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아끼는 교사(요나서 4:11), 김덕선 목사
“요나”는 주전 8세기에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때 활동한 선지자로서 니느웨에 선교 활동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앗수르가 북쪽 이스라엘을 너무나 괴롭히고 힘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니느웨 성의 특징은 크고 악독한 성읍이었습니다(1:2). 8세기의 니느웨는 신 앗수르 제국의 거대한 권력판도의 중심지로서, 고대의 근동 제국을 정복한 대제국의 수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앗수르의 권력 밑에서 만큼이나 그토록 잔인하게 수난을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스는 스페인 남서 해안에 있는 도시로서 은과 철과 주석과 납이 많은 곳이었습니다(겔 27:12).
다시스는 요나가 도망하기에 가장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첫째, 다시스는 그가 가기로 에정되어 있는 니느웨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그 당시 세계 최고 끝이었습니다.
둘째, 다시스는 무역과 산업의 도시로서, 어느 정도 안정과 평안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나는 동쪽으로 거친 사막을 가로지르는 여행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서쪽으로 잔잔한 지중해를 건너는 항해를 시작하였습니다.
1. 교사는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에 따라서 좌우되면 안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상황과 환경을 바꾸고 싶어하여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어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사공들은 각각 자기의 신들을 부르고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물건들을 바다에 던집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배의 선장이 요나에게 당신의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가 망하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배에 탄 승객들이 우리가 제비를 뽑아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왔는지 찾아내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 결국 요나가 제비 뽑기에 당첨이 됩니다. 사람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국적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그때 요나가 자신은 육지와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임을 밝힙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쳤기 때문에 아러한 폭풍을 만나게 되었다고 실토합니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면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라고 건의합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원들이 배를 육지로 돌리려고 애를 쓰지만 바다가 점점 더 흉용해지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면 일이 자꾸 악화됩니다. 지금 내 맘에 가책이 되는 부분이 있으면 빨리 처리하십시오. 집사님 미안합니다. 권사님 내가 지난 번에 잘못했습니다. 반드시 하십시오. 그러면 살아납니다. 자기가 삽니다. 상대방이 삽니다. 교회가 삽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각자가 아니라 한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손가락 끝이 아파도 온 몸이 아픈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즉시 발견하고 대처하는 것이 영적인 지혜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생긴 문제는 즉시 처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점점 커져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소명을 받은 후에 다른 이방인들이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께 호소할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들어서 바다에 던지라는 것도 순수한 자기 희생보다도 저항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가 뱃속에 들어갔을 때는 머리가 먼저 삼켜졌고, 토해서 나올 때에도 머리가 만져 나왔습니다. 즉 요나는 고기 배속에서 180도 방향 전환하였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가 금방 조용해집니다.
배에 탄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구원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때로는 큰 바람을 준비하시기도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이 나 때문에 재앙의 위기, 생명의 위기를 맞게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 인생의 코스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생각지 않은 바람과 변수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여 살아가도록 만드십니다. 기어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포기하고 도망치다가 큰 풍랑에 내던져진 요나를 어떻게 하셨을까요? 요나서 1장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 속에 있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요나가 배에서 던져질 때 떨어지는 바로 그곳에 큰 물고기를 예비시켜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정확하게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2. 때로는 문제를 만날 때 기도하고, 사명을 발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요나는 밤낮 삼일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게 됩니다. 요나서 2장 1-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잘못 살았던 지난 날의 모습을 바라보며 돌이켜 회개하는 기도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고난의 사건을 겪으면서도 기도의 자리를 찾지 못한 채 기도가 안된다고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잘 나오는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최악의 상황 가운데서 기도가 잘 안되는 상황에서 기도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기도가 되지 않을 때가 기도가 가장 필요한 상황이고 기도의 응답이 신속히 이루어지는 상황입니다.
요나는 고난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해 일어난 사건임을 인정하고 다시 한번 사명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고난의 상황 가운데 기도하고, 사명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요나는 주의 낯을 피하여 도망했던 자신의 삶을 회개하고 성전에서 주의 낯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에 나와서 내 미음대로 고집하며 살아왔던 삶을 회개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셔서 회복시켜 주셔달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내 영혼이 피곤하여 쉬고 싶을 바로 그 때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찾아야 할 때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나아와서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정리가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께 요나에게 다시 사명을 맡기시기까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사명을 포기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큰 바람을 준비시키셨습니다(1:4). 배에 탄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질 때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떨어지는 그 지점에 큰 물고기를 예비하게 하시고 삼키게 하셨습니다(1:17).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습니다(2:10).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묶었던 인생의 매듭을 하나님께서 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어게인, 다시 사명을 감당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요나사 3절 하반절에 보면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치고 다닙니다. “사십 일이 지나며 니느웨가 무너집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면서 높은 자로부터 낮은 자에게 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합니다. 이 소식이 니느웨 왕에게 들려지매 임금이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니느웨 왕은 조서를 내려 사람이나 짐승까지도 금식하고 물까지도 입에 대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다같이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선포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실지 누가 알겠느냐고 말합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이렇게 니느웨 백성들이 총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요나의 선교의 일정 가운데서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사흘 길인데 하루 동안 다니고 말았을까 하는 대목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4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아니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의 마음속에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재앙을 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실 줄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자기는 다시스로 도망치게 되었다고 변호하고 있습니다. 즉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들이 은혜 받고 변화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요나처럼 내 남편과 내 아내와 내 자녀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 생활 잘 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지 않습니까?
3. 사명을 감당하기에 앞서 영혼을 아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4장 1절에 요나가 매우 싫어했다는 표현과(라이)과 3장 8, 10절에 악한 길이라는 표현과 같은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요나의 엄청난 악함과 증오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 1인칭(내가)의 진술이 다섯 번 나온다. 3절에서도 네 번이나 나옵니다. 요나의 자아가 무려 9번이나 나타납니다. 요나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라 열등감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실제로 요나는 니느웨 백성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괴롭히고 있습니다.
요나의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니느웨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들의 영혼을 아끼는 마음이 없습니다. 영혼을 아끼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교회에 데려 나오기는 하지만 상처를 주어서 신앙 자체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새로운 성도가 들어올 때 우리는 그 영혼을 아끼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요나는 자기가 선포한 말씀대로 니느웨 백성이 멸망하지 않는다고 해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요나는 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나서 시험이 든 케이스입니다. 니느웨 백성이 멸망당한다고 선포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 자체에 대해 자신의 체면이 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셔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입장이 뭐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라고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받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 영혼이 구원받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고, 오히려 그 영혼이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받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의 문제가 심각한 것이 사실이지만, 요나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들을 괴롭혔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멸망받는 모습을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인생이 아니라 사명에 초점을 맞추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 때문에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사명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사명은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면서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 마음보다 자기의 영광에 신경을 더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에 대해서 요한복음 5장 44절에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받기 보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마음이 빼앗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관찰시키려는 욕구가 더 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불평을 토로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시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며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기도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하나님께 굴복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4장 5절입니다. “요나가 성읍 에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가 니느웨 성읍 밖에 나가서 도대체 어떤 광경을 보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혹시 하나님께서 다시 뜻을 돌이켜서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을 보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보다 자기와 자기 백성을 더 사랑하신다고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나의 착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이스라엘 백성을 분명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니느웨 백성들과 같이 악한 백성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겔33:11).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라고 촉구하십니다. 어떻게 해서 죽고자 하느냐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요나는 자신이 싫어하는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모습을 보고 시험에 듭니다. 문제는 요나는 자신이 잘못했을 때 회개하고 돌이키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대하여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고국에 있을 때 니느웨 백성을 멸망시키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니느웨 백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알기 때문에 제가 다시스로 도망친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대해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고 싶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마음에 안들어서 다시스로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원하셔도 내가 싫으면 계속해서 싫어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이 멸망하지 않는 것을 보고 너무 싫어하는 요나에게 “내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반문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성내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한다고 내세우지 말고 그게 옳은지 판단해야 합니다. 이러한 요나를 향해서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박넝쿨을 준비하셔서 그를 위로하십니다. 요나서 4장 6절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에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심이었 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그분의 마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여러 채널을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본문 7절입니다. “하나님이 벌례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통해서도 깨닫게 하십니다. 본문 8절입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품을 예비하셨습니다.” 해가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요나는 지금 해가 강렬하게 자신의 머리에 비추는 것 때문에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살려 놓으셨는데 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 때문에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약한 소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9절에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박넝쿨로 인해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때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다고 변명합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한다고 하면서 사소한 것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이외로 많습니다. 감정이 상하고 기분이 나쁜 것 때문에 휘둘려서 사명을 포기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요나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던 이 박넝쿨을 너가 그렇게 아끼는데 하물며 이 큰 성읍에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 이만 명과 가축이 많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아끼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박넝쿨의 비유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순전히 선물받은 것을 잃을 때에 고통스러워하고 있구나. 그러나 나는 직접 내가 창조한 것 때문에 슬픔을 당하고 있노라. 나에게 조금 불편을 주고 괴로움을 주는 그 어떤 것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는 약한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아껴야 할 것을 방치한 때 부질없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서 사명을 포기하지 않기 원합니다.
요나는 선지자로서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의 패턴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직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익숙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말씀의 인도 없이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다보면 맨 처음엔 열정으로 되지만 나중에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칭찬받지 못하면 늘 섭섭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늘 섭섭하고 인정받지 못하면 늘 답답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으면 그것이 완전한 보장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견디고 어려워도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분을 감당하면서 종종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니느웨와 다시스 중에서 지금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 당신에게서 지금의 니느웨는 당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거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은근히 안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그 분 안되게 해주세요, 벌을 받게 해주세요, 이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분노보다 사랑이 더 강하시고, 심판보다는 용서를 더 하시는 분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는 율법을 지키느랴고 고생을 했고, 안식일을 지키고 희생제물을 갖다 바치고, 절제도 많이 하고 수고도 많이 했는데, 자기는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멸망 받을 니느웨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공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에서도 나타납니다. 교회를 위해서 내가 얼마나 봉사를 했는데, 수고를 많이 했고, 헌금을 얼마나 많이했는데 라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모습입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시는데, 요나는 게속해서 하나님께 말대꾸를 하며 성을 내다가 죽을 지경이 된다고 합당한 일이라고 계속 우깁니다. 사실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갈 때 누가 화를 냈어야 합니까? 또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할 때에 화를 내실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한다고 죽여달라고 할 때에도 화낼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지금도 고개를 높이 들고 덤벼드는 요나에게 화를 내실 분은 정작 하나님이신데 요나가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란 어린아이를 의미하는데, 거기에 어른들을 합치면 니느웨 인구는 60만명이 가깝다고 합니다. 요나 네가 땀흘려서 심은 것도 아니고 하룻밤에 낫다가 시들어버리는 흔한 박넝쿨을 네가 그렇게 아낀다면 하물며 천하보다 귀한 수많은 영혼들이 거하는 이 성을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교사의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인해 교회가 힘이 받게 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교사 때문에 힘이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목회 사역의 추진력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에 안드는 사람,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을 때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발휘하여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은사란 자신의 눈에 보여지는 것이 은사입니다. 판단하지만 말고 자신이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가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 서로 생각이 다르고 마음에 안드는 학생들을 만날 때에도 아끼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더라도 인내하면서 기다려주어야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교사는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마땅히 갈길과 할 일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출 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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