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2:14-15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그런데 사무엘이 걱정하던 일이 터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1. 부득이한 경우에 어떻게 하십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속국은 아니었지만 실질적인 지배를 받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레바논은 시리아의 속국은 아닙니다. 그러나 레바논은 시리아의 실질적인 재배를 받는다고 봐야 합니다. 시리아 군대가 레바논의 요소요소를 점령하고 있고, 국가정책에 대하여 여러모로 간섭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도 블레셋의 실질적인 재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영토 안에 블레셋 수비대가 있었습니다.사무엘상 13장 3절입니다.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게바‘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이스라엘의 땅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땅 깊숙한 곳에 블레셋 수비대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국가 정책에도 블레셋은 간섭했습니다.
19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들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철공’이란 ‘대장장이’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농사를 지으려면 대장장이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호미도 벼리고, 도끼도 벼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블레셋은 이스라엘에 대장장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장장이의 일은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원천기술이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에 정책적인 간섭도 했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지요? 이런 상황에서 사울 왕은 엄청난 군사적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지 2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의 수비대를 기습함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3절을 다시 읽습니다. “ 요나단이 (사울 왕의 아들)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 지라.......” 왜 사울 왕이 블레셋에 싸움을 걸었을까요?
전쟁이란 비상적 수단을 통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이지 않습니까? 5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여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치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병거는 고사하고 칼과 창조차 제대로 없어 지휘자인 사울 왕과 요나단만 겨우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22절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
그러나 블레셋은 오늘날 탱크라고 할 만한 ‘병거’를 삼만 대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사시대에 가나안 왕 ‘야빈’이 병거 900승으로 이스라엘을 무려 20년 동안 압제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삿 4:3), 3만 병거가 얼마나 대단한 군사력인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비교되는 것은 무기만이 아닙니다. 블레셋의 병사는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지만 사울 왕과 함께 싸울 이스라엘의 병사는 육백 명에 불가했습니다. 15절입니다. “....... 사울이 자기와 함께한 백성의 수를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라.”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절대 열세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전쟁에 질 것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제사장인 사무엘에게 전쟁을 하기 전 예배를 드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레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8절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때때로 성경은 숫자를 이용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암시를 주는데, 본문의 ‘이레’라는 숫자도 그런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레’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나타냅니다.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이레를 기다리게 했다는 것은 단순히 그곳에 가는데 칠일이 소요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이레는 사울 왕의 행동을 평가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레는 사울 왕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 이레는 사울 왕이 적의 막강한 군사력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 이레는 사울 왕이 아무리 위급하고 불리한 상황이라도 인간적인 수단들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만 신뢰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그 이레 동안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생각에만 골똘했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인생살이에는 ‘기다림의 시간’이 있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제 때에 되지 않습니다. 기대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 ‘기다림의 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조명해보십시오. 첫 사랑과 첫 믿음을 회복하십시오. 삶의 우선순위를 재고해보십시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다림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이레 째 되는 날 동녘이 밝아왔는데도 사무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사울 왕은 자신이 직접 제사를 집전했습니다.
9절에 보면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했습니다. 사울 왕은 ‘이레’라는 평가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막 제사를 끝내자마자 제사장 사무엘이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사무엘이 현장에 도착해보니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번제물과 화목제물은 이미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물었습니다. 11절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냐.......” 이 말씀은 사무엘상 13장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2. 어쩔 수 없는 경우에도 순종하십니까?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불순종!”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의 행동양식은 무엇입니까?”“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까 아니면 불순종입니까?”
그렇다면 사울 왕이 순종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들의 신앙자세와 비교해보면서 살펴봅시다.
1) 사울 왕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절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그의 얘기를 풀어봅시다. “군사들은 동요하고 대열에서 이탈했습니다. 제사장인 당신은 나타나지 않았잖아요? 적군인 블레셋은 전쟁을 하려고 믹마스에 진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울 왕이 변명한 내용 전체였습니다.
사울 왕은 오직 세상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의 시선은 오로지 상황에만 꽂혀 있을 뿐입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의식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사울 왕은 상황에 갇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동전 아시지요? 동전이 큽니까? 태양이 큽니까? 태양은 동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지요? 그러나 동전을 눈앞에 갖다 대보십시오. 그러면 아무리 큰 태양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동전만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이 상황에 꽂혀 있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사울 왕이 바로 이런 지경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믿음이 없을 수가 있습니까?
추석명절 때 가족이 만났습니다. 셋째 조카 결혼 얘기가 대화의 내용으로 올랐습니다. 믿음이 좋은 아가씨와 사귀고 있답니다. 형들이 그 아가씨와 만난 적이 있는데, “우리 셋째의 믿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이 “오빠에게 믿음이라는 게 있어요?”하더랍니다. 그 질문이 저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조카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가족들 모두 주일성수를 합니다. 그러나 삶의 구석에 하나님을 인정함이 보이지 않아요. ‘성도’란 이름을 가졌지만 사는 모습이 세상 사람과 똑 같아요. 똑같이 걱정하고, 똑같이 불안해하고, 똑같이 염려하고, 똑같이 한숨짓고....... “믿음이란 게 있어요?”
2) 하나님에 대한 불신은 자연히 인간적인 방법을 찾게 마련입니다.
12절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이 표현은 사울 왕의 불안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사는 제사장이 집전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출 28 ,29장).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급하고 초조한 나머지 제사를 스스로 집전하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보다는 자기에게 유익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자기생각과 자기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고질적인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 1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 제물’이란 'living sacrifice'입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이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죽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뜻, 자기의 주장, 자기 입장, 자기 고집, 자기 견해, 자기 이익을 말합니다.
지난 주어떤 강사가 말씀한 내용 중에 모세 이야기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모세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땅에 진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눈앞에 아련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어떤 땅입니까? 모세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어떤 땅입니까?
40년 동안 모진 광야생활 중에도 한시도 잊지 않고 꿈에 그렸던 땅이 아닙니까? 그런데 웬 청천벽력 같은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웃통이라도 벗어 던지고 “하나님,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저를 아시잖아요! 다 순종할지라도 이것만은 못하겠습니다.”라고 항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 모세가 한 말도 “sure!" "알겠습니다!” 너무나도 아쉬웠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래야지요!
내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최고입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최선입니다. 성공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최고의 영광은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찬 288장)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this is my story, this is my song..)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신앙이란 순종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는 것이 인생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사무엘상 15:22절에서 사무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종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놀라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삶을 통해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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