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관점과 해석의 차이입니다(전도서 1:12-18), 김덕선 목사
오늘은 전도서 1장 12절 말씀부터 18절 말씀까지 살펴보겠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을 이렇게 살피고, 연구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다 헛되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전도서는 끝까지 읽어 보지 아니하면 우리가 오해할 기능성이 많습니다.
본문 18절에 의하면 지혜도 많고, 지식도 많아지면 근심이 더한다고 했습니다. 청소년들이 이 본문을 읽고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식이 많아지면 근심이 많아지기 때문에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해아래서, 직장 생활에서 수고하고, '다 헛되다' 바람 잡는 것 같은데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있을까? 오늘 본문의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인생은, 관점과 해석의 차이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것이 헛되다,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본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하나님 없이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것입니다. 수고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바라볼 때에 모든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이 뭔가 하려고 할 때는, 뭔가 모르게 갈등이 생깁니다. '내가 왜 이렇게 해야 되는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되기 때문에 자꾸 걸리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12장 13절에서 사람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과거에 이미 죽었고 살아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전에 갖고 있던 돈에 대한 태도가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모든 것도 죽었고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한번 죽는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라고 하는 의미에는 내 마음은 물론 내 생각. 내 욕심, 내 이상, 내 꿈. 모든 것들이 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그동안 우리가 중요하게 여겼던 삶의 요소들을 거부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전도서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에 공감을 하게 되고 허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관점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서 기자는 특별히 지혜가 헛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전도서 기자는 예루살렘의 왕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많은 부와 명예와 쾌락은 다 누려본 후에 도대체 인생이 뭐냐? 도대체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연구하고 살펴보았습니다. 즉 인생의 어떤 문제를 좀 깊이 숙고해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살펴보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두루 살펴본 결과 인생은 괴로운 거라는 토로합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도대체 인생에서 일어나는 게 뭐냐?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하나는 수고와. 다른 하나는 슬픔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제가 심방을 가서 성도들과 함께 삶을 나누다 보면 슬픔과 괴로움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의 두 단어가 수고와 슬픔이라는 말씀을 전하면 어렵게 살아가는 분도, 부유하게 살아가는 분도 고기를 끄덕끄덕합니다.
이전에 어려운 시기를 살아온 어르신들이 즐겨 부르던 찬송가 445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아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또한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은 정말 바람 잡는거다’라고 고백합니다. 바람 잡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안 잡히는 게 바람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그런 것 같습니다. 재물도 잡기를 원하지만. 안 잡히는 겁니다. 명예도 그렇습니다. 쾌락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인생의 문제를 깊이 분석하고 인생의 모든 수고는 헛되어 바람잡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이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얼마나 팽창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일평생 책 몇 권을 읽을까? 아마 좀 많이 읽는 사람이 아마 2천권에서 만 권 정도 읽을 겁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면서 잃었던 책을 빼고, 내 나름대로 인생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약 30년으로 본다면, 3일에 책 한권 정도 읽는 분이라면. 1년에 백권 가량 읽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단한 겁니다. 특별히 책을 좋아하는 분들 아니고는. 3일에 책 한권 읽는다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30년에 9천권 내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책을 많이 보면서 우리가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자극은 주지마는 변화는 못 시킵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가 없고 모자란 것을 셀 수도 없습니다.이 세상의 교육 가지고는 참된 인격자를 만들어 낼 수 없는 겁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을 변화시켜 주지는 못합니다. 지식만 가지고는 구부러질 것을 곧게 할 수 없습니다. 이지러진 것을 바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정보만 가르쳐 줄 뿐이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지식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요즘은 정보사회입니다. 컴퓨터가 나온 후에 굉장한 정보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하는 것이 저의 취미 가운데 하는데, 제목조차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많은 책이 쏟아져 나옵니다. 아마 전세계적으로 책이 수십 만권. 또 수백만 권씩 쏟아져 나옵니다. 제목도 각양각색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사람을 편안하게 하기 보다는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식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가 몰랐을 때 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건강을 위해서. 종합진단을 받습니다.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 우리 건강의 약한 부분을 예방하고 거기에 따라서 치료한다는 것은 좋은 겁니다.
그러나. 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현대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몰랐을 때가 행복하겠습니까? 미리 안 상태가 행복하겠습니까? 몰랐을 때가 행복하죠. 죽기 전 까지는 모르고 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 병이 죽을 병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죽는 삶이 시작됩니다. 현대의학이 예방차원에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공헌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과면에서 현대의학으로 고칠수 없는 병이라고 할 때는 벌써 그때부터고통이 시작되는 겁니다. 좀처럼 그 마음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어제도 제가 암으로 고통 당하는 가정에 가서 제가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위로를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암에 걸린 분은 모 권사님의 남편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 나라에 유명한 외과의사로서 인체의 부위와 암의 특징에 대해서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더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시지 않고.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너무 다 알아버리면 인생이 피곤하고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 가르쳐 주시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지 마세요. 이를테면 우리의 삶속에서 생각지 않은 고통이 찾아올 때 내가 뭘 잘못해서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잘 모르겠거든 그냥 넘어가세요. 내가 모르는 것이 내게 낫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과정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건 이래서 이렇고. 저건 저래서 그렇다고 일일이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들이 이해 할 수 있는 폭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가 지금은 몰라도. 너가 크면 엄마가. 아빠가 왜 이랬는지. 이해할 날이 올꺼야. 지금은 이야기해도 잘 이해하지 못할 꺼야? 그러면서 넘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유를 다 설명해 주지 않으면서 그 아이에게 바른 것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지금은 그 아이가 모르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데 말해도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안 가르쳐 주시는 것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겨도 하나님께서 잘 알아서. 가장 좋은 것으로 해 주실 줄을 믿기 때문에 믿음으로 문제들을 풀어가는 것입니다.
어째튼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본문 17절입니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도서 기자는 지혜를 알고자 매우 애를 썼습니다.
어느 때는 미친 척도 해 보고. 미련하게 아무런 생각도 안 하면서 보내기도 하고 오히려 지혜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식이나 이런 것들은 피곤하거든요.이것 좀 신경 안 쓰면서 좀 살 수 없나?. 그러면서 좀 엉뚱한 행동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 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서 기지는 본서에서 '헛되어 바람 잡는다'는 표현을 열 서너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전도서 기지를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 자체도 결국은 무익한 거다.”
이 세상에 이성주의, 지식주의, 합리주의. 이 모든 것은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 자체로는 행복해 지지 않습니다. 학자들이 행복해 보입니까? 피곤하게 보입니까? 어떻습니까? 저와 가까운 신학대학원 동기들이 신학교에 교수님으로 학교에 강의를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나름대로 대화를 나눕니다. 강의를 준비하고 강의를 하면서 어떤 보람을 느끼는지 소감을 물아 보면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길이 참 고독합니다. 참 힘이 듭니다.” 강의를 잘 한다고 알아줍니까? 실제적인 어떤 변화가 나타납니까? 목회의 경우는 그래도 기도하면 응답을 받고,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면 힘을 얻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학문의 길은 눈에 나타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매우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학문 그 자체로는 재미가 없습니다.
제가 이전에 총신대학에서 월요일마다 라틴어 강의를 3시간 한 적이 있습니다. 배우는 학생들이 재미없어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감동적인 이야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섞어서 강의를 진행하면 하면 대개 좋아합니다. 라틴어 공부 자체만 가지고는 재미가 없어요. 무슨 동사변화가 어떻고. 단수, 복수가 어떻고 피곤하죠. 사실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데 피곤하고 힘든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성주의에는 한계가 있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에는 중학교 때만 가도 늦습니다. 국민학교 때 영적으로 바로 교육을 하셔야 합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경쟁 사회속에서 정신이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영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허둥지둥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들어갑니다.
방황이 계속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부모하고 자식 간에 신앙의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지식이 자녀들에게 참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지식이 단지 수단이지, 삶의 목적을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지금은 교육열이 강하지마는 앞으로는 경쟁 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공부 안하는 추세로 분명히 바뀔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 학생들이 공부 안 하려고 한다는 것 아십니까? 먹고 살만한데 왜 공부를 합니까. 공부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굉장한 교육열이 오히려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일수록 더욱 불안해 하고 오히려 공부 못하는 아이일수록 마음이 편안합니다.
하나님 없는 지혜와 지식은 번민에 사로잡혀서 결국은 그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왜 공부해야 하는지, 인생의 참된 목적을 가르쳐야 합니다. 네가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란다.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심어 주어야 합니다. 아마 한 3년전에 일로 기억이 됩니다. 서울대 수석 졸업한 모 권사님 아들이 유학 가기 전에 기도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 아들은 미국의 스텐포드 대학에 들어갔는데 성적이 좋아서 국비로 좋은 조건에 들어갔습니다.
머리에 손을 얹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너의 학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학문이 꼭 되어야 한단다. 그리고 전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학문 연구에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학문은 정말 값있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와 민족을 위한. 그러한 살아있는 학문이 정말 이 시대에는 필요합니다. 그러한 실력자가 정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는 무릅니다. 오히려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이렇게 전도서 기자가 해 아래서 참 인생들의 모든 문제를 깊이 살피고, 두루 살핀 결과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라는 사실을 고백을 했는데 사실 그러합니다. 하나님 없는 학문과 지식은 오히려 사람을 번뇌케 하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이 경쟁사회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많은 청소년들이 얼마나 방황하며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실하게 공부하며 실력을 배양하는 훌륭한 우리 아들과 딸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해 주옵소서. 피곤한 과정입니다. 한 주일의 삶도 믿음의 관점에서 살게 하시고, 믿음의 해석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특별히 입시를 앞두고, 얼마 남지 않은 임시를 앞두고 수고하는 우리 아들 딸들 위에 지혜와 건강과 믿음을 더 해 주시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자신감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저들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 주시기를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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