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류 역사상 지급보다 통신과 커뮤니케이션 시설이 더 발달한 적이 없지만, 지금보다 더 외롭고 고독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없엇다고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에 눈물 흘리며 잠자리에 듭니다.
1.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서 주저앉지 마십시오(1-12절)
전도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억울한 사연들과 부조리들을 바라보며 탄식합니다. 권력을 가잔 사람들이 힘이 없는 사람들을 학대합니다(하류층) 학대받는 자들은 억울하고 서러워서 눈물을 흘려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원칙과 잣대를 가지고 휘두르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위로자가 없습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솔로몬 왕입니다. 나라의 통치자로서 학대받는 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헤아리는 것을 볼 때에 너무나 귀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도자로서 세우신 것은 휘두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주신 것이 직분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섬기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잘못된 타성을 고치고 약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보태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이러한 학대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미 죽은 사람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사는 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자살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엘리야도 이사벨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로뎀 나무 아래에서 차라리 내 생명을 취하려 달라고 절규합니다. 그렇다고 자살을 시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둘보다 차라리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이 세상에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을 보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욥이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너무 극심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었더라면 좋았겠다고 탄식합니다(욥 3:11).
그러나 부당한 학대를 받는 사람들의 탄식을 들으시는 분이 계십니다(출 2:23-25).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 계십니다. 마음의 동기까지도 잘 아시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까지도 헤아리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진정한 위로자는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고후 1:4).
이 세상에서 무엇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그 모든 수고가 시기심과 경쟁심에서 유발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이 헛된 수고에 불과합니다. 어떤 목표를 세워 놓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수고와 재능에 대해 시기하기 쉽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나친 경쟁 심리를 부추기는 사회의 분위기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시기심이나 경쟁심이 아니라 선의의 경쟁으로 사랑의 동기로 일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것 자체가 싫다고 해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6절에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낫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적은 소유를 가지고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부자지만 어리석은 자보다 낫습니다.
전도자는 이 세상에 또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녀도 없고 형제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상류층). 어쩌면 지나친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녀와의 관계도, 형제들과의 관계도 다 끊고 살아가는 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공은 했지만 관계는 다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수고했던가? 내 마음 속에는 왜 이렇게 낙이 없는가?
많은 재물도 그의 눈에는 도무지 흡족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열심히 일하나? 이같이 고생하면서도 자신은 행복하지 않으니 이것 또한 허무하고 비참한 일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자녀에게 행복을 가르치려면” 글을 소개합니다. “자녀들에게 많은 장난감과 많은 돈을 주는 것이 도리어 그 아이를 장차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심령의 낙을 부릴 수 있는 것은 재물이나 명예와 같이 외부적인 여건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가능합니다.
자기의 재능만 믿고 사는 사람이나, 재물을 의지하고 게으른 사람이니, 죽도록 일만 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사람에게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 보내는 사람입니다.
2. 서로 같이해야 세상을 넉넉히 이깁니다(13-16절)
어리석은 사람은 재물을 얻고 쾌락을 추구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관계를 맺는 데에 힘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서로 단합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성경에는 두 사람이 협력할 때 얻는 유익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전도할 때에도 두 사람씩 파송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두 세 사람이 내 마음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십니다.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으면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가정도 교회나 사회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협력할 때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병원에 입원 할 때에도 병실에서 친구를 사귀면 훨씬 지내기가 쉽습니다.
한 사람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좋습니다. 삼겹줄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가 낙심하고 지치고 넘어질 때 누군가 붙들어 주고 일으켜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을 때 가까이서 위로해 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팔레스틴은 사막에서 여행하다가 밤에 노숙하게 되면 기온이 떨어지면 매우 춥습니다. 그때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게 됩니다. 혼자 여행하다가 강도가 해칠 경우 꼼짝없이 당하지만, 두 사람이 여행할 경우는 능히 당해낼 수 있습니다. 세 사람 이상인 경우는 더욱더 힘과 탄력을 받게 됩니다.
서로 교제하면 누리는 유익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둘은 하나보다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 둘째로 그들은 필요할 때 서로 도울 수 있습니다(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셋째로 그들은 서로에게 정서적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려니와), 넷째로 그들은 서로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어느날 칼빈에게 제자들이 찾아와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너무 많은 일과 사람들 속에서 지쳐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얘기를 듣고 칼빈이 말했습니다. ”자네들이 회복되려면 꼭 이렇게 해야 하네. 먼저는 말씀과 은혜 안에 거해야 하네. 남을 위해서 말씀을 전하기만 했지. 정작 자신들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러니 말씀을 머리로 듣지 말고 가슴으로 듣도록 하게!
그 다음에는 영적인 대가들의 전기를 읽어야 해. 전기란 요약된 간증이므로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그들의 뜨거움을 느낄 수 있고, 신앙을 현실 속에서 적용할 수 있네. 마지막으로는 지체의식을 가지게.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아닌가? 동떨어진 지체가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될 수 있는가? 팔 하나가 따로 떨어져 있으면 썩어버리지만 몸에 붙어 있으면 온 몸이 지친 팔에 영양을 공급하고 도와주어서 회복되는 것이야.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의 의미있는 만남을 나누면서 살게. 그것이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네.“
리차드 포스터는 돈, 섹스, 권력이란 책에서 성욕, 물욕, 권력욕, 이 세 가지는 인간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강도의 측면에 있어서 성욕은 강한 것 같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보다 좀 더 지속적이고 더 많은 관심을 끄는 것은 재물에 대한 욕망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 권력에 대한 욕망입니다. 남들보다 더 높아지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강합니다. 내 자존심이 상했을 때,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했을 때 우리는 못견뎌하고 격분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왕보다는 가난해도 지혜로운 청년이 백번 낫습니다. 여기서 "늙고"란 신체적인 노쇠가 아니 정신적으로 완고하고 고집스러워지고 대접받으려고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새롭게 무언가 시도하려고 할 때 잘 수용하지 않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통치자가 있으명 그 공동체는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요셉과 같은 청년은 감옥에 있다가도 나와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기와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이것 역시 허무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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