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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마태복음 21:28-32),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6.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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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시몬 비젠탈이 지은 [해바라기]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던 시몬 비젠탈은 어느 날 갑자기 죽어가는 한 SS(나치대 친위대) 대원의 병상 앞에 서게 됩니다. 젊은 SS 대원은 난생 처음 보는 유대인에게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을 낱낱이 털어놓으며 참회합니다. 하루 하루 죽기를 기다리는 동안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이 사실을 유대인에게 떨어 놓음으로써 마음 편히 죽을 수 있도록 용서를 받으려는 것입니다.

 

그를 동정할 것인가 심판할 것인가, 침묵을 할 것인가 진실을 말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비젠탈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몇 년이 흐른 뒤에도 비젠탈의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과연 내가 옳은 일을 한 것일까?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과연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우리에게도 지난 온 날들을 돌이켜 볼 때 계속 그렇게 한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고민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2천년 전에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특별한 시점에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하신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가서 애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큰 아들이 “네 아버지 그렇게 할께요”가겠습니다”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똑같이 말했는데 단호하게 싫더고 말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마음에 걸려서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에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둘째 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 모두 죄인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속이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는 위선의 죄를 범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큰 아들은 예의바른 자이지만 정직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정직하지만 고집이 셉니다.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는 것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기록될 당시로 돌아가면 아버지의 명예를 존중한 아들은 어떤 아들일까요? 큰 아들입니다. 많은 기족들이 보는 가운데 아버지의 체면을 살린 아들은 누구일까요? 큰 아들입니다. 당시에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거나 반기를 드는 것은 아버지에게 수치를 가하는 무례한 행동입니다. 작은 아들은 면전에서 싫다고 함으로써 주변의 많은 친적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짐으로 당시의 일반화된 공식을 깨뜨립니다. 사람들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은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언제 누구에게 어디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걸까요? 예수님의 마지막 공생애 한 주간, 즉 고난 주간중 화요일에 일어난 입니다. 누가복음 20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뜰에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옵니다. 그들은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들입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이 상과 비둘기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십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위를 주신 겁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그들이 서로 입장이 난처하여 의논합니다. 만약 하늘로부터라고 하면, 즉 하나님으로부터라고 하면, 어찌하여 너희는 믿지 아니하느냐고 추궁을 받게 됩니다. 당시에 세레 요한은 죽은 지 2-3년 되었지만 그의 명성을 이작도 높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여론이 무서운 겁니다. 누가복음 20 6절에 보면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라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하고 의식합니다.

 

그들은 입장이 난처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준을 고집하기 위하여 구약의 예언과 예수님의 말씀을 끝내 거부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겁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 용서함을 받는 의식은 우슬초라는 풀에 물을 찍어 뿌리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죄를 씻는 예표로 물속에 잠기는 예식을 행했던 것입니다. 즉 요한의 세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두 아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큰 아들은 당시에 율법을 준수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존경받는 대제사장과 장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킵니다.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지 않습니다. 반면에 작은 아들은 당시에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계층, 세리와 창녀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세리들과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아니 평생을 신앙생활 잘 하려고 몸부림쳤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큰 아들에게 뭐가 문제일까요?

 

교회 안에서는 예라고 하지만 생활 속에서는 그렇게 할 마음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가지 않았던 것, 둘째 아들이 처음에는 가기 싫다고 했다고 뉘우치고 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문 32절입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돠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큰 아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종교적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기의 의를 세우고 만족할 뿐 회개의 필요성도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하지만 생활 속에서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마음의 가책이 별로 없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는 언제나 순종하겠다고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안해도 된다는 생각이 늘 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더 믿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합니다. 스스로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습니다. 회개는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감정이나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뒤늦게나마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과거에 잘못 살았다 하더라도 내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의를 입으면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잘 해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잘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처음에 감정적으로 싫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당시에 세리와 창녀들은 천한 신분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낙인찍힌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외로 자신의 힘으로 잘 해볼려고 했던 것들이 오히려 걸릴돌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느끼고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당장 Yes라고 하고 나중에 실제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비록 앞에서는 No라고 했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명에를 높이는 행동을 요구하는 나라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Yes, 끝까지 Yes를 유지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고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철저히 꺾이는 아픔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진 어떤 것으로 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의 것으로 만들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내 것에다 주님의 것으로 채워서 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 것을 비우고 주님의 것으로 채우셔서 쓰십니다. 그러면 주님을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은 다 필요 없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을 주님의 때에 다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나의 어떤 것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으로 먼저 내가 만들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에 붙잡힌 지팡이입니다. 주님이 써주셔야 됩니다. 어쩌면 많은 것을 갖춘 사람이 신앙생활에서 손해를 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갖춘 것을 내세우거나 의지할 때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별 볼일없는 사람이 늘 앞선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든지 간에 주님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일까요?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겠다고 최선을 다하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주님이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해 버리는 적은 없었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끝까지 거부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해놓고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쁜 경우입니다. 이제 주님 앞에서 '예'라고 말씀하고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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