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곱 가지 죄악 가운데 교만, 질투, 분노, 탐심, 탐식, 게으름, 정욕 가운데 가장 강력한 감정을 동반하는 죄악이 무엇일까요? 바로 질투의 죄악입니다. 질투에는 굉장한 감정적 에너지가 집중됩니다. 질투하는 사람을 자꾸 생각하게 되고, 그 사람을 생각하는 순간 질투의 감정의 늪 속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개선장군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이 퍼레이드에 여자들이 나와서 환영을 합니다. 이런 노래를 부르며 환영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요, 비극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지금 그들의 임금은 사울인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하니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을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8절). 이 말은 다윗이 앞으로 왕의 보좌를 노리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질투해서 눈이 먼 10여년의 굴곡된 인생이 시작됩니다.
1. 질투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제한시켜 버리는 죄악입니다.
우리가 일단 질투에 사로잡히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사울이 왕으로 부르심을 받는 과정을 보면 원래는 아주 괜찮은 사람입니다. 사울은 미남이었고 키도 훤칠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 9:2). 사울이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다가 선견자라고 불리우는 선지자를 만납니다. 사울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 장면에서 보면 사울은 아주 예의가 바르고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히 여깁니다(삼상 9장).
사무엘상 9:21에 보면 사무엘이 이 나라의 왕으로 세우겠다는 뜻을 보이자 자신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표현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되어서 1년만에 치르는 몇번의 전쟁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성을 발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변질되어 갑니다. 역사 속에서 아주 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이 쇠락해 갑니다. 질투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질투 때문에 자신의 가능성과 장점을 미처 다 발휘하지 못하고 일생을 비극적으로 끝내고 맙니다.
2. 질투는 인간의 일상적인 삶을 빼앗아 버리는 죄악입니다.
질투는 아주 강력한 감정입니다. 질투하는 대상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가 다 집중됩니다. 주야로 질투하는 사람만 생각납니다. 질투가 가져오는 시기, 미움, 증오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마비됩니다.
그 전형적인 모델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본문 9절에 보면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원문에 보면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는 눈으로 주목하였더라”. 사울은 다윗을 질투하는 눈으로 한 번 바라보고 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날 이후로 계속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계속해서 사울은 다윗을 어떻게 처지해 버릴까? 에 몰두합니다.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이스라엘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전투가 다소 소강 상태에 들어갔을 때, 사울은 전쟁 중에도 계속 다윗의 행방을 찾고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 판국에 왕이라는 사람이 전쟁은 이루어 두고 다윗을 잡으러 간다는게 말이 됩니까?
질투라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감정입니다. 질투는 우리로 하여금 질투하는 대상 외에는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질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 정상적인 생활을 다 빼앗아갑니다. 그렇게 무서운 죄악입니다. 다윗을 질투했던 사울 왕은 결국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지혜없는 왕으로 전락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됩니다.
3. 질투에는 질투의 영이 있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 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렸습니다. 즉 악신이 사울에게 내려서 질투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질투는 인간 사회에서 평범한 사건이 아닙니다. 질투의 배후에는 질투의 영이 있고 악령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14-15절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성경은 이렇게 시기하는 것이 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반대로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이라고 합니다. 질투의 영은 곧 악한 영입니다. 이 악한 영은 궁극적으로 질투하는 상대방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질투하고 있는 자신을 파괴시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인생을 똑같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이 되면 됩니다. 그런데 질투는 자꾸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비교하게 합니다. 꼭 1등을 차지하는 사람만이 가장 위대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2등도 쓰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시려고 꼴찌도 쓰십니다. 미련한 자를 들어서 지혜롭게 쓰셔서 지혜로운 자를 놀라게 만드시기도 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대로만 살아가면 됩니다. 최고가 되어야만 가장 위대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집에서 항상 쓰는 그릇들은 다 평범한 그릇들입니다. 아주 예쁘고 아름답고 비싼 그릇들은 잘 쓰게 되지 않습니다. 매일 밥상에 올라오는 밥 사발, 컵 등 조그만 그릇들이 날마다 쓰임을 받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노래로 하나님께 쓰임받으려면 굉장히 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조수미 같은 가수들은 1년에 한 두 번 열리는 큰 음악회에 나와서 노래하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벌 볼일 없는 사람들은 주일이면 매번 찬양대석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놀랍게 쓰임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가지고 그것을 부지런히 개발하면서 주께서 원하시는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쳐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질투의 영을 극복하려면 우리는 이웃을 축복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웃을 칭찬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질투의 반대는 칭찬, 축복입니다. 질투하지 않겠다고 결심만 해서는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이웃을 칭찬하고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울이 다윗과 함께 돌아올 때 사울은 천천을 축였고, 다윗은 만만을 죽였다는 노래 소리를 듣고 질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에 놀라운 후계자 지도자를 한 사람 주셨구나. 우리 민족에 다윗과 같은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다윗을 보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뒤에서 다른 사람을 돕는 역할을 하면서 세워가는 기쁨이 얼마나 큰 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질투하는 자를 버리십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하나님이 사울을 떠나셨다는 말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하나님은 질투하는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떠났고 다윗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사울을 버리시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했던 다윗 편에 서서 그의 일생을 인도하십니다. 본문 14절에는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느니라.”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지혜롭게 행했고,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섬기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많은 핍박을 받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면서도 자기를 원망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질투의 영을 다스리지 못하고 방치하여 사울과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버리실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핍박을 받고 좀 더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끝까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고 격려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더 지혜롭고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시겠습니까?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질투를 극복하는 비결운 평범한 것, 자신의 것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을 불러 비범하게 쓰십니다. 이웃을 축복하십시오. 이웃을 축복하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는 축복의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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