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절).
오늘 본문은 인간 사회에서 일어난 최초의 살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좇겨난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이란 두 자녀를 낳았습니다. 농사를 짓던 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양을 치던 동생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는 것에 격분하여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최초의 살인 사건은 단순한 범죄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보여준 사건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생각과 행위는 죄로 오염되어 범죄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도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제사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형식적인 예배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영적 예배를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1. 당신은 예배에 실패하고 있지 않습니까?(4-5절)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한 불만으로 아벨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 미움이 살인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왜 받지 않으셨을까요?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종교적으로 무관심하거나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외형적으로 그는 믿음을 반대한 사람도 아니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더더구나 아니었습니다.
4-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제사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거부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아벨의 제물은 태우고, 가인의 제물은 그냥 내버러두시는 방법을 사용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데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줄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제물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지만 자기의 방식으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단순한 형식과 절차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90이 넘으신 할머니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연로한 탓에 귀가 들리지 않고 눈도 희미해서 목사님의 설교나 찬송을 잘 듣지 못하면서도 토요일에는 머리를 감고 옷을 다려 놓고서 주일을 기다려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단 한 번도 주일예배에 빠지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목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었고,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도 그 할머니는 따라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같이 했던 것입니다. 이 할머니의 예배는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중요한 것은 형식이나 절차가 아니라 진실한 마음입니다. 이 할머니에게는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구원받은 성도들과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더불어 그분께 기쁨과 즐거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무엇으로 기쁘시게 헤드리이까?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습니까? 둘째 우리가 서로를 세우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곳에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형제와 자매를 어떻게 섬길 수 있습니까? 나의 관심이나 특별한 격려, 어떤 선물이 필요한 사람이 없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10분 정도 일찍 교회에 도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당신은 근심어린 얼굴을 차아내거나 어떤 이에게 감사할 것을 깜빡 잊은 사실, 최근에 일어난 어떤 일로 인해 용기를 주어야 할 어떤 사람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힘으로써 우리는 한 몸으로 함께 에배드리러 왔음을 상기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예배를 드리면서 느끼는 부분은 예배의 진행 속도와 흐름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양 부를 때 템포를 조금 빠르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찬양이 너누 느리면 예배의 생동감을 잃게 됩니다. 예배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기도와 찬양 광고 말씀, 폐회 등 하나의 순서가 끝나면 다른 순서가 바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광고 시간에 필요한 것 외에는 주보를 참고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2. 당신은 감정 처리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지 않습니까?(6-7절)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어떠한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라고 했습니다. 극심한 분노나 불만에 의해 그의 안면 근육이 경직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가인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씩씩거리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회개하는기는 커녕 가인은 아벨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이 발동하여 동생을 심히 미워하였습니다. 가인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외부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불편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잘했다면 왜 떳떳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죄의 소원이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너를 향하여 기를 쓰고 달려들고 하니 죄의 욕망을 물리치고 이겨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말씀을 통해서 죄의 충동을 억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경계하셨습니다. 가인이 자신의 감정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죄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의 분노를 삭이지 못해 하나님의 말씀을 끝내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하나님도 못말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고 심히 미워한 사실은 결과적으로 가인이 하나님께 대하여 분노한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대한 못마땅한 부분을 인간에게 화풀이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대해 인간이 이유를 붙이거나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무서운 범죄행위입니다(렘3:12).
가인이 제사드리는 일에 실패했을 때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분노와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을 위해 노력하고 선한 일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사람이 선한데로 기울어지는 경향만 있으면 그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마음에 선을 행할 경향이 있었다면 그후에 그 아우 아벨을 죽이는 일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분노와 성냄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윌리엄 바클레이는 사람들은 남들이 자기에게 잘못을 행할 때 반응하는데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고 합니다. 한 종류는 자기권리만 생각하는 타입이고, 다른 한 종류는 자기의무만 생각하는 타입입니다.
우리가 우리 권리에 집착하는 한 우리의 분노는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더라도 우리의 의무를 기억해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라도 의무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의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사랑의 의무를 준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당하는 어떤 일도 사랑의 거룩한 의무를 실천하는데 필요한 또 하나의 기회가 띨 뿐입니다.
3. 당신은 관계가 깨어진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8-9절)
가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실패하자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으로 가득찼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됨으로 인해 그는 아벨에 대한 미움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책망과 권면을 듣고서도 회개는 커녕 분노와 불만을 억제하지 못한채 아벨을 죽이려 들판에 꾀어내었던 것입니다. 문맥을 살펴 보면(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느니라)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책망을 그대로 아벨에게 이야기 했을 가능성도 전혀 베제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쳐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비롯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원문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고의적으로 죽일 의도를 가지고 때렸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마음이 확고하게 사단에게 정복당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가인에게 찾아 오셔서 지금이라도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습니다(9절). 그런데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처럼 대답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짜증스러운 어투로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어진 관계로 인해 너무나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여 죽인 것은 아벨이 가인에게 잘못을 행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담의 가정에 일어난 사건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불경건한 자가 경건한 자를 핍박하였다는 점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지만 땅에 흘렀던 아벨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의인이 핍박을 받아 죽을 때 악인에게 지는 것 같으나 악인에게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승리는 의인에게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인은 여전히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기보다는 자신이 담당해야 할 죄값의 무게만을 따지고 있었습니다. 가인은 여전히 완고했고 자신을 뉘우칠 줄 몰랐습니다. 그이 잘못은 계속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전히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의 불안과 어리석음까지 다 받아들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셨느니라"(15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하셨지만 그 인격에 대한 긍휼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행위는 거절하되 인격은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와같이 범죄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이 죄로 인하여 이웃과 교인들로부터 격리된 가인과 같은 상태라면 즉시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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