 노출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의 명언 가운데 '용서하다 그러나 잊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6.25 전쟁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6.25 이후 세대들은 의식 구조가 너무나 변화 되고 있습니다. 서구의 타락한 세속주의와 쾌락주의에 의해 가치관의 혼동을 겪고 있습니다. 애국심이 점점 약화되고 개인주의가 팽배해 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의 장래에 대해 엄러하며 올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제1세대는 모세를 지도자로 출애급 후 장야에서 생활한 백성이며, 제2세대는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하여 요단강을 건너 정복 전쟁을 수행하고 가나안에 정착했던 백성이며, 제 3세대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백성을 가리킵니다. 가나안 전쟁은 주전 1405년경부터 약 5년간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수행했던 정복전쟁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전쟁에서 과거에 한번도 경험해 본적이 없는 큰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을 경험해 본적이 없는 제 3세대는 전쟁의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잃어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전쟁을 통해서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우리의 매일의 삶은 영적인 전투와 같습니다.
1. 전쟁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1-4절)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들의 일부를 그대로 남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남겨 주신 가나안 족속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의 일부를 남겨 놓고 이방인들의 유혹 속에 넘어가 죄에 빠지게 하셨을까? 마치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남겨 주셔서 그로 인해 인류가 죄로 인해 타락하도록 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문제를 그대로 남겨 주시고 힘들게 하실까? 왜 전세계 도처에 전쟁과 기아로 인해 굶어 죽어가도록 하실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에덴 동산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안주하지 못하도록,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에 진정한 안식이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전쟁의 교훈을 깨닫게 하기 원하셨습니다(1절). 전쟁은 인간의 죄를 처리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전쟁은 상황이 바뀌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일종의 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처리하실 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일을 통해서, 다른 나라를 통해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은 남겨 두 신 가나안 주민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들은 살아 남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의 일부를 전쟁을 경험해 보지 않은 그들에게 두신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부분 우리가 달하는 고통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도록 만드셨습니다(4절). 참된 교제는 대방의 말에 대해 얼마나 순종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부를 알기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가시가 됩니다. 사실 가나안 족속의 일부는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축복의 도구로 남겨 두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함정에 빠지도록 올무를 놓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어려운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빠지면 저주가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기회로 삼으면 그것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꺼번에 가나안 족속을 멀하시지 않은 이유는 그 지역이 황폐하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주 문제가 어려워지기 때문입 니다.
2. 전쟁은 인간의 욕심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5~7절)
전쟁은 인간의 자만과 욕심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마지막 심판하실 때 전쟁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불도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6.25전쟁의 책임을 일차적으로 36년간 식민지 통치를 실시한 일본 및 냉전 상황에서 전쟁 도발의 수단을 제공한 미국과 소련에 두고 있으며, 식민 통치 후 분단이라는 구조와 미소 양국의 지원이 전쟁을 유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강대국들이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 전쟁이 발발 게 된 것입니다. 물론 내면적으로는 사상적인 대립과 정치적인 혼란의 와중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게다가 해방 이후에 한국 교회의 분열의 때를 같이하여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족속들을 다 멸하고 그들과 언약을 맺거나 통혼하지 말며 우상숭배 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려하셨던 죄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미련과 욕심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욕심의 대상으로부터 멀리해야 합니다(5절)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은 족속들을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 갸ㅏ운데 거주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의 딸들을 아내를 살았습니다. 이로 인해 신앙의 가문의 대가 끊겼습니다. 그들의 재산도 증가하기는 커녕 오히려 줄었습니다. 이와같이 욕심은 자석과 같아서 가까이 두면 끌려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욕실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6절). 그들은 이방인과의 결혼으로 인해 이방신을 섬기게 되고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을 망각하는 우를 범했습니다. 인간은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지면 자신의 죄책감을 잊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망각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것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무언가로 채워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섬기고, 보이는 물질과 쾌락을 동시에 섬기면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을 어버리게 됩니다. 보이지 않으면 관심도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사실 썩은 사과와 신선한 사과가 함께 놓여 있으면 좋은 것이 나븐 것을 개선하기 보다는 썩은 것이 선한 것을 부패시킵니다.
신문과 성경을 책상 위에 동시에 놓여 있으면 신문에 손이 먼저 갑니다. 우리는 때때로 예배는 오늘 안드리고 다음에 드려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일은 마치 한번 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문제는 모든 경우가 단 한번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주일 예배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빠져야 될 이유가 이상하게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여하에 따라서 그 대상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바쁜 경우에도 만나 야 할 이유를 만들어 냅니다. 연애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하루종일 서로 만난 후에도 집에 들어오면 또 전화합니다. 지겹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하기야 저도 그랬으니까요.
욕실을 제거한 후에 또 다른 욕심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구산 리다임을 8년 동안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옷니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또 악을 행하였습니다. 사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목전에 또 악을 행하고, 또 악을 행하고, 또 악을 행하고 한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의 욕심이 제거되면 얼마 후에 다시 욕심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마치 용수철의 스프링처럼 억제된 못하다가 다시 풀려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인간에게는 욕심을 버리면 이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기가 있어서 더 큰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욕심에 사로잡힐 때 마다 하나님은 전쟁을 일으 켜서 그 욕심을 꺾으셨습니다. 우리의 의식 구조 속에서 하나님을 점점 잃어버리는 이유는 그만큼 욕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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