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

선하신 하나님(마태복음 19:17),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6. 4. 6.
반응형

 

 

내 인생이 축복받고 성공한 인생으로 여겨질 때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의사가 당신의 아내기 지금 임신 8개월인데 태중에 있는 여자아이가 희귀한 염색체 이상으로 사산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회의하게 됩니다.

 

게다가 누구의 죄 때문인가? 누군가 물어보면 당황하게 됩니다. 당신의 죄 때문인가요? 아니면 당신의 아내의 죄 때문인가요? 당신 둘 중 누군가 한 사람이 과거에 죄를 짓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런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도대체 내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그토록 분노하셔서 갓 태어난 아이가 치명적인 질병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을까? 아니면 아내의 죄 때문인지도 몰라? 그런데 대체 그게 무슨 죄였을까? 하루 종일 그런 생각들로 자책감, 슬픔, 그리고 분노와 의심으로 마음이 심란합니다. 

 

결국 그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장례식 입관 예배 때 어떤 여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애기는 또 낳으면 되지요, 괜찮아요? 정말 우리는 이런 경우에 하나님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는지? 설명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 이 일에도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내 생각엔 하나님께서 그 아기가 이 땅에 있는 것보다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은 그렇게 아름다운 아기들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아서 그런 걸 거예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아주 이기적인 분으로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은 잔인하고 변덕스러우며 이기적인 분이라고 믿게 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라면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먼저 오해와 편견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착해야 복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 누구의 죄 때문인가?, 즉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는 오랫동안 인류역사와 함께 했습니다. 거의 대부분 타 종교는 인간이 복을 받기 위해 뭔가 노력해야만 한다는 오해와 편견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신을 노엽게 하면 그 신이 반드시 벌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화난 재판관이십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면 복을 받을 것이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와 편견이 종종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도 발견됩니다. 9.11 테러 직후 유명한 텔레비전 부흥사 두 명이 그 테러는 미국, 특히 뉴욕을 하나님께서 친히 징벌하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지배적인 생각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깨트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선하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19:17).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조차도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끔찍한 상황에 대해 예수님도 두 번 질문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인간의 잔인함에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다른 하나는 천재지변에 의한 사건입니다.

 

누가복음 131-5절 말씀에 보면 징벌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고통 가운데 처한 사람들은 정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한 죄를 지었을까요?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이 비극적인 사고들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들이 있음을 알려 주시려고 사용하신 이야기였습니다.

 

징벌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예수님이 받은 두 번째 질문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만납니다. 그때 제자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9:2-3).

 

예수님 시대의 랍비들은 질병이 그 부모나 당사자의 죄의 결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소경은 선천적 장애였기 때문에 그 장애의 원인은 당연히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랍비들은 아기가 복중에 있을 때에 죄를 지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윤회설을 믿는 어떤 사람들은 전생에서 지은 죄로 인해 이생에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그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이 사람이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라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죄와 질병 사이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이것은 부모가 죄를 범한 까닭이아. 그 부모들이 우상숭배를 했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노엽게 여기셔서 그 아이에게 벌을 주셨다. 혹은 이것은 그 사람의 죄 때문이다. 그가 어미의 복중에 있을 때 탐심을 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멀게 하셨다. 라고 말씀하실 수 있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소경을 고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주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 소경의 눈이 먼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 혹은 자신의 죄로 인한 당연한 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를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소경을 고치셨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그 어느 쪽 손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이 처한 곤경이 그 부모의 죄나 자기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는 기회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소경의 눈이 먼 사건을 징벌이나 그 어떤 다른 가능성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인과응보라는 통념을 깨뜨리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는 하나님은 예금계좌 추적 하듯사람들의 죄의 계좌를 일일이 조사하고, 벌금 부과하듯, 그들의 죄에 대하여 죄과를 부과하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취급하시는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5:45).

 

예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도 똑같이 해를 비추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같은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주 좋은 사람들에게도 생각지 않은 일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또한 정말 악질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을 돌아보면 죄인들이 반드시 벌을 받고, 의인들이 꼭 복을 받는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현실이 꼭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허락하셨는지,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왜 발생하는지를 염려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일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염려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선한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유익을 찾아내고, 악한 사람들 특유의 악행을 멀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선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유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선한 일을 추구할 때 누리는 복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악한 사람들에게 당연하개 일어나는 악한 일들이 있습니다. 이기적으로 악의에 찬 비열한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죄책감, 외로움, 가책, 그리고 자기 혐오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고 섬김의 삶을 살며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기쁨과 평강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공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을 설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을 통과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서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셨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최악의 소외감을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아버지가 선한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동일하게 비를 내리십니다. 모든 것이 암담하게 보일 때에도 여전히 선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아까 그 아이의 아버지가 어느 날 아무런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어쩌면 그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그때 그 아버지의 마음속에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빠,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만일 제가 안 태어났더라면 저는 이곳에 올 수 없었을꺼예요. 저는 여기 천국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리고 언젠가 아빠랑 엄마가 동생이랑 저를 보러 올거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살 수 있잖아요. 그리고 저 때문에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길꺼예요.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나중에 그 날이 되면 알거예요.

 

이와 같이 우리는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제게 좋으신 분이라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머리로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자랄수록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결국 내가 의지할 것은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께 실망했던 내 경험들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내가 가졌던 기대들에 대한 실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망이나 고통이 없고 역경이나 문제도 없는 삶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16:33).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슴 아픔 일과 고통과 아픔과 상실을 경험하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일부이며, 또한 우리가 성숙해지도록 돕는 유용한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4).

 

사실 우리는 성공보다 역경을 통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내가 찾아온 고난과 역경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언제나, 언제나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매일 5분 이상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기 위해 침묵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지면 어떨까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