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얻는 게 있는가 하면 잃어버리는 게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감이 늘어납니까? 아니면 점점 줄어듭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삼등 열차에 국민학교 1,2학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어떤 학생이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아이는 기차가 정거장에 멎을 때마다 밖으로 달려 나갔다가 돌아와 각기 자리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이상하게 여긴 어른들이 매번 어딜가냐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를 아빠한테 갔다오는 거예요 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아빠가 어디 계신데 재차 물었읍니다. 우리 아빠가 이 기차의 기관사야 하며 소년은 자못 의기양양하게 손님을 둘러보았읍니다. 기관사를 아버지로 모신 이 소년은 그처럼 자신만만할 수 있었습니다. 기차가 정거장에 멎을 때에 내린다는 것은 상당히 불안한 일입니다. 저는 대전에서 우동 한그릇 사먹는데도 불안해서 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어려워하는 순간에 우리에게 진정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사야 42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그동안 잘못 살았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지 않는가 ?불안에 떨고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그 순간에 "너는 내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나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그 순간에 내가 너만을 사랑한다는 선언은 우리에게 대단한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줍니다. 내가 착할때에도 예수님 사랑하시고 걱정 근심끼쳐도 마냥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당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과 달을 품에 앉고 너는 내 아들 내 딸 너는 내사랑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품에 앉으시고 너는 내 사랑 내 보배 내 종 내 자녀라 불러 주십니다. 너는 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너는 내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짙고 어두운 구름을 뚫고 갑자기 나온 해가 더 밝은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은 이름을 불러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는 뜻입니다. 수 많은 사람가운데 한사람 한사람을 불러 내셨읍니다.
너는 내것이라는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 네 인생을 책임져주겠다는 것입니다 (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이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분명한 목적이 있어 너를 이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내가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너를 낳았다. 따라서 너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누가 너를 뭐라고 하던지 간에 네가 어떻게 생각하던지 간에 너는 내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기대를 걸고 살아가듯이 신자는 하나님께 크나큰 기대를 걸어야 합니다. 인간은 기대를 잃을 때 절망합니다. 중년기에 들어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하고 회의하는 것은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하지 않기 때문에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즉 기대가 여지없이 꺽이는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 기대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성경적인 사고방식과는 차이가 있읍니다. 너희는 항상 소망을 품으라고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현상유지이니티(우리는 이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제 군대 친구 가가운데 한 분의 이름은 신기대입니다. 새로운 기대를 겁니다. 기대를 가지면 꺽이는 아픔도 있지만 이루는기쁨이 더 큽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기대를 길만한 대상을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가까와지면 상대를 믿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을 믿어서는 안됩니다.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아픔과 상처가 따라오게 됩니다.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사람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습니까? 믿고 사는게 차라리 속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힘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믿는 것이 아니다. 믿지는 말고 사랑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줄만한 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좋습니다.그러나 인간은 약한 존재라 미련이 남아서 사람에게 자꾸 연연하게 됩니다.하나님만이 나의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하나님께 큰 기대를 거는만큼 놀라운 일이 나타납니다. 큰 기대를 걸만한 믿음이 없어서 문제이지 일단 믿음만 생기면 그대로 됩니다. 확신을 가진 사람은 유능한 곡예사가 안전 그물도 없이 곡예를 타는 경우와 같습니다.
둘째, 네 인생의 위험을 통과케 하리라는 것입니다(1-2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가운데로 행할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니". 이스라엘 역사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치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로 인해 온갖 수치와 서러움을 당한 민족이다.
그래서 어떤 사가는 말하기를 유대민족은 팽이와 같이 때려야 돌아가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들 은 여러 번 물가운데로 건너야 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바다와 요단강을 건너야만 했다. 여기서 물을 건넌다는 의미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고난의 강을 가리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인간에게는 자신을 끌고 가는 운명적인 힘이 있으며 그것은 물결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고난의 강을 몇 번이나 건너셨습니까? 네가 물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임의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 들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나면이라고 하지 않은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네가 물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즉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기꺼이 살 때 깊은 물을 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우리는 좁은 길을 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이따위 사람에게서 이러한 고통을 참을 수 없다고 핑계하지 말라. 차라리 내가 믿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러한 고통을 받는다면 기꺼이 참아냈을 텐데. 아마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더라면 더 참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참다운 가치가 있는 것만 참는다면 아직도 우리는 참다운 인내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예수님은 생각지 않던 사람들이 자신을 모욕했을 때 그것까지 인내하셨읍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하나님다운 일이요,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인간다운 일이요,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마귀다운 일이요,악으로 악을 갚는 일은 짐승다운 일이다! 우리는 내 위주로 이것저것 가려서는 안됩니다. 만약 신자가 좁은 길을 피하고 넓고 편한 길만 택한다면 반드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범치 못할 것이라. 대부분의사람들은 절박한 상황에서는 판단력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마귀는 이틈을 타서 성도를 시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당할 즈음에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십니다.시험당할 때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찾는 기회임을 명심하라 시험 때문에 시험이 들어서는 안됩니다. 시험을 피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서는 안됩니다. 시험을 최대한 이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험을 많이 당한 사람은 가능한한 위험을 피하려다가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무관심에 빠지게 됩니다.
"불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니." 여러분은 인생을 살면서 몇 번 불을 통과하셨읍니까? 우리는 불을 통과한 사람하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벤느고를 연상케 됩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도 화재의 위험을 통과한 분이 있을 것입니다.
존 웨슬리가 네 살이었을 때 그가 살던 집에 화재가 났다고 합니다.다른 아이들은 모두 탈출했는데 존 웨슬레만 이층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사닥다리로 그를 구출해 내자마자 그 집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불과 같은 시련 가운데도 우리를 거쳐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아들 이삭을 데리고 갈 때 그의 사환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할 만큼 믿음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창 22:5). 우리는 때때로 충격을 받을 때에 나도 모르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놀라면서 성장하게 됩니다.
셋째, 내 인생을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내 눈에 내가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4절). 사람은 누구와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서 존재가치가 결정되게 마련입니다. 무엇보다 어떤 부모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왔느냐 하는 것은 자녀들의 존재가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마련입니다.
내가 너를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관적인 가치가 있는가 하면 객관적인 가치가 있읍니다. 주관적인 가치란 이를테면 부모의 눈에는 내 자식처럼 잘나 보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아기 예쁘죠 잘생겼죠! 하면서 아이를 보여줄 때 제가 보기에는 밉살스럽게 보여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배와 같은 존재로 여기십니다.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내게 뭐볼 게 있다고 택해 주셨습니까? 옛날 속담에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면 다섯번을 봐야하고 며누리를 보려고 하면 열 번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보시지도 않고 나를 택해 주셨읍니다.
과거의 나를 보시지 않고 지금의 나를 보시지 않고 미래의 나를 보시고 택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더이상 못난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 나는 잘난 존재입니다. 내가 스스로 잘난 존재라고 하는 것은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치있는 존재로 보아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하나님께서 나를 가치있는 존재로 보아 주시기 때문에 내가 가치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말로만 우리를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그만한 댓가를 치루셨읍니다.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른 민족을 희생시켰던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로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생명을 대신하리니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읍니다. 내가 너를 얼마만큼 아끼는지 아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철로에서 놀던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아버지와 같습니다...
이제 당신의 존재가치에 대해 생각해보라 당신을 위해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지 우주를 위해 당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또한 객관적인 가치가 있는 존재로 만드십니다. 즉 모든 수욕 가운데서 온 세상에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십니다. 내 대에 안되면 자손들에게 이러한 복을 반드시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후대에 그 약속을 실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이브람 링컨을 사용하셔서 온세상에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셨읍니다. 대게 훌륭하게 된 사람의 특징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위치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큰 일 작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크고 정성된 마음으로 하면 작은 일도 큰 일되고 좁고 더러운 생각으로 하면 큰일도 작은 일이 되고 맙니다.
한 '유명한 지휘자가 오케스트라 앞에서 중요한 음악제의 마지막 연습을 시작하려는 찰라였습니다. 그의 지휘봉이 움직이자 거대한 홀은 오르간의 장엄한 선율과 드럼의 우렁찬 소리 심벌의 명쾌한 소리, 현악기의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나왔습니다. 갑자기 스톱하는 지휘자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두 놀란듯이 침묵했습니다. 피콜로 (고음의 작은 피리는 어디있오? 피콜라 인주자는 그의 악기가 너무 작아 남의 주목을 끌지 못해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을 가치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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