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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어디서 위로를 받나요?(고린도후서 1:3-5), 김덕선 목사

by liefd 2026.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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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장모님이 50대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을 때 심방팀이 오셔서 불렀던 복음성가 가사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라는 복음 성가입니다.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 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받지 못했다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의지할 것 없는 이 몸 위로받기 원합니다.”오늘 주보 앞면에 보면 위로는 어디서부터 오는지 아십니까? 위로부터 옵니다. 하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염려와 두려움 속에서 어디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일단 거기서 벗어나서 새로운 선택을 하면 될까요? 하지만 선택의 수가 늘어갈수록 의심과 불안도 늘어날 뿐입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받기를 원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위로가 안되는 것에 기대를 합니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안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후회를 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위로의 설정이 잘못 된 것 같습니다. 정말 이 세상에 진정한 위로가 있을까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합니다. 요리문답은 요리를 잘 할 수 있도록 질문과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요리문답이란 신앙의 바른 정립을 위하여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가르쳐 주는 교리 문답을 말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제 1 요리문답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라고 뭇습니다.

 

먼저, 위로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위로”란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독거려주는 그런 감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주는 위로는 우리가 가진 근심이나 걱정에 대한 연민이나 위로를 능가하는 구속적인 위로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거나 이해해 준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지거나 괜찮아진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위로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는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과 우리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위로는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 것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다윗이 진정한 위로를 발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시편 23 1절에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다윗은 자신의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해 주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더 이상 나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이유는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은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다. 죽고 싶어서 죽는 경우도 없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우리의 심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질병에 걸리거나, 큰 사고를 당하거나, 배우자가 간통을 저지르거나, 갑작스런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거나,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배신하거나, 자녀가 자꾸 불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럴 때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일어나는 큰 갈등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경험이 우리를 결정하여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하도록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기억하지 않으면 영적인 갈등으로 혼란을 겪게 됩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내 인생은 누군가에게 속해 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진정한 위로는 구속의 위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셔서 내 모든 죄의 대가를 지블하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위로의 근원입니다.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위로는 상황이나 소유가 아니라 관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위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23 4절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참된 평안과 위로를 얻게 되었는지 소개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로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진정한 위로는 주님이 함께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손길을 경험할 때 참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라는 영어 단어 trost는 신뢰라는 단어 trust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위로는 누군가에 대한 확고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혼란스러워하고 괴로워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암울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겪든, 어디를 가든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교회는 다니지만 하나님도 당신에게 위로가 안되는 분 혹시 계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상황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본문 4절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환난 중에 위로하시는 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가 심각하고 복잡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이 세상에서 위로를 그 누구에게 위로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자라고 하지만 이 세상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생각지 않은 돈이 생길 때, 병든 자가 나을 때, 안정된 직장을 얻을 때, 좋은 차를 사고 주택을 구입할 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로의 유효기간이 짧습니다.

 

이 세상의 위로는 일시적이고 불안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의 삶은 계속되는 좌절의 경험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경험이 이어집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고통스럽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8 38-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으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위로는 다른 사람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환난 가운데서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였기 때문에 환난에 처한 성도들에게 강력한 도전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신자는 자신이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그를 통한 위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견질 수 있는 힘을 제공합니다. 나의 고난이 언젠가 구원의 도구로 위로의 도구로 은사의 도구로 쓰임 받습니다.

 

상처가 때로는 은사가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복음을 위해 필요한 곳에 쓰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삼각 위로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환난 가운데서 받는 위로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능히 위로하는 도구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위로는 우리가 가진 근심과 걱정에 대한 연민이나 위안을 능가하는 구속적인 위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진정한 위로가 가능합니다. 위로의 차원이 다릅니다. 지금 제가 당하고 있는 고난 그 자체도 힘겨운데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요?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위로가 넘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 6절입니다. “우리가 환난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위로를 서로 주고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나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확신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매몰당하지 말고 오히려 밖으로 끌어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안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혼자서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런 태도는 당신의 고통을 더욱 가증시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난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을 고립시키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물론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이 부담스럽고 느껴질 때가 있고,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 두 번 다시 그런 상처를 받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구원과 보호와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서 위로를 주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사랑의 대상이지 의지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녀는 사랑의 대상이지 위로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마음에 사형선고 받은 것같이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누구에 대한 비난이나 원망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자신에 대한 탄식이나 상처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바울처럼 그것이 누구 때문에 왔든지, 어떻게 해서 왔던지 간에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기회로 삼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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