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타임즈는 “애도의 기술”이란 글에서 7가지를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알려주는 건 '말문이 막혀도 괜찮다'는 겁니다.
무슨 위로를 해야할 지 모르고 그저 가슴이 먹먹합니다. '천국에 갔을 것이다'이렇게 진부한 위로라도 건네려 하는데, 글에서는 그러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두 번째로는 좋은 기억들을 나누라고 조언하기도 합니다.
고인에 대한 좋은 기억들을 꺼내어 유족들에게 나누어주고 공유해주는 게 위로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로는 '비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위로를 할 때는 슬픔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나를 잠시 빼고, 상대방이 얼마나 슬플지에 잠시만이라도 초점을 맞춰주시길 바랍니다.
네 번째는 죽음이란 단어를 피하지 말라는 겁니다.
애도를 할 때는 죽었다는 말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이는 것이 애도에 좋은 방법일 수 있다는 겁니다.
다섯번째 방법은 '냉정해지기'입니다.
약간의 퉁명스럽고 냉소적인 태도, 약간의 농담이나 유머가 애도의 도움을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실제 상황에서 조금 냉정한 태도로 장례 절차를 도와준다거나, 하는 일도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섯번째로 '소셜미디어로는 충분하지 않다' 입니다.
많은 이들이 SNS를 통해 위로를 하거나, 이메일로 위를 전하는데, 아무리 충분한 위로를 담더라도 직접 장례식장에 참석하거나 손으로 쓴 애도 편지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직접 찾아가 애도를 전하는 방법을 택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는 '위로에는 시간 제약이 없다'입니다.
바로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유족들이나 고인을 잃어 슬퍼하는 이들은 나중에 받은 위로에 대해서도 위로를 느끼곤 한다고 합니다. 애도에는 정해진 기한이 없다는 겁니다. 고인의 생일, 기일 등을 이용해 다시 한번 위로의 말을 건네주시길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5:11절은 그리스도이 재림를 다루고 있습니다. 4장 13-18절은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에 대하여, 5:1-11절은 재림의 시기와 재림의 준비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보게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그들은 어떻게 되는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에 염려에 대해 답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누구나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자에게는 죽음 앞에서도 슬퍼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글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게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신자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신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잠자는 것입니다. 묘비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고이 잠드소서”. 아무게 여기 잠들다. 영여로 묘지는 cemetery라고 하는데 이 말은 잠자는 곳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잠은 깨어날 수 없는 영원한 잠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죽음은 모든 게 끝나기 때문에 영결식이라고 합니다.
잠자는 자라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가 땅에서 묻혀있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죽음은 슬픔 그 자체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소망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부활에 대한 소망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이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을 천국의 처소로 데리고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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